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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15. 2024

[장편소설] 붉은눈 2부 -5-

강석철은 발작의 빈도가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마르크 박사의 경고처럼.

13

 국수본은 출근하는 인원들로 북적였다. 삼각지역에서 내린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기념관을 지나 건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총통관저로 가는 길에는 경비가 더 늘어난 듯했다. 정엽은 사람들과 함께 국수본 건물로 들어섰다. 개성에서 돌아와 현실감을 찾기까지는 좀 시간이 걸렸다. 처음 이곳으로 출근할 때 용산 총통실에 국방부가 있었고 거대한 공원과 함께 미군이 주둔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정엽은 출근 후 회의를 끝내고 부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몸은 성하고? 다친곳 후유증은 없어? 부장은 정엽을 훑어보며 물었다.

아, 총 맞은 곳이 아직도 욱신거립니다. 이번이 두 번째라 아직도 좀 쑤시긴 하네요.

두 번이나 맞고도 살아나다니 너도 인생이 험하다. 부장은 지긋이 웃었다. 동그란 회의 테이블에 걸터앉아 부장은 서류를 받았다. 이건 좀 있다가 보면 되고. 말로 해. 그는 서류를 책상에 던져두었다. 정엽은 usb 메모리부터 꺼냈다.

이건 뭐냐?

아직 확인하지 못한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개성의 이병수 개인비리와 주요 인물에 대한 동향 관련된 내용이고 또 하나는 암호화되어 있습니다.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아직 파일을 풀지 못했습니다. 이 출처가 의심스럽긴 합니다. 분명히 제가 의식을 잃었을 때 누군가가 전달했을 겁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물건이라는 기대는 되는데. 일단 중국제라 의심이 좀 간다. 북한에서 사용하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해 디자인은 좀 조잡하네.   

부장님 지금 농담하실 때가 아닙니다.

야, 농담도 못하냐. 우선 이병수는 돈을 당연히 현금으로 받았을 테고. 그 금액이 맞는 거야? 몇 억대라. 개인상황 조사해 봤어?

네. 빚이 상당합니다. 이것저것 돈 들어갈 때가 많은 모양이에요. 아들이 치료가 필요한 듯싶습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이거 믿을 만한 정보야? 근데 지금 저쪽의 비위를 터는 게 상황 상 맞나 싶기도 해. 군이 끼어들면 이병수 관련 사건은 자기들이 처리하려고 할 테니. 우리한테 발을 빼라고 할 수도 있고. 공장은 살펴봤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게 맞아?

폭파된 연구소 건물을 확인해보기는 했는데 확실한 증거는 없었죠. 시간이 촉박해 제대로는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뭔가를 빼돌렸거나 비밀 창고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이번 월경으로 확인한 부분은 이병수 비위 건하고 뭔가 폭발의 흔적이 있는 의심스러운 건물정도네. 암호화된 파일은 확인을 해봐야 하고. 음.. 부장은 다른 말을 꺼내려다 말았다.

이제 시작인 겁니다. 부장님. 이 사건은 뭔가 배후가 있어 보여요. 단순 폭발사건이 아닌 듯합니다.  그 자에 대한 조사는 어떻습니까? 의식은 돌아왔나요?


의식이 돌아왔다가 없어졌다가 한다. 가끔 고통이 심한지 자해 비슷한 것을 해. 그의 혈액에서 마약 성분이 발견됐고. 다만 약에 취해서 집회에서 그렇게 움직인 것 같지는 않아. 약을 했다고 그런 움직임이나 근력이 나오는 것은 아니니까. 이놈은 당체 말이 없어. 계속 묵비권이고. 구치소에 있을 시간이 아직 며칠 남았어. 지금처럼 말없이 굴면 골치 아픈데 국정원도 달려들 수 있고. 일단 마약성분이 혈액에서 검출됐으니 시간을 끌 명분은 있지. 좀 있다가 준비한 내용 가지고 확대회의 할 테니까. 암호파일 얘기는 아직 하지 말고 있어. 내용이 완벽하게 파악될 때까지.

그런데 부장님, 부장님은 어떻게 국수본에 들어오셨어요?

뜬금없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김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서 눈을 크게 뜨고 정엽을 바라보았다. 왜 다른 애들 라인이 뭐라고 했나?

