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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14.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2부 -4-

박사님 혹시 MK울트라 프로젝트라고 아십니까?

*

 마르크 박사의 한국이름은 김기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연구와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마르크는 뇌 과학과 신경세포 연구의 권위자였다. 마르크의 아버지는 서울의 한 대학 교수로 임용된 후 한국에서 몇 년 간 거주했다. 마르크는 아버지의 임기가 끝나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했다.  마르크의 아버지는 스위스 태생으로 미국영주권이 있었다. 마르크의 어머니는 한국인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그가  한국인임을 강조했다. 어머니가 마르크의 아버지와 이혼을 선택하고 귀국길에 올랐기에 자연스레 그도 한국을 종종 방문했다. 교환학생으로 서울의 신촌에 있는 한 대학을 2년동안 다니기도 했다. 마르크는 혼혈이지만 동양인의 모습이 더 많아 한국인처럼 보였다. 한국에서는서구적으로 생겼다는 말을 들었지만 미국에서는 동양적 외모로 차별을 종종 당했다. 그의 두뇌는 천재적이었다. 대학에서 그는 수재로 통했다. 마르크는 뇌 과학을 연구했고  3차원 뇌 스캔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인간의 의사결정과 의식 통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다.


마르크는 연구를 하며 뇌기능과 관련된 약물개발에도 관심을 쏟았다. 그의 뇌의 기전에 대한 관심은 그의 아버지로 인해 생겨났다. 아버지의 성격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마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지를 자연스레 움직일 수 없었고 성격과 인격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도 다중인격의 조짐은 있었다. 하지만 사고 이후 그 빈도가 심해졌다. 평상시 그는 한없이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갑작스레 폭력성향을 드러내곤 했다. 아버지가 이혼 한 뒤 그의 새어머니 로잔도 결국 이러한 문제로 그들과 헤어졌고 결국 두 부자만 남았다. 아버지는 정신과 약물치료를 받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간병인은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마르크는 악화되는 아버지의 상태를 바라보기만 해야 했고 모아 놓은 재산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격이 전환되면 그는 쉴 새 없이 욕설과 폭력을 마르크에게 행사했다. 아버지는 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쳤다.  아버지의 자상하고 이상주의적 모습이 더 자주 돌아오기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르크는 절망스러운 상황에 놓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상주의자였다. 이런  성향은 어린 마르크에도 영향을 끼쳤다.


 마르크의 아버지는 자신을 이상적 공동체를 주장한 로버트 오언의 먼 친척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사회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못마땅해했다. 마르크는 필라델피아에 살 며 가난으로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마약에 중독돼 폐인이 된 사람들을 켄싱턴에서 자주 보았다. 마르크가  이상적 공동체 사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정치제제로서의 민주주의는 바람직하다고 여겼지만 개인의 삶의 불평등에 대한 대안적 사회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탐욕과 약탈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보다는 최소한의 기본적 경제적 자유가 보장된 이상적 사회. 아버지가 강조했던 사회주의적 공동체에 그도 관심을 기울였다. 마르크가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을 때  아버지의 증상은 더욱 악화되었다. 아버지의 성격이 돌변할 때 그는 수없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갑작스레 눈물을 흘리며 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마르크는 아버지를 도울 수 있는 분야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되지 못했다.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아버지가 약물에 손을 대기 시작한 이후  증세는 더욱 악화됐다. 몸의 운동능력이 퇴화하기 시작하며 벌어진 일이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마르크는 뇌 과학 및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이후 뇌기능과 기전에 대해  집중력을 가지고 관련 분야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몰입의 정도가 깊어지고 분야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였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입증하기 위한 동물과 생체연구에 대한 관심도 커지기 시작했다. 박사 과정을 마치고 네이처에 <의식 스캔과 의사전달 및 의지의 통제>와 관련된 논문이 실리자 미디어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지만 성공의 가능성이 보이자 획기적 연구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약물치료감호와 재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마르크의 아버지는 결국 스스로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발작을 일으키고는 했다. 병원에서도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치료 방법은 없었다. 그는 급속하게 쇠퇴해 갔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마르크에게 자신을 실험체로 써 달라고 했다.


