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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Apr 28. 2018

신개념 물욕이 출현했다

소비를 덜 하는 게 오히려 취향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게 한다

전 직장 연봉이 지금의 3배였다. 전 직장을 그만두고 첫 1년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많았다. 5년간 펑펑 써 버릇 하던 게 영 고쳐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며칠 전에 가계부를 써보니 무려 '저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허리띠를 졸라맨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하고 싶은 것들은 하고 있다. 예전에도 하고 싶은 걸 다 했던 건 아니니, 딱 그 정도의 아쉬움으로 소비를 하고 있다. 내 최소 임금 수준이 줄어든 것이다. 

줄어든 부분의 예를 들자면 이렇다. 
이제 더 이상 피부과를 다니지 않는다. 대신 화장을 정성들여 지우고, 계란흰자팩을 주기적으로 한다. 계란 흰자를 풀고 거품기로 휘젓다보면 약간 팔이 아려오는데 그 때 와인 한 숟갈, 밀가루 한 숟갈 넣으면 완성이다. 사실 내 피부는 all about 각질과 피지 관리다. 홈케어를 하다보니 더 잘 알겠다. 예전에는 귀찮아서, 어쨌든 피부과가 더 좋겠지 하면서 지갑 여는 큰 손이었지만, 솔직히 큰 차이 없다. 

이제 옷을 거의 사지 않는다. 오히려 올해 거의 장롱 3개 정도의 옷을 버렸다. 여전히 장롱 2개는 정도는 너끈히 더 버려도 된다. 덕분에 내가 무슨 옷을 가지고 있는지 머릿 속에 그려진다. 어떤 옷이 빈 칸으로 남아있는지 알겠고, 그 빈 칸을 메울만한 괜찮은 옷이 보이면 사기도 한다. 최근에는 과거의 누적된 선택, 나 자신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와 상관 없이 옷을 입어 보고 싶어 옷도 대여해 입는다. 프렌치 히피, 러블리 등 결코 입지 않았을 옷들을 부담 덜고 입어보며 일상이 조금 더 재밌어졌다. 


약 3개월 동안의 나. 옷만 바뀌었는데 사람이 바뀐 것 같다.


여전히 줄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맛도 없는데 끼니 때가 되어서 사먹는 바깥 음식들 ㅡ 조금만 부지런하면 훨씬 더 맛있고 건강한 식사를 싸갈 수 있다. 누가 빨리 떠먹여줬으면 해서 신청한 비싼 강연과 모임 ㅡ 지금껏 사둔 책만 꼼꼼하게 정독해도 훨씬 깊이 이해할 수도 있다. 품이 드는 일이다. 돈 대신 품을 지불한다. 난 여전히 시간이라는 자원이 가장 비싸다고 생각하지만, 단순히 시간만 축낸 품과는 다르다. 꾹꾹 품을 들이면서 값진 것을 체화하는 과정이다.

그저 벌이가 줄어서 소비도 줄이며 합리화를 하는 것인지, 예전에 과잉 소비를 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요새 내 소비에 대한 관점에 변곡점이 온 것을 느끼고, 다행히도 생활이며 사람이며 내 주변도 바뀌고 있다. 가끔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만날 때 괜히 조금 주눅들거나 부러울 때도 있지만,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아직은 내 변화를 내 스스로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단하지 못할 뿐. 

사실 그동안 취향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늘 깔대기처럼 수렴하는 지점이 있었다. 

"소비하지 않고 취향을 향유할 수 있는가?" 

인정할 건 인정하고, (잠깐 한숨 쉬고) 그럼 돈 덜 들이고 어떻게 향유할 수 있을 지 생각해보자는 논의로 대체로 이어졌다. 윈도우 쇼핑을 하며 취향을 길러보자거나, 철 지난 것들에서 취향을 찾아보자는 기발한 방법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어쩐지 소비라는 대전제를 깔고 가는 기분이라 찝찝했다. 사실 엄청 사고 싶은데 참는 것처럼 느껴져서, 꼭 그렇지는 않은데 해결책을 이렇게로만 얘기하니 어쩐지 지는 느낌이었다.


<물욕없는 세계>를 읽으며 지금 내 상태를 다시 정의해보자면, 물건 이상의 것을 소비하고자 하는 상태로 이 역시도 '물욕 없음'의 범주에 포함된다. 아니, 새로운 개념의 물욕이다.


소비를 줄였다기보다, 의식적으로 소비를 하고 있다. 절대적으로 소비를 덜 하지만, 소비의 질은 더 좋아졌다. 소비 하나하나에 분명한 이유를 달기 때문이다. 돈 벌기는 참 힘든데, 돈 쓰는 건 참 쉬워서 그동안 돈에게 참 간단히도 맡겨버렸다. 돈을 덜 벌다보니 어물쩡 돈에게서 주도권을 되찾아오기는 했는데, 결과적으로 잘한 것 같다. 


소비를 덜 하는 게 오히려 취향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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