생각해 보니 부장님 뵌 지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죠. 국장 아니 본장이 될 때가 이미 지나지 않았나요? 수원 남문파 사건 이후에 저를 스카우트하신 것 아닙니까? 저는 부장님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어요. 부장은 슬쩍 웃음을 지었다. 내 뒷조사도 하려고? 별거 없을 텐데. 부장은 정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난 현역으로 남고 싶다. 언젠가 너한테 얘기해 줄 때가 있겠지.


 그 말을 남기고 부장은 알 듯 모를 듯 한 웃음을 띠며 파일을 훑어보고 있었다. 부장은 정엽의 말을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국수본은 사법 집행기관이기는 하지만 미국의 CIA처럼 정보 수집의 비중이 더 큰 조직이다. 특히 정엽이 속해 있는 2와는 1과와 좀 다른 분위기였다. 정엽이 경찰을 퇴직하고 국수본으로 이직하는데 부장의 역할이 있었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 사실 그의 이직은 부장의 스카우트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국수본이 새로 조직을 정비하며 수사 인원과 정보인원이 보강되었기에 경찰 출신들이 여럿 특채 됐다. 국수본은 국가 정보원을 비롯한 정보기관에 숨어있는 반정부 인사를 견제하기 위한 업무가 많았다. 사찰에 대한 정보가 새 나갈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정엽은 부장을 따라 2과에서 일을 했고 정보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보였다. 정엽은 한때 김상효 부장이 국장보다 더 많은 정보와 실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본장은 임시직이지만 김 부장은 실질적으로 국수본의 탄생과 같이 일을 시작했고 국장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던 부장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마치 정엽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이. 정엽이 나가려는 순간 부장이 말을 꺼냈다


야, 너 속으로 그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정치인 사찰하고 정치인 뒤 캐는 것은 재미없으니까. 하기도 싫고 너랑 잘 맞지도 않아. 안 그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손 더럽히는 나한테 맡기고 이런 일들은 1과 놈들이 도가 텄지. 안 그래? 정엽은 물끄러미 부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휴, 내가 뭐 하러 저놈을 데려와서 쯧쯧, 부장은 혼잣말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하고 있어 빨리 나가지 않고. 너 하고 싶은 대로 당분간 움직여봐. 단 실적은 내야 한다.

네.

 정엽은 부장의 말을 뒤로하고 부장실 문을 열고 나섰다. 사실 개성의 동향과 서해산업과 관련해 아직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정엽은 업무 전환 지시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었다. 부장이 자신의 걱정을 좀 덜어준다고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은 참 귀신같이 아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복도를 걸었다. 복도 끝에서 함영진 부장이 그를 힐끗 쳐다보는 듯했다. 정엽은 간단히 목례를 하고 그를 지나쳐 사무실로 향했다.


*

 강석철은 발작의 빈도가 점점 늘어나는 것을 느꼈다. 마르크 박사가 경고했듯 임계치를 넘어가게 되면 의식과 신경 및 근육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한다. 근육이 터지고 사고 능력과 기억을 잃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석철은 앞으로 얼마간 몸이 버텨줄 수 있을지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차를 몰고 개풍군 근처의 한 공장 근처 숙소로 향했다. 허름한 이층 붉은 벽돌의 건물은 군데군데 벽돌이 폐여 있었고 나사가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웅덩이 속 빗물이 채 마르지 않아 걸을 때마다 진흙이 묻어 나왔다.


어떻게 됐소?

김병철 사령관은 잘 만난 건가?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는 거요? 석철이 이 층침대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위층에서 동식이 내려와 물었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을 분명히 김병철 사령관이 해주는지. 동식은 강계에서 석철의 부하이기도 했고 같이 탈출해 이곳에 온 각별한 사이였다.

이번 주는 화요일 새벽에 먼저 출발할 거다. 다들 준비들 하고 있어. 필요한 것은 얘기해 놨으니 준비가 될 거야. 올해 연말까지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얼마 남지 않았어. 그때까지 우리 모두 몇 번 더 남쪽에 내려가야 하고. 남은 물건은 이제 거의 없어. 화요일 새벽에는 나 혼자 갔다가 온다. 김판수를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 할 게 있다. 그동안 쉬고 체력을 비축하고 마르크 박사의 말대로 몸을 관리하고 있어라. 사령관이 남조선과 뭔가 합의를 하고 결심을 한 모양이야. 앞으로 부쩍 바빠질 거라.

알겠시오. 동식이 결심이 선 듯 대답했다.

동명이가 돌아오지 못했지?