 완강하게 버티던 마르크는 자신의 연구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하고 아버지를 대상으로 의식 통제 기전과 의식을 스캔할 수 있는 실험을 진행하기로 했다.  마르크는 아버지의 뇌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동물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실험이었다. 마르크는 아버지의 귀 밑에 칩을 심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식을 링크로 연결했다. 연구실에 가득한 서버는 열기를 내뿜고 있었고 아버지는 침대에 누운 조용히 숨을 내 쉬었다.  그의 의식은 이제 곧 육체를 떠나 있을 것이다. 의식을 연결한 네트에 접속해 마르크는 말을 걸었다. 잠시 후 그의 의식은 디지털 형태로 변환돼 표시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맞냐는 마르크의 질문에 그는 신호를 보냈다.  간단한 질문에 대해서 아버지는 단답형의 답변을 이어나갔다.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드디어 성공한 것이었다. 둘은 흐느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뮬레이터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아드레날린이 이상수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상범위를 벗어나 위험수치를 드러냈다. 아버지는 다시 발작을 일으키고 뇌와 연결된 시뮬레이터 그리고 서버에서는 반복적인 경고음이 들렸다. 심전도는 불규칙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또 다른 인격이 나타났다. 그는 소통을 거부했다. 마르크는 동물실험을 통해 유사한 상황에서 스캔을 통한 의식 시뮬레이션 경고가 지속되면 치명적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간의 문제였다. 부작용을 줄이는 방법을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뇌와 시뮬레이터의 연결을 즉시 차단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동물실험결과 그 과정에서 의식은 영영 돌아오지 않고 자아가 상실될 수도 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는 의식을 서버와 분리시켰다. 다행히 아버지는 다시 의식을 회복했다. 하지만 의식을 회복한 아버지는 다른 인격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르크에게 끊임없이 욕설을 늘어놓았고 횡설수설하며 주변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졌다. 다른 의식의 발현 빈도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운동능력이 갑작스레 회복되고 강화되기 시작했다. 손과 상체 일부분만을 간단히 움직일 수 있었던 아버지의 근력수치도 증가되고 있었다. 인디안썸머 같은 잠깐의 성공이었다.


마르크는 몇 달 동안 반복해서 실험을 진행했지만 성공은 한번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몸 상태는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힘이 붙어가던 근육도 부작용으로 녹아 내리고 있었다. 이번 실험이 아마 마지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방법은 펜타닐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마르크는 뇌 속의 에피네프린과 아세틸콜린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후 소량의 펜타닐을 주입한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동물실험을 통해 몇 번 효과를 냈기 때문이었다. 가능성이 입증되었지만 마르크는 아직 완전한 성분의 조합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수없이 실험을 반복했지만 한 번을 제외하고는  뇌의 기능은 여지없이 죽어버렸다. 그가 동물 보호론자 들로부터 수없이 비난을 당한 이유이기도 했다. 마르크는 아버지에게 유인원 동물실험을 통해 성공한 약물 주입을 시작했다. 동시에 뇌를 스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아버지와 대화를 시도했다. 실험은 성공했고 효과를 보였다. 운동능력의 발현과 의식 제어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마르크는 아버지를 붙잡고 울기 시작했다.


 마르크, 대단하구나. 나의 의식을 연결해 확인할 수 있다니. 이 방법은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획기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나로 인해 고생이 많았을 테니. 마르크는 흥분했다. 드디어 60초라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마르크와 아버지는 가상공간에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르크는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의 눈은 약간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을 상상하지도 못했어요. 60초의 시간을 넘었고 가상공간에서 의식을 스캔해 소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는. 더 이상 폭력성향을 보이지 않도록 다른 의식을 통제해 볼게요. 깨어나서 머리가 아플 수도 있을 거예요.

