황건적의 난 : 삼국지의 시발점[삼국지 대체역사 #1]

만약, 황건적의 난을 이끌었던 인물이 장각이 아닌 사마의였다면?

by 전트루

황건적의 난


당시 후한의 황제 영제는 백정 출신인 황후 하 씨와 그녀의 오라비 하진에게 정권을 일임하여 황제로서의 권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십상시라 불리며 조정을 장악한 환관들 또한 하 씨 오누이에 못지않게 부패하였기에 매관매직과 과도한 세금 등으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은 184년 장각이 이끈 대규모 민중 봉기로서, 역사에 기록된 인원만 백만에 달하는 숫자였습니다. 장각은 '평등한 세상의 도래'를 강조하는 태평도라는 종교를 통해 하북, 하남, 산동 등지에서 농민과 빈민을 결집시키고, 황건 두건을 쓴 이들은 낙양 근교까지 진격하며 후한의 주요 도시를 위협했습니다. 이 봉기는 단순한 폭동이 아니라, 제국의 심장을 흔드는 거대한 파도였습니다.

하지만 영웅은 비로소 위기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법, 후한의 마지막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황보숭, 주준, 노식과 같은 장군들과 더불어 조조와 원소, 유비와 같은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의 활약과 지도자였던 장각의 급작스러운 병사(184년)로 황건적의 난은 약 8개월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워낙에 규모도 컸고 영향력도 컸었던 황건적의 난이기에 완전히 진압되지는 않았고, 그 이후 약 10년 이상 그 잔당들이 남아 여전히 천하를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주제 선정의 이유


황건적의 난은 그 규모에서부터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대단했지만, 장각 3형제의 역량이 너무 어설펐기에 삼국지의 주요 인물들이 활약하게 되는 시발점으로서의 역할밖에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만약, 황건적의 난을 이끈 것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 지략은 물론 권력욕까지 겸비한 사마의였다면 분명히 황건적의 난은 성공했을 것이다라는 전제를 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철저하게 계산된 권력 찬탈의 도구로 변질된 황건적의 난과 그로 인해 변화하게 된 삼국지의 역사는 어떻게 뒤틀렸을지 최대한 논리적으로 유추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요 키워드


장각 : 정사에서는 도교의 태평도를 창시해 농민과 하급 관리들을 규합하여 스스로를 천공장군을 칭하며 동생 장보와 장량을 각각 지공장군, 인공장군으로 임명하여 황건적의 난을 이끌었습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남화노선이라 불리는 신선에게 태평요술서라는 책을 받아 익혀 병자들을 치료하는 기적을 선보이고, 각종 요술을 일으켜 관군을 격퇴하며 그 세를 불렸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하급 지식인 출신인 그는 능력의 한계와 급작스러운 병사로 인해 황건적의 난이라는 거대한 족적에 비해 많은 부분 평가절하되고 있습니다.


사마의 : 자는 중달로 혜안으로 시대를 꿰뚫고 냉철한 지략으로 판세를 뒤흔드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군략에 있어서는 그 유명한 제갈량의 라이벌로서 적의 심리를 꿰뚫는 기발한 계책과 때로는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전장을 지배했습니다. 또한 사마의는 권력에 대한 욕망 또한 매우 강력했기에, 자신의 능력을 경계하는 조조의 아래에서는 오랫동안 은인자중하며 때를 기다렸고, 조비 사후 어린 황제를 보좌하는 섭정의 자리에 오르면서 서서히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점진적이면서도 치밀하게 정적들을 숙청하고 군권을 장악했습니다. 특히, 말년에는 노망을 연기하면서까지 고평릉 사변이라는 과감한 쿠데타를 일으켜 조 씨 일족을 제거하고 위나라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사마의만큼 지략이 뛰어난 인물은 여럿 있었으나, 동시에 권력에 대한 강렬한 욕망까지 가진 등장인물은 없었기에 황건적의 난의 지도자로 가정하기에 가장 걸맞은 인물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진 : 백정 출신의 인물로, 황후 하 씨의 오라비라는 배경 덕분에 단숨에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 인물이었습니다. 무능하고 우유부단했던 하진은 조정 내의 복잡한 암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십상시로 대표되는 환관 세력의 발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그들의 간계에 휘둘리는 모습을 자주 보였습니다. 결정적으로, 황건적의 난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도 하진은 명확한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고, 지방 군벌들을 불러들여 토벌 작전을 펼친다는 명목하에 오히려 조정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는 훗날 변방의 일개 군벌이었던 동탁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만약, 사마의가 황건적의 난을 이끌었다면