지난번 광장에서 마지막에 남조선 부대인지 사회 안정성 특공대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움직일 때 사격이 이뤄졌소. 그때 아마도 총에 맞은 듯하오. 잡혀있을게요.


 석철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건물밖으로 나왔다. 멀리 암흑에 자리를 잡고 있는 산을 바라보았다. 달빛에 희미한 굴곡의 형태만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 모습이 흡사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맹목적인 적개심과 분노 그리고 불안감이 느껴졌다. 목적을 달성하면 그 이후는 어떻게 할 것인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고향으로는 돌아갈 수 있을지 아직 확실한 것은 없다. 흘러가는 대로 갈 뿐이다. 먼 곳에서 소쩍새인지 뻐꾸기인지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숙소로 돌아와 방문을 열었다. 퀴퀴한 담요 냄새와 알코올 소독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얼마 전 남조선 수사관이라는 놈에게 사격을 하다가 마주 오던 평화유지군을 피해 몸을 숨기다 얻은 옆구리 쪽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자를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그때 또 다른 평화유지군을 차량과 마주치는 것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상처 투성이 몸은 이제 스스로 통제가 잘 되지 않은 듯싶었다. 언제까지 몸이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계를 넘는 운동신경과 반사 능력은 대가를 요구했다. 서서히 몸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고 향상성이 깨져 개체는 산화되는 것이다. 석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르크 박사의 충고는 몸의 한계를 과도하게 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실험에서 살아남은 인원들은 자신을 극한으로 여러 번 몰았다. 석철의 잦은 발작은 그러한 이유였다. 석철은 방에 들어와 알코올로 몸을 닦아 냈다. 땀에서 배출된 피에서 희미한 철분 냄새가 났다. 통증이 밀려왔지만 참아냈다. 통증을 버틸 수 없다면 박사가 처방해 준 마약성분의 진통제를 먹었다. 주기적으로 몸을 닦아 내지 않으면 터진 모세혈관에서 옷으로 피가 묻어 나올 것이다. 석철은 소주를 병으로 들이키며 입을 천으로 묶었다. 고통으로 온몸을 비틀 면서도 통증을 참아냈다. 그는 정신을 잃고 쓰려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일어나 보니 저녁때였다. 누군가 석철을 깨웠다.


대장, 남쪽에 내려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 하루가 지났소. 석철이 정신을 차리자 어느덧 오후가 되어 있었다. 곧 저녁노을이 질 것 같았다.

우리는 조용히 개성 시내에 다녀오겠소. 저녁도 좀 먹을 겸. 장마당 근처에 있을 텐데. 손 전화는 되오? 무슨 일 있으면 알려주시오. 조심하고.

알겠다. 석철이 대답했다.


 밤 12시쯤 석철은 배천군 해변가에 도착했다. 물살이 약한 시간은 새벽 2시부터 3시였고 그 사이에 바다를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곧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교동도의 해변까지 2.5km 남짓이다. 잠수복을 갈아 있고 작은 산소통을 챙겼다. 산소통은 20분간만 활용할 수 있다. 해안가에 상륙할 때는 잠수로 가야만 해안경비에 들키지 않는다. 석철은 실험 동에서 탈출 한 동식 그리고 다른 일행과 함께 여러 번 이곳을 건넜다. 교동도에 숨어들어 갈아입을 옷과 장비를 숨겼다. 그는 차가운 물속으로 들어가 숨을 고르고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1km가 넘어가기 시작하고 중간지역을 지날 때부터 급속하게 체력이 떨어진다. 아무리 헤엄을 해도 사방은 온통 어둠뿐이다. 하지만 그는 버텨왔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오늘은 유달리 힘이 빠진다. 연거푸 물을 먹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물건이 무거운 듯했다. 곧 순찰선이 돌 것이다.


그는 빨리 이곳의 조류를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따라 유달리 조류가 몸을 세게 밀어내고 있었다. 멀리 교동도 앞의 작은 섬이 보였다. ‘저기다 다 왔다’. 석철은 마지막 힘을 다하기 시작했다. 산소통을 연결하고 잠수를 시작했다. 방향은 정확하다. 수없이 다닌 길이다. 그 방향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20분. 시간은 무아지경 같다. 시간은 멈춰있는 것 같고 몸은 우주공간에 내던져진 듯 무중력 상태가 느껴진다. 산소통의 시간을 확인했다. 늦지 않게 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목적지가 보인다. 석철은 안도하기 시작했다. 육지에 상륙해 장비를 정리하고 땅속 엄폐 공간에 장비를 다시 숨겼다. 옷을 갈아입고 시내 쪽으로 나와서 버스 터미널로 걷기 시작했다.