나는 그냥 흰 공간 속에 있는 느낌이야. 저기에 내 모습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보이는 것 같다. 상체를 움직이면서 마르크의 아버지는 가상공간에서 마르크와 대화를 나눴다. 그의 운동능력도 향상된 것이 수치로 드러나고 있었다.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마지막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 내 인격이 변하게 된 계기가 있어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사실 난 그전부터 약에 중독돼 있었다. 통증을 없애기 위해 먹었던 약에 점점 중독돼 갔지. 스스로 조절하지 못했어. 그때부터 내 다른 인격과 의식이 빈번하게 발현된 것 같구나. 너와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  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기 또 다른 내가 나를 집어삼키면 이제 거부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지 않아. 네가 잘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꾸준히 해 나간다면 넌 성과를 낼 수 있을 거야.

 이제 본격적으로 연구를 해 나갈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마르크는 아버지의 의식과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타이핑을 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는 순간 격렬하게 상체를 뒤 흔들었다. 잠시 후 심전도의 움직임이 멈췄다. 주변의 모든것이 침묵했다.


 마르크는 누워있는 아버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게 변한 아버지의 눈은 원래의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화면에는 커서만 깜빡일 뿐이었다. 마르크는 계속 아버지를 불렀다. 서버와 의식의 연결을 끊고 이번에는 그의 몸을 움직여 의식이 돌아오도록 했다. 하지만 반응은 없었다. 한 번의 실험을 끝으로 더 이상 연구는 진행될 수 없었다. 그는 마르크에게 마지막 희망을 제시하고 떠났다. 마르크는 아버지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  장례식은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공원묘지에 시신을 묻었다. 몇몇의 지인들이 마르크를 위로했다. 시신을 안장하는 날 비가 내렸다.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그는 마르크의 연구를 진척시킬 수 있도록 마지막 단계를 열어 주었다. 장례를 치르고 몇 달 동안 마르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이뤄졌던 화면을 끊임없이 돌려볼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뜻밖의 계기가 찾아왔다. 마르크가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연구실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낼 때 한 노부부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5년간 침대에 누워있는 아들과 소통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지인으로부터  마르크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는 처음에는 거절했다. 하지만 노부부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라며 그를 설득했다.  부작용이 있다고 설득해도 그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들을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가 생겨도 마르크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했다. 고민 끝에 마르크는 승낙했다. 아이는 의학적으로는 임사상태에 가까웠다. 뇌사는 아니었지만 손가락 끝을 간단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눈은 초점이 풀려 있었으며 입으로 끊임없이 침이 흘러나왔다. 생명유지를 위해서 튜브로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었다. 마르크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환자를 대상으로 두 번째 실험을 재개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같은 방식으로 칩을 연결하고 뇌를 스캔한 뒤 환자의 의식을 가상공간에 불러들였다. 가족과 관계자 모두가 숨죽여 성공하기를 고대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수차례에 걸쳐 실험을 진행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고 마르크는 부모를 설득해 혈관에 약물을 주입했다. 그 성분이 펜타닐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몇 번에 걸친 반복실험으로 모두가 지쳐갈 무렵에 작은 반응이 일어났다. 마르크는 아이의 얼굴에  신경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아이가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눈은  붉게 변하고 있었다. 아이의 말이 모니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한 문장은 아니었다. 웅얼거리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부모들은 아이의 변화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크는 약물의 투여 횟수를 늘렸다. 그의 의식을 더 분명하게 깨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게 결정적인 실수였다.  펜타닐계열 약품의 농도를 지나치게 높인 것이 화근이 되었다. 단 한번 아이는 정상적인 의식과 사고반응을 보였다. 이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버지처럼 숨을 거뒀다. 애초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실험을 시작했지만 상황은 뒤바뀌었다. 부모는 과도한 약물사용과 인체실험의 책임을 물어 사건을 공론했다. 결국 마르크는 모든 연구업적을 부정당하고 학계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다. 마르크는 매일 집에서 술을 마셨고 폐인처럼 되어버렸다. 그는 욕조에서 손목을 그어 세상을 떠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스스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때 누군가가 마르크의 집을 방문했다. 어질러진 술병과 각종 쓰레기들이 내뿜는 악취로 집안은 흡사 쓰레기 하차장과 비슷했다.