대체역사 황건적의 난.png 만약, 사마의가 황건적의 난을 이끌었다면


황건의 불길, 천하를 삼키다


184년, 후한의 천하는 썩은 나무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백성들의 굶주린 외침이 하늘을 찔렀고, 조정은 부패한 관리들의 탐욕으로 허물어졌다. 그 혼돈의 중심에서, 사마의가 황건 두건을 쓰고 일어섰다. 그는 '창천이사 황천당립'을 외치며 후한의 무능함 아래 고통받던 백성들을 순식간에 결집시켰고, 단순히 백성들만으로 대계를 성공시킬 수 없다는 판단하에 일부 지방 호족과 전직 관료들까지 포섭하여 관군의 대응을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사마의의 황건 군은 조정과 다를 바 없는 내부의 권력 체계부터 공고히 다진 후,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편성된 후한의 토벌군을 정교한 군사 작전과 계략으로 손쉽게 격파했다. 순식간에 황건 군은 하북과 하동을 넘어 낙양 인근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한 제국의 근간을 뒤흔드는 거대한 위협으로 부상했다.


황건의 바람, 계산된 혁명


1년의 시간이 흐른 185년, 사마의의 황건 군은 봉기 초기 태평도의 신비주의를 버리고 역성혁명군의 성격으로 변모하여 진격하는 지역의 백성들의 분노를 날카로운 칼로 벼렸다. 이러한 그의 목소리는 농민들뿐 아니라 몰락한 호족, 실의에 빠진 전직 관리들까지 그의 깃발 아래 모여들게 했다. 하북과 하동을 완전히 석권한 황건 군은 단숨에 낙양 외곽까지 밀고 들어갔다. 토벌군의 대장이었던 황보숭의 관군은 그의 기습 작전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주준은 허창에서 패퇴했다.

평화의 시대에 안주했던 후한의 정규군이 감히 감당하기에는 사마의의 전략은 압도적이었다. 보급선을 끊는 기습 부대를 운용했고, 조정의 부패를 폭로해 민심을 휘어잡았다. 조정의 정규군 외의 각 지방의 유력 군벌이었던 하북의 원소는 영토의 절반을 잃었고, 공손찬은 요서로 밀려났다. 또한, 젊은 무장과 책사들을 포섭하며 이름값을 높이던 중원의 조조 또한 진류 전투에서 참패하며 세력을 잃고 패퇴했다. 한편 유비, 관우, 장비 3형제는 가슴으로는 후한에 대한 충성심을 지켰지만, 머리로는 황건적의 이상을 이해하여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하북에 은거하며 혼란스러운 천하를 관망하고 있었다.


낙양의 함락, 태평천자의 탄생


189년, 파죽지세로 중원을 점령한 사마의와 어느새 백만에 다다른 그의 황건 군은 마침내 수도 낙양을 포위했다. 하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던 후한의 저력은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고 지지부진한 소요전을 거듭하며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사마의는 요동과 강남, 강동을 제외한 중원을 모조리 접수하며 내실을 충실히 다녔고, 후한의 영향력은 낙양과 장안에 이르는 극히 일부 지역에 한정되었다.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던 후한군의 진영에 하진의 요청으로 서량의 동탁이 변방 이민족과의 계속되는 전투로 훈련된 정병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동안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황건 군이지만, 일당백의 무용을 자랑하는 동탁군의 여포로 인하여 양 군은 일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에 사마의는 전면전을 이어가는 대신, 여포의 성정을 이용하여 의리 없이 맺어진 동탁과의 관계를 파고들었다. 결국 동탁을 배신한 여포로 인해 낙양의 성문이 열렸고, 동탁은 황건 군이 쫓아올 수 없는 험악한 지형의 서촉으로 패퇴하여 달아났다. 낙양에 입성한 사마의는 황궁에 입성하며 새로 '진'나라를 세워 새로운 질서를 공표했다. 이에 백성들은 태평천자와 진나라를 연호하며 새로운 제국의 등장을 반겼다. 실질적인 중원의 주인이 후한에서 진나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균형의 시대