그는 후드를 챙겨 입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김포의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이곳에 올 때마다 변화된 상황을 파악하고 외부인처럼 보이지 않도록 해야 했다. 눈에 띄지 않게 무채색의 못을 입었다. 말을 조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식과 나머지 인원은 내일 도착할 것이다. 김판수가 석철에게 말 한 장소는 인천의 한 고급호텔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샹들리에와 거대한 대리석과 조각 등이 눈을 사로잡았다. 입구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석철은 화려한 이질적 분위기에 아직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국인들로 보이는 한 무리 인원들의 성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고 고급 슈트를 입은 사람들은 바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커플들은 팔짱을 끼고 웃는 얼굴로 로비 소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을 마치 중국에서 온 연변의 동포로 취급하는 듯했다. 다행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석철의 어깨를 쳤다.  

  

이쪽으로. .....

석철은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힐끗 그를 보았다. 거대한 거친 손과 셔츠 위로 살짝 파란색의 문신이 드러나 있었다. 얼핏 185가 넘는 키게 몸무게도 100킬로는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짧은 머리로 굵은 두상이 드러나 보였고 광대와 얼굴의 살집이 두드러져 보였다. 그는 석철을 10층의 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문을 열자 파자마 차림의 김판수가 말을 꺼냈다.


어시오시오. 석철 동무. 아니 대장. 그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으시었소. 호텔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지. 배고픈데 뭐라도 들갔소? 그는 북한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김판수의 끈적하고 과장된 표정과 말투가 그는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 비즈니스도 다 먹고살자는 거 아니겠나? 아가야, 룸서비스 좀 시켜봐라. 석철 형님 시장하시다고 하니.

됐소. 석철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아따 성질머리 하고는 그쪽 동네 사람들은 좀 여유가 있어야지. 너무 딱딱해. 그러다 부러지는 법이요.

오늘 합의를 해야 할 것이 있소. 지금 물량이 다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좀 기다려야 해. 수익금 정산은 예정대로 진행하도록 하시오.

아, 폭발 사건이 있던 건 그쪽사정이지. 생산해 놓은 물건 있을 거 아냐. 그건 어디로 빼돌리고 나는 씨발 좆나 노력해서 물량 소화하는데 그마저도 약속한 것 날짜에 못 맞춰 주면 그만큼 수익도 줄어드는 것 당연하잖아. 나도 사업하려면 위에 올려야 할 게 많아. 석철 대장은 그거 이해해야 않나? 그쪽에서 못마땅해하는 것 알지만 상황이 그런 것을 어쩌겠어.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하지. 석철은 소파에 꼿꼿하게 앉아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김판수는 큰 소리로 웃었다.

곤란하다라. 이것 봐. 아직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인데. 내가 거기 물량을 푼 것만 해도 8년이 넘어. 수익도 거의 다 보냈고. 사실 당장 그쪽 물건 안 받는다면 어쩔 건데. 나도 해외 쪽으로 이미 손을 써뒀지. 공급 책이야 찾아보면 널려 있는 거고 그 막대한 물량을 어떻게 처리할 건데. 김판수는 슬쩍 웃었다. 사실 맞는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새로운 배급 책을 뚝딱 만들어 낼 수는 없는 일이다. 김판수는 공급물량이 줄어든 것을 기회로 협상에서 자신에게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석철은 앞으로 좋지 않은 상횡이 벌어질 것을 직감했다. 그때 벨 소리가 들렸다. 룸서비스가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김판수는 가운을 입은 채로 테이블에 펼쳐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 석철 대장도 좀 들지 그러오. 북에서는 못 먹는 거잖아. 비아냥대듯 김판수는 말을 이었다. 석철은 스테이크의 피를 보자 욕지기가 났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약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몸을 가볍게 떨며 스테이크를 썰어 우걱우걱 먹기 시작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돌아가시는 게 어떻소. 어제 좀 무리했더니 좀 자야겠어. 수익 배분은 내 말대로 해야 할 거요. 아 참. 약속한 것은 여기에 있소. 그는 테이블에 박스를 하나 올려놓았다. 뭐에 쓰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잘 하쇼. 그럼 가보고.