   

마르크 아니 김기현 박사님 되십니까? 갑작스러운 한국어에 마르크는 귀찮은 듯 그렇다고 답했다. 한동안 잊어버렸던 한국어의 음절구조가 목에서 나오자  이질적인 것이 목에 걸린 듯 한 기분이 들었다.

박사님의 명성은 잘 알고 있습니다. 감색 슈트를 입은 남자는 명함과 함께 자신을 국가 안보실 해외파트의 직원이라고 했다. 그는 마르크에게 특별한 제안을 했다. 현재 마르크가 처한 상황을 알고 있으며. 하고 싶은 연구를 전폭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직원은 마르크가 연구하는 분야를 성공시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마르크는 술이 덜 깨 비몽사몽하며 귀찮은 듯이 팔로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사내는 포기하기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 제 명함을 놓고 가겠습니다. 박사님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곧 한국에서 뵙기를 희망합니다. 무심한 듯 직원은 그 말을 남기고 문을 열고 사라졌다. 마르크는 곧바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일주일 후 마르크는 맨해튼 이스트 42번가의 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활기차게 거리를 걷고 있었고 오후가 되지 햇살이 건물틈새를 비집고 그의 얼굴을 따갑게 비추고 있었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센트럴 파크가 보였다. 계절은 이미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는지 공원 근처는 갈색과 누런빛으로 물들었다. 뉴욕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마르크는 시간의 흐름을 놓치고 있었다. 회전문을 돌아 들어가 건물입구로 들어서 마르크는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집에서 만난 사람이 그에게 인사를 했다.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 12층에 내렸다. 문 앞에는 아무런 표시나 간판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원형의 테이블에 나무로 만든 접시에 과일 몇 개와 티슈가 놓여 있었다. 쟈스민과 탠저린을 섞어 놓은 듯 한 향기가 났다. 벽에는 한 줄로 늘어선 의자들이 빼곡하게 놓여 마치 사열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사무실 내부의 공간으로 마르크는 안내되었다. 일인용 소파에 머리숱이 많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브리지를 한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전형적인 관료 느낌이었다. 그는 마르크를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기를 권했다.

  

찾아오시느라 힘들지는 않으셨는지요. 그는 풍채가 좋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진한 구릿빛 인상으로 인중이 길고 눈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멀리서 봐도 인상에 남을 정도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사람이었다. 얼굴에서는 뭔지 모를 완고함도 풍기고 있었다. 마르크는 안보실 뉴욕 지부의 책임자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차를 마시며 그가 말을 꺼냈다.

마르크 박사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저희는 박사님의 연구 성과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크는 멍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자포자기의 심정이 아직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왜 한국의 정보기관 사무실에 온 것인지. 마땅한 이유를 찾아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말을 꺼냈다.

관심 감사합니다. 학교도 그만두고 진행하던 연구는 아직 완성이 되지 못했고 얼마 전 시끄러운 사건에 휘말렸습니다. 저를 보자고 한 이유가?

박사님의 어머니께서 한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으며 한국의 대학에서 몇 년간 교환학생을 하셨더군요. 뇌 과학 분야에서 성과를 낸 부분도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마르크는 관심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말씀하신 부분은 지금 저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없을 것 같군요. 마르크의 말이 끝나자 지부장은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총통께서는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저희들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마르크 아니 김 박사님께서 도움을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사님께서 연구를 지속하고 싶은 것도 압니다. 알다시피 상황은 지금처럼 바뀌었지만요. 연구에서는 지속적인 도움과 운도 중요한데 어쩌면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저희와 한번 같이 일해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저희가 전폭적으로 지원을 할 생각입니다. 마르크는 잠시 침묵했다.

