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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Jul 27. 2019

논현동 살아요

화류계 원룸촌과 고급 빌라촌 사이

논현동 살아요,

하면 누군가는 논현동 어디쯤이냐고 묻는다.


가구거리요,

라고 하면 또 누군가는 이 편과 저 편 중 어디냐고 묻는다.


이 질문의 속내를 안다. 이걸 묻는 사람은 이 편과 저 편의 차이를 알고 묻는다. 화류계 원룸촌인 이 편과 고급 빌라촌인 저 편 중에서 어디에 속하는지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이 편이라고 답하면서 앞서 논현동과 가구거리에 산다고 말한 게 괜히 거짓말 같아 머쓱해진다.



이 질문은 늘 나를 괴롭혔다. '논현동은 왜 이렇게 넓어가지고는', '굳이 이렇게 차이 날 건 뭐람'하며 중의적인 행정구역을 탓했지만, 사실은 내 탓이다. 내가 애초에 영동시장 쪽에 산다고 정확히 대답했으면 추가 질문이 없었을 것이다. 대답에 여지를 만들고 싶었던 건, 나다. 이 지역을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착각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저 편의 이미지가 내게 조금이라도 물들었으면 하는 심정. 논현동과 가구거리는 그런 안일함에서 고심해 고른 단어였다. 하지만 내가 쳐 둔 허술한 덫에 언제나 내가 걸려들었다. 기어코 마지막 질문까지 내려가는 사람에게는 물론이고, 상대방이 어물쩡 넘어가면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속이고 있다는 느낌에 찝찝하고, 언제 들통날 지 몰라 불안했다. 택시를 같이 탈 때면 굳이 횡단보도 앞에 세우곤 했다. 내가 어느 편으로 향하는지 모르도록. 택시가 시야를 벗어날 때쯤 제 방향을 잡으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논현동으로 이사 온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김예민이'었고, 강남 8학군 친구들에게 까닭 없이 주눅이 들어 있었다. 어느 날 집 근처에 학동 공원이란 게 있다길래 저 편으로 넘어갔다가 기함을 해버렸다. 살면서 그렇게 큰 집들을 본 적이 없었다. 눈물이 나려 했다. 나를 자꾸 주눅 들게 하던 실체가 이거였구나. 동시에 욕망이 끓었다. 반드시 저 집에 살리라. 물론 저 집이 얼마짜리인지 알아보지도 않았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돈이 최우선 순위 었던 적은 없으니 구체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은 순수한 추동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욕망에는 살이 붙었다. 그 뒤로 기회 될 때마다 저 편으로 다니며 내가 사는 이 편을 부끄러워했다.



자꾸 나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한 건 대학 때부터였다. 중고등학교 때야 서로 빤하니까 애초에 묻는 이도 거의 없지만 전국에서 모이는 대학은 다르다. 사는 곳을 묻는 건 무난한 아이스 브레이킹 거리였고, 막 서울 지리를 익히기 시작한 대학생들은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내가 모호한 대답을 할 때 친구들의 눈에 언뜻 동경이 스쳤다고 저 혼자 믿어버렸다. 위태로운 코스프레는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더 심해졌다. 첫 직장은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회사였고 실제로 잘 사는 이들이 많았다. 그 와중에 나를 유난히 들볶던 상사는 신분 상승을 꿈꾸는 자수성가형 인간이었고,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납작해진 신입은 코스프레로 기꺼이 그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주며 자존감을 지켰다. '강남 8학군 출신의 논현동 가구거리 거주자'라는 정보만으로 제 멋대로 판단한 상사의 편견 덕분이었다. 그때는 논현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가느다란 실이 연결되어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열병 같던 첫 직장을 나오고 알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 하던 자기부정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음을. 시작은 그냥 사는 곳을 묻고 답하는 것일 뿐이었는데. 수영할 때 숨 쉬겠다고 수면 위로 무리하게 올라오면 다음 동작에서 여지없이 물 속으로 처박힌다. 잠깐의 눈속임으로 얻은 자신감은 끌어내리는 힘이 강하다. 시험에 들게 만든 이 동네가 원망스러웠다. 내 것이 아니었으면 하던 이 편만큼이나 내 것이었으면 했던 저 편도 몸서리치게 싫어졌다. 그저 이 동네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비단 사는 곳 때문이었을까. 그 뒤로 두 번의 직장을 거치며 이제는 좀 더 나답게 살고 있다. 명품백을 내려놓고 차림새도 가벼워지고 주변 사람들도 '사는 곳이 아무렴 어때'하는 사람들로 많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내가 하는 일에 진솔해졌다. 일에 나를 끼워 맞추려다 내게 생채기를 내기보다 일을 내게 맞추려 한다. 최선을 다하되 부풀리지 않는다. 오래도록 즐겁게 일하고 싶다.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이제 집에 데려주겠다는 사람들을 애써 말리지 않다. 언덕 높은 저 편보다 복작대지만 기동성 좋은 이 편이, 장사할 생각 없어 보이는 저 편의 게으른 매장들보다 24시간 불야성인 이 편이 더 좋다고 느끼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논현동에 살고 있지만 그 외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사는 곳은 문제가 아니었다. 행정구역 상으로 묶였단 이유만으로 십수 년 부여잡고 있던 저 편의 논현동이 드디어 내 마음속에서 조금씩 사라지려 한다. 여전히 영동시장이라는 말은 잘 안 나오지만.



그리고 내년 초에 드디어 이사를 간다. 논현동 저 편으로!

........라면 너무 극적인 해피엔딩이고, 사당으로. 도망치듯 떠나지 않고 정리를 마치고 가게 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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