아가야. 석철 대장님 가신다고 한다. 잘 모셔다 드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몸집의 두세 명이 그를 문 밖으로 안내했다. 석철은 아무런 말없이 모자를 눌러쓰고 호텔방문을 나왔다. 목을 좌우로 돌리며 김판수는 강석철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뒤 다시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때 김판수의 전화가 울렸다. 그는 김수필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소파에 전화기를 던졌다. 김수필은 막 호텔로비에 도달한 참이었다. 개성에서 늦은 밤 출경해 바로 호텔로 김판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체크인 시간이 끝났는지 로비는 어느덧 한산해져 있었다. 강석철은 검은 모자를 쓰고 짙은 카키색 블레이저를 입고 있었다. 석철은 카운터를 지나가다 옆을 돌아보자 이상하게 낯이 익은 사람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그는 벗어진 머리와 거대한 몸집을 보고 김수필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석철은 그 모습을 보자 자제력을 잃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석철은 김수필을 볼 때마다 실험과정이 떠올랐다. 김수필을 없애려 했지만 김병철의 설득으로 그 시기를 미뤘을 뿐이다그는 새로운 거래처를 마련할 때까지 만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강석철도 당분간은 참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석철은 차를 몰아 아라뱃길을 따라갔다. 인천과 서울의 경계인 김포 외각 근처의 농가 주택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며 그는 내일 다시 물건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 있다며 김판수와 약속을 잡았다. 결국 그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사령관은 이미 김수필과  합의를 했을 것이다. 뒤는 김성호가 맡을 것이라고. 석철은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그곳은 그들의 숙소였다김포 외각의 농가주택으로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고 근처에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라 공사노동자로 위장하기도 편했다. 그는 남조선에 위장하며 살고 있는 정보원으로부터 코란도 웨건을 받아 타고 다녔다. 석철이 숙소에 도착하자 이미 대원들은 쉬고 있었다.


뒤처리는 잘하고 왔겠지.

네 대장 안심하쇼. 아무 일 없었소. 물건은 잘 숨겼고. 근데 지난번 시위에서 우리의 정체가 너무 드러난 거 아니오? 우리는 집회에 가지 말았어야 했어. 괜히 우리가 주목을 받는 것 아니오. 동명이가 잡힌 것도 우리가 그 집회에 참석해서잖소. 대장은 그게 도움이 된다고 봅네까? 괜히 우리의 존재만 발각된 게 아닌가 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우리는 최종 목표만 완성하면 된다. 거의 절반쯤 왔어. 난 그렇게만 된다고 하면 공화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아. 동식아, 우리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 이곳으로 왔지만 개성은 진정 우리가 원하는 공화국의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거다. 김병철 사령관은 우리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석철의 말에  대원은 모두들 자신들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김판수한테 받아온 물건이다. 러시아제 권총을 써야 할 거다. 그는 오래돼 보이는 마카로브 권총을 꺼냈다. 우리의 최종 목표를 명심해라.

예 대장. 그것 때문에 여기 있는 게 아니겠소. 강계에서 이곳으로 온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소.

강석철은 동식을 처다 보았다. 그의 눈은 그동안의 감정 때문인지.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석철은 그렇게 그와 함께 탈영해 이곳까지 왔다. 백두대간을 하루에 수 십 킬로 미터씩 걷고 굶주림을 버티며 함께 했다. 그는 이제 가족도 없다며 끝까지 석철을 따르겠다고 했다. 강계에 있어도 반동분자로 몰려 결국 노동교화소나 군 형무소에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 석철은 가족과 같았다.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석철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김판수는 고기를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그때 호텔 초인종과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 또 씨발 누구야? 아가야 가서 확인해 봐라.

김수필 사장님입니다.

오늘날인가. 내가 분명히 오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것들이 쌍으로 붙어오지. 문 열어드려라.

김수필은 방문을 지나 저벅저벅 응접실 공간으로 걸어 들어와 소파에 걸터앉았다. 절반정도 벗겨진 그의 머리가 샹들리에의 불빛에 반짝였다. 김수필은 손에 든 더플코트를 소파에 놓았다. 그는 명품으로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여,  김사장님 오셨습니까?

판수 너 요새 너무 하는 거 아냐?

사장님 애들 있는데 판수가 뭡니까? 우리 좀 더 예의와 격식을 갖춰야 하지 안캈시오. 큭큭 김판수는 비아냥대듯 고기를 씹어가며 김수필에게 말을 꺼냈다. 김수필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소파에 가방을 집어던졌다.