박사님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저희에게도 박사님에게도 큰 기회가 될 겁니다. 이번기회를 잘 활용하셔야 합니다.

그냥 연구지원을 해 주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마르크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는 것은 잘 알고 있고 저는 지금 상당히 지쳐 있는 상태입니다. 지부장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박사님,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갑자기 북한이라니요? 노스코리아?

조만간 총통께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큰 발표를 하실 겁니다. 남북 합작으로 개성지역에 2차로 더 큰 공단을 설립하게 됩니다. 새천년이 지나고 남북정상의 결단으로 개성에 공단이 설립된 것은 알고 계실 테고요. 그곳에 연구공단이 만들어지고 박사님께서 그쪽에서 원하는 연구를 할 있게 됩니다. 아직까지는 극비리에 진행되는 사안입니다. 저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박사님이 연구 성과를 내면 그 기술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어떻습니까. 임상연구가 필요 할 텐데 공단 연구소라면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수월하게 실험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그게 중요하죠. 미국에서는 하기 힘든 연구입니다. 아무튼 구체적인 내용은 실무자들과 논의하시면 되고 생각할 시간을 드릴 테니 꼭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마르크는 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안쪽으로 내려와 센트럴 파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갈색으로 변해버린 낙엽이 그의 발밑을 뒤덮었고 낙엽이 내뿜는 향기가 그를 감쌌다. 잠시 후 몇 무리의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그를 지나쳐 뛰어다녔다. 그 모습을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가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크는 잊고 있었던 한국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김교수의 딸 연희의 눈빛이 생각났다. LA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자신의 얘기를 눈물을 흘리며 듣고 있던 앳된 대학생. 그 기억은 마르크에게 각인됐다. 그녀와 나눴던 얘기와 눈에서 떨어지던 눈물을 마르크는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이라 그곳에 또 가게 되는 것인가?’하지만 어쩔 수 없다. 당분간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차라리 한국에서  연구를 할 수 있다면 그것도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북한이라.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고 남쪽은 그의  어머니의 나라지만 북은 아니다. 그 나라는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자석처럼 끌어들이는 것인가.  그 추동의 동기가 무엇인지 마르크는 궁금하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센트럴 파크의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 연희의 아버지사건이 떠올랐다. 연구소에서 불에타 숨진 채 발견된 김경섭 교수. 자신이 김교수와 교류가 있었고 함께 연구를 했다는 것을 이들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연구소에서 죽기 전에 남겼던 메일의 내용은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힘들다는 것이었다. 하소연할때가 없어서 쓴 말처럼 느껴졌다.  저들이 김 교수와도 일을 벌였고 그를 죽게 만든 것인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교수의 말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르크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의문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다. 미심쩍었지만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불길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몇 주 후 마르크는 한국행을 준비했다. 필요한 서류를 발급받았다. 주변인들에게 당분간 한국에 가 있겠다는 연락을 한 뒤 이삿짐을 정리했다. 이삿짐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었다. 그는 단출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여러 자료들은 모두 하드에 백업하고 클라우드에도 저장을 해 두었다. 각종 가구는 중고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정리하니 집 안은 휑해 보였다. 자신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과 용품 등은 따로 챙겨 놓았다. 출국 날짜 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인천공항으로 오는 도중 비행기 안에서 마르크는 한국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머니는 인사동 근처의 오래된 허름한 빌라에 살고 있었다. 매번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몇 년간 실천하지는 못했다. 전화로 안부만 물었을 뿐이었다.  안보실 요원이 준 서류를 보며 그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서 다시 점검해 보기 시작했다. 그의 학문적인 목표에 한층 다가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지금까지의 실험에서 드러난 한계점과 임상차원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잡고 싶었다. 연구소의 수장으로 모든 권한을 갖게 되며 윤리적 실험의 문제와 관련해 자유로워질 수 있는 환경 등의 조건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이런 자원들을 어디서 구한다는 것인가. 아무리 한국이 권위주의적 정권의 성격을 보인다고 해도 윤리문제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북한 평양? 개성? 제3지대? 의문은 일단 머릿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 그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와 마주쳤다.