193년, 강동에서는 손견 세력이 자리를 잡았고, 서촉에서는 동탁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종친인 유언의 비호 아래 유비가 작은 거점을 마련했다. 또한, 조조는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하여 유표로부터 형주를 빼앗아 다시 한번 세를 형성했다. 하지만 중원을 장악한 사마의의 진나라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이었다.

진나라가 내부의 기틀을 다지며 큰 전쟁 없이 세월이 흐른 200년 초반, 10대 후반의 한 젊은이가 낙양으로 향했다. 그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본 사마의는 10대 후반의 젊은이, 제갈량을 발탁하였고, 제갈량 또한 사마의의 통치 철학과 군사 작전에 매료되었다. 사마의의 신임하에 내정에 힘을 쏟던 제갈량은 마음 한편에 자리 잡던 의구심으로 “주군의 천하는 여전히 백성을 위한 것입니까?”라며 사마의에게 질문을 건넸지만 이에 사마의는 말없이 미소로 대신했다.


황건의 몰락, 새로운 시대


시간이 흐른 206년, 60대 중반이 된 사마의가 병석에 누웠다. 진나라는 사마의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유지되었기에 이러한 그의 건강 문제는 제국에 암운을 드리웠다. 결국 사마의가 죽음을 맞이하자 진나라는 사마사와 사마소 두 아들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갈라지며 양분되었고, 이 시기에 제갈량은 “그의 천하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라며 서촉의 유비에게 향했다.

인고의 시간 속에서 세력을 키운 조조는 드디어 기회를 맞이했고, 이를 놓치지 않고 낙양으로 진격하여 '위'나라를 세우며 중원에서 세력을 회복했다. 진나라는 비록 조조에 의해 북쪽으로 밀려났지만 사마사를 2대 황제로 추대하며 이분되었던 세를 합쳐 재기의 시기를 기다렸다. 한편, 유비는 서촉에서 촉한을 일으켰고, 손견의 아들 손권은 강동에서 오나라를 세웠다.

이렇게 중원은 위나라의 북진으로 본격적인 사국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으며 사마의가 이루지 못한 천하통일의 꿈은 조조, 유비, 손권, 사마사 4명에게로 그 기회가 넘어가게 되었다.



마치며


사마의의 야망은 황건적의 난을 민중 봉기가 아닌, 냉혹한 권력 찬탈의 서막으로 뒤바꿔 놓았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던 삼국지의 영웅들은 새로운 지배자 앞에서 전혀 다른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천하는 더욱 예측 불가능하고 암울한 시대로 흘러갔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의 ‘만약’이라는 가정이 때로는 이처럼 섬뜩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한 개인의 강렬한 욕망이 역사의 흐름을 얼마나 뒤틀리게 할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만약, 사마의가 아닌 유비와 같은 다른 인물이 황건적의 난을 이끌었다면?

만약, 반대로 황건적의 난이 무능한 하진이 스스로 해결할 정도로 그 세가 약했다면?

위의 대체역사에서 황건 군의 권력의 정점에는 어떤 인물이 군림했을까?


글을 적어보며 다시 한번 상상해 본 삼국지의 모습들입니다.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은 어떤 상상을 해보셨는지, 혹은 제가 전개해 본 대체역사와 관련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댓글로 나눠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앞으로 ‘브런치 삼국’에서 다뤄주었으면 하는 흥미로운 주제가 있다면 언제든 댓글로 알려주세요. 여러분의 상상력과 함께 만들어가는 ‘브런치 삼국’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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