이 새끼가 간덩이가 부었나? 골목길에서 약 파는 놈을 거둬서 돈 벌고 여기까지 오게 해 줬더니 요새 너무 나대는 것 같아. 너 믿는 구석이 있냐?

아따, 이거 왜 그러쇼. 그게 언제 적이요 벌써? 수필형님도 그때는 나하고 차이도 없었지. 약 팔다가 걸려서 개성 간 거 아니요? 그는 히죽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는 형님도 수익금 빼돌린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내가 그 북한 놈들한테 얘기해 볼까? 어떻게 되는지. 눈깔이 붉어지는 그 놈들한테. 김수필은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었다.

그건 상납을 위해서 필요한 자금을 확보한 거지.

아 됐고, 그건 북한 놈들하고 만나서 얘기하쇼. 공장은 폭발해서 당분간 물량도 못 구하고 돈 나갈 때는 많고. 물건은 들어오지도 않고. 어떻게 할 생각이요.

일반 물품은 차질 없이 생산하고 있어. 아직 생산된 물량도 조금 남아있고.

아니 그건 약국에서 파는 거지. 우리는 약국에 파는 물건을 취급하는 게 아니잖소. 폭발은 왜 난 거요 대체. 수필은 묵묵부답이었다.

나 모르게 혹시 김병철이 하고 뭐 약속한 게 있나? 난 모르는 일이요. 난 필요한 자금 때문에 지금 동남아 쪽 하고 다시 접촉 중이요. 물량 확보 안 되면 조만간 그렇게 해서라도 진행할 테니 그렇게 아쇼. 북한 애들도 충분히 물량 안 가져오고 있소. 남은 부스러기만 있는 것 같던데. 혹시라도 해서 말해두겠는데. 나 잘못되면 형님도 골로가. 우리가 푼 물량하고 경찰한테 줄 댄 증거 하고 상납금 기록 다 남겨 놨고 여차해서 문제가 생기만 바로 다 공개해서 형님도 같이 뼈도 못 추리는 거지. 같이 죽는 거야. 내가 그냥 손 빨고 있었겠어.

예전에 강서 마약반 형사도 내가 처리했지. 그게 한 10년 넘었지? 그 새끼 치밀하더라고. 우리 구역에서 일부러 우리한테 엉겨 붙고. 그때 다크웹에서 상주하다시피 하며 물량을 구매하려 했지. 애들 시켜 각목으로 뒤통수 날리고 몸에 약 좀 찔러 넣었어. 우리가 제꼈지. 아 뭐 오해하지 마쇼. 형님한테 그렇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는 히죽 웃었다.

이새끼가 어디서 협박질이야.  김수필은 얼굴을 찡그렸다.

 얘기는 다 끝난 거요? 추가 물량 없으면 나는 동남아 쪽 하고 거래 터놨으니까. 그걸로 물량 확보해서 판매 들어갈 거고 형님은 공장을 새로 짓든지. 그때까지 버터보든지 해보쇼. 꼬붙여 놓은 것 있으면 더 풀고. 내가 거기까지는 해결해 주겠어. 다시 생산 시작되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몰라. 지금까지는 동남아산 품질이 별로라 신경 안 썼는데 물건이 없으면 그쪽으로 더 파볼 생각이요. 아 그때까지는 당연히 상납금은 없소. 물론 개성 쪽 애들도 마찬가지고.    

김병철 사령관이 가만히 있을까? 김수필이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아 그건 그쪽 사정이고. 낸들 어쩌겠소. 내가 없는 거 팔아서 댈 수는 없는 노릇 아뇨. 나도 없는 거 짜내서 보내는데 그거도 죽을 맛이요. 남는 것도 없어. 형님도 알 거 아니오. 다른 거래처를 찾아봐도 쉽지 않을 거요. 그 많은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여력도 없고 다른 데는 다 구멍가게 수준이니. 형님 나 피곤하우 빨리 가보쇼. 얘들아, 김수필 사장님 다녀가신다고 하니 모셔다 드려라. 김판수는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김수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동안 김판수를 쳐다보고 문을 열고 나갔다. 모욕감과 흥분으로 온몸의 혈압이 오르는 듯 한 느낌이었다. 손에 땀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호텔을 나서자 김수필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부사장 동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뭔가 일이 또 터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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