마르크 박사님? 택시를 타려 밖으로 나온 순간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검은 양복을 입은 두 명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마르크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예, 마중 나왔습니다.

 동그란 선그라스를 낀 30대 중반쯤 보이는 남자가 무심한 듯 답했다. 마르크 박사를 태운 검은색 고급세단은 천천히 공항을 빠져나와 도심으로 이어진 길을 달리고 있었다. 도심외각에 다다르자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대학에 다니던 때에 비해 이곳은 훨씬 개발이 더딘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심에 다다르자 가건물과 낡은 쓰레기들이 눈에 들어왔다. 쓰레기가 바람에 날려 차량의 앞부분을 가리자 기사는 투덜거리며 와이퍼를 작동시켜 쓰레기를 치웠다. 곧이어 차는 강변북로를 지나 원효대교를 통해 시내로 들어섰다. 서울역 근처에 도착했을 때 마르크는 눈을 의심했다. 마르크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보다 도시는 퇴보한 것이 분명했다. 건물은 낡았고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은 듯 곳곳에 갈라져 해진 타일들이 넘쳐 났다. 도로 상태도 좋지 않았다. 군데군데 빗물로 인해 파인 아스팔트를 지날 때마다 덜컹거림을 느꼈다. 도심으로 들어오자 시내의 풍광이 눈에 들어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가. 마르크는 수 십 년 만에 방문한 한국에서 동남아시아의 국가를 떠올렸다. 생기 넘치던 사람들과 권력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재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던 사람들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미국의 마약중독자들이 있는 도심의 한 복판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의 낡은 건물들, 생기 없이 몸을 축 늘어트리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곳곳의 노숙자와 그들이 그린 것 같은 지저분한 그라피티는  할렘의 뒷골목을 연상시켰다. 차가 신호등에 멈춰 서자 노숙인 같은 사람들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물건을 강매했다. 운전자가 욕설을 하며 비켜나라는 손짓을 했지만 마약 중독자들처럼 이들은 몸을 흐느적거리며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몇몇은 바구니를 들고 껌과 과자 사탕 등을 밀어 넣고 물건을 사달라고 요청했다.

아, 씨발 좀 비키라고.

 운전자가 욕설을 하며 소리쳤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마르크는 묵묵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서울역 근처를 지나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연이어 신호등에 걸려 멈췄다. 차량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동안 마르크는 창가를 내다보았다. 광장의 왼편으로 줄지어 식사를 배급받는 사람들이 무리가 보였다. 수 십 명이 넘는 한 무리의 인원은 저마다 플라스틱 그릇을 들고 바닥에 앉아 음식을 허겁지겁 먹어대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텐트에서 패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노래를 하거나 예수를 부르짖으며 전도와 설교를 하는 인원도 몇 명 보였다. 일부는 술과 약물에 취한 듯 흐느적거리는 듯보였다.  보다 못한 마르크가 물었다.

저 사람들은 누굽니까? 왜 이런데 있는 거죠? 관리가 안 되나요?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 체념하듯 답했다.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제지를 해도 또 들어오는 겁니다. 경찰 인력으로 단속을 해도 그때뿐이고 재활시설이나 수용소에 보내도 그곳이 갑갑하다고 다시 나와서 차라리 길에서 사는 것이 낫다는 거죠.


 광장을 무턱대고 걷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약물에 중독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신촌의 대학을 다닐 때도 대한민국이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뭔가 급속하게 사회 시스템이 망가진 것이다. 이들은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상황만을 설명할 뿐이었다. 오래전 마르크는 한국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마약 성분의 중독성 진통제 계열의 약물 문제는 미국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취재하며 시작된 르포형태의 기사이기에 유심히 살펴봤던 기억이 났다. 기사는 명문대학의 학생들 중 일부가 약물에 중독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의 약물 중독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이유와 위험성을 담담하게 분석했다. 한국이 민간 의료보험의 시대로 바뀌면서 의료비가 급증하게 되고 이를 감당하지 못하기에 진통제 처방이 늘어날 것이며 약물과 관련해 미국의 길을 따라갈지 모른다는 우려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르크는 한국이 미국을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이 빗나간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는 시내를 통과해  남산 근처로 이동하고 있었다.


 소월길을 지나 한 남산 중턱에 자리 잡은 오래된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려 이들을 따라 4층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건물처럼 보였지만 내부는 리모델링이 되어 있었다. 호텔로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뭔지 모르게 돈을 많이 들인 것 같은데 세련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누군가가  한 사무실로 그를 안내했다. 마르크는 관공서에서 업무와 관련된 내용을 의논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달랐다. 뉴욕에서 보았던 사무실과 비슷한 넓은 공간 가운데 고급 가죽으로 된 탁자가 보였고 누군가가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의 뒤편에는 거대한 총통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곳이 과연 북한과 어떻게 다른가 그 생각을 하며 마르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한쪽은 세습된 독재. 다른 쪽은 쿠데타로 집권한 영구독재? 남북은 이란성쌍둥이와 같다. 그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의자에 앉았다. 한 사람이 들어와 가벼운 인사를 했다. 마르크 박사가 앞으로 할 일을 총괄하는 김전호라고만 했다.

  

이야, 기대하던 마르크 박사님을 다 뵙게 되는군요. 하하. 그는 날카로운 눈매를 숨기듯 동그란 안경을 끼고 있었다. 작은 체구에 약간 곱슬머리였고 170대 초반으로 평범한 몸매였다. 하지만 그가 입은 옷은 최고급 슈트로 보였다. 약간 각이 진 얼굴형과 펑퍼짐 한 콧날에 뭔가 부조화처럼 놓인 날카로운 눈이 도드라져 보였다. 동그란 안경은 이를 상쇄시켜 뭔가 조화가 만들어지는 듯했다.

박사님께는 제가 직접 설명을 해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 만나 뵙기로 했습니다.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으셨을 테고. 그는 말하면서 뭔가 조울증에 걸린 흥분된 상태처럼 보였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좀 경박하다는 인상까지 줄 것 같았다.

연구에 대한 대략적인 계약서는 뉴욕에서 살펴보았고 검토도 해 보았습니다. 마르크는 김전호 옆의 담당자를 보며 말했다.

네 기본 내용은 그것이고 부가 계약서가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직접 설명을 드리는 것이 나을듯해서 알려드리는 것입니다. 김전호의 표정과 말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상황부터 설명드려야겠군요. 총통께서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여러 노력들을 해 왔습니다. 시위가 격해지는 과정에서 총통께서는  특별 경호팀을 만들어야겠다는 판단이 있었죠. 국가 안보와 관련된필요도 있었습니다. 총통의 안전이 국가에 중요한 부분이되나까요. 경호부대가 우선이기는 하지만 대원들이 뛰어난 능력을 갖게 된다면 그 자원과 실험결과를 여러 분야로 확대해 볼 생각도 있었습니다. 저희는 그래서 선발대원을 소대단위로 모집했습니다. 지원자를 받았죠. 정예요원을 통해서.  총통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도 있다. 그에 따른 보상도 있음을 알렸고요. 물론 극비 사항 중에 하나였습니다. 위험에 대한 스스로의 책임을 인정한다는 서명도 받았죠. 마르크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김전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계속했다.


박사님 혹시 MK울트라 프로젝트라고 아십니까? 아제가 괜한 것을 물어봤네요. 박사님께서 모를 리가 없죠. 박사님은 그 실험과 프로젝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냉전시기 CIA가 한 불법적인 여러 최면과 세뇌에 대한 실험 아닙니까? 그 실험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세뇌라는 것이 사실 의식의 통제라는 부분인데 그 프로젝트는 엉터리였죠. 마르크는 김전호의 의도를 생각하며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박사님은 잘 알고 계시는군요. 저희도 사실 비밀리에 실험을 진행했지요. 아주 매력적인 프로젝트 아닙니까? 공식적으로 미국은 1970년대에 이를 폐지했다고 하지만 아직 그들의 실험은 교묘하고 세련되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를 일이죠. 사실 그 시절에 기술이라고 해봐야 별거 있었겠습니까? 마약 같은 약물 종류나 서브리미널효과(주:음양, 음악 메시 등을 통해 사람들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미쳐 행동과 사고 기억에 영향을 끼치려는 여러 효과)로 사람들에게 반복된 의미를 주입시키는 게 다였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이제는 기술도 충분히 무르익었죠. 

인간의 의지를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아주 매력적입니다. 인간의 자기 보호는 본능 같은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생명의 기본적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지조차 뛰어넘어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잖습니까? 우리도 실패했죠. 인정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CIA에서 진행했던 것에서 한 발자국 더 나갔다고 봅니다. 그 결정적인 뭐라할까. 음... 특이점? 그 부분에 도달하는 것이 어려웠는데. 그게 문제였죠. 하지만 박사님의 논문을 보면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거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 이었죠.  마르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김전호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는 두 손을 허공에 올리고 마치 나치의 경례를 떠올리도록 만드는 행동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말에 취한 듯 흡사 접신에 들린 것 같은 표정과 말투였다.


무슨 실험을 하셨다는 것이죠? 사람에 대한 실험을 진행하신 겁니까?

아 뭐, 그 얘기는 나중에 차차 들려드리기로 하고. 어떻습니까? 박사님도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잖습니까. 모든 연구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실험을 성공시켜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거죠. 아니 뭔가 최초로 무엇인가를 성공했다면 그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 아닙니까? 연구를 하는 부류들은 다 그런 편이죠. 아 실례했습니다. 박사님을 꼭 집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박사님이 진행하신 실험이 미국에서 달갑지 않은 반응을 만들었다는 것은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마르크는 허를 찔린 것 같았다. 물론 이런 부분을 계약서에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마르크는 알 수 있었다. 마르크가 진행하는 실험에 대한 지원을 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었다.

박사님은 이미 대충 짐작은 하고 계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부장이 뉴욕에서 설명을 해 드렸을 테고 동의하셨기에 여기에 오신 거라고 알고 있겠습니다. 필요한 부분은 저희가 충실하게 지원할 것입니다. 아. 실험에 필요한 인원도 이미 확보가 된 상태입니다. 김전호는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마르크가 보기에는 웃음이 아니라 스스로 확신이라는 최면에 빠진 사람에게서 보이는 자가당착 증세처럼 느껴졌다.

박사님, 아무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개성 공단은 확장에 들어갔고 조만간 전 세계적으로 다시 화제가 될 겁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공단의 성공은 필연적이야 합니다. 공단 중에 의료기기와 약품을 생산하는 업체 하나가 자리를 잡을 겁니다. 실험에 필요한 것들은 다 그곳으로 세팅이 되고요. 자세한 얘기는 실무자에게 들으시면 됩니다.


마르크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안 보실 뉴욕 지부에서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판을 깨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사실 마르크도 별다른 수는 없었다. 미국 내에서는 한동안 자신을 꺼릴 것이고 학교 역시 받아주는 곳이 없을 것이다. 연구윤리 위반을 학계에서도 심각하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가능한 선택지가 많지 않다. 잠시 고민하다가 마르크는 일단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그들은 이 말을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일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결정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저희는 박사님 실험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미래를 바꾸는 겁니다. 그 시작이 박사님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죠. 김전호는 상기된 얼굴로 마르크를 바라보았다.그의 표정에는 확신이 숨어 있었고 마르크의 얼굴 한 구석에서는 의심과 불안의 그늘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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