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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16.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2부 -6-

곧 시작되겠군.  김병철 사령관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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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 박사가 근무하게 될 서해산업 연구동은 마무리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개성 2차 공단 확장은 순조로웠다. 평양과 개성세력은  소규모 국지전을 이어나가고있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사상자가 발생해도 다들 이레적인 일로 인식하는 듯 했다. 공포도 면역력을 갖는다. 개성주민이나 평화유지군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르크 박사는 일주일 후 공단연구 시설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임시 숙소는 작은 임대 아파트였다. 마르크는 상관하지는 않았다. 집보다는 연구시설에 있는 시간이 더 많을 것 같았고 공단 숙소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짐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혼자 멍하니 누워있었다. 한국에 돌아오자 오래전 대학에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신촌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고 시위가 있던 날은 사람들은 마포로 서울역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시위가 반복됐지만 사람들은 활기를 잃지 않았다.

 변화에 대한 열망과 동료에 대한 신뢰감이 있었다. 하지만  동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권은 갈수록 공고해지고 사람들 사이의 빈 틈을 노렸다. 시위대의 물질적 욕망과 내적 분열은 이들을 서서히 집어 삼켰다. 그들은 하나둘씩 졸업을 해 나갔고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에 타협했다. 정권의 입장에서는 가장 원하는 형태의 시나리오였다. 마르크는 그 시절에 그곳에 있었다. 많은 것은 변했다. 상가도 거리도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차림 말투도 모든것이  과거의 유물이 돼 있었다. 친구들과는 연락이 닿지 않았고 모두들 각자의 치열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마르크는 어머니를 찾아가 한국에 오게 된 과정 및 공단에서 진행하게 될 연구와 실험 등에 대해서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는 마르크를 믿는다며 이번에도 뭔가 원하는 것을 이뤄낼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마르크는 며칠을 쉰 뒤 파주 도라산 역을 지나 월경을 해 개성공단내로 들어갔다. 공단에는 주말용 통근버스와 업체의 생산품과 원자재트럭이 쉴새없이 움직였다. 마르크는 서울 시청에서 관계자와 함께 버스에 올랐다. 그가필요로 하는 실험설비와 자재등은 이미 운반이 끝난 상태였다. 버스는 자유로를 지나 파주를 넘어 임진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파주를 지나자 황금빛으로 물든 갈대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월경을 위해 북한 보안구역으로 들어가자 간단한 신분증검사가 이뤄졌다. 북한군과 출입국 사무소의 직원은 마르크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는 걱정했지만 입국절차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버스는 드디어 북한 쪽 영역에 들어섰다. 도로의 포장상태가  달랐다. 공단까지는 10km 정도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 지역 깊숙이 들어갈수록 임진강이 작게 보였다. 북한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남한의 시골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멀리 보이는 산에 나무가 없어 황토색 흙이 도드라졌고 휑해 보였다.


 건물들은 주로 시멘트로 지어져 있었고 군데군데 낡아 보였다. 날씨만 제외하면 동남아시아 시골에 온 듯 한 느낌이었다. 공단근처 이정표가 눈에 들어왔다.  공단은 여타 북한지역과 좀 달라보였다. 붉은색 벽돌건물이 군대군데 보였고 건물이 올라가고 있는 지역을 지나자 잘 조성된 아스팔트를 느린 속도로 버스가 통과했다. 공단 중심부에는 10층 이상으로 보이는 화려한 유리 건물이 시야를 앞도 했다. 공단의 관리를 위한 운영 사무시설이었다. 버스는 건물 앞에 멈춰 도로변에 정차해 사람들을 내려주었다. 멀리서 지켜보면 큰 벌레들이 꾸역꾸역 나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르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버스에서 내려 건물 앞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가자 대형회의실이 나왔다. 운영위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처음 이곳에 온 공단 관계자들에게 주의사항과 개성공단과 개성시내의 현재 상태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마르크가 공단에 입주할 당시만 해도 북한 주민과의 접촉은 금지돼 있었다.


공단 밖을 벗어나 허가 없이 개성시내로 가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관리위원회 인원은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마르크는 공단 인원과 함께 서해산업으로 향했다. 새 건물의 깨끗한 외양이 마르크의 눈에 들어왔다. 조경공사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공단의 직원은 마르크를 내려준 뒤 차를 타고 운영위원회 사무실로 돌아갔다. 경비가 마르크를 보자 인사를 했다. 마르크 박사님이 오실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경비는  마르크를 안내했다. 밖에서 둘러보니 특별할 것이 없는 제약관련 공장이었다. 생산시설 근처로 들어가자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대표실로 향했다.  커다란 철제 미닫이 문으로 들어가자 기계설비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생산라인에는 흰 작업복과 모자를 쓴 인원들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마르크는 의약용품이라고 짐작했다.  1층을 한바퀴 돈 이후 2층으로 올라가자 붉은색 카펫이 눈에 들어왔다. 대표의 취향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붉은 카펫이라니. 시설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했고 청소도 잘 되어 있는 듯 했다.  김수필은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마르크를 보자마자 반가운 듯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마르크 박사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합니다. 김수필은 약간 벗겨진 머리에 배가 나와 있었다. 검정색 자켓을 걸쳤고 바지는 코듀로이로 된 소재였다. 눈빛은 서글서글해 보였다. 그는 광대뼈가 좀 튀어 나와 고집이 좀 센 인상이었고 머리는 탈모가 조금 진행되는 듯 했다. 마치 대기업 부장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호들갑스러운 김수필과 다르게 마르크는 간단한 인사를 했다. 김수필에게 고용된 것은 아니기에 그와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아직은 좀 혼란스러운 부분이 남아 있었다.

제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 직접적으로 대표님께 도움이 되나요? 마르크는 의아한 듯 물었다. 사실 그는 실험 연구를 완성시키는 것이지 그것이 의약품 생산과 딱히 관련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하,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제가 들은 얘기로는 박사님의 연구에 꼭 필요한 여러 재료들이 있는데 구하기 힘들고 여기서 생산하는 제품들이 일부 원료로 쓰일 것 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아...... 네 그렇긴 합니다.

다른 얘긴 차차 하기로 하고 박사님의 연구동은 여기서 좀 떨어져 있습니다. 잠시 후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마르크는 김수필의 과잉 친절이 좀 걸리긴 했지만 사업하는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둘은 커피를 한잔 마시며 일상적인 얘기를 이어나갔다. 김수필은 앞으로 개성이 크게 확 바뀔 수도 있으며 북한 내부 사정이 심상치 않다고 했다.   

그런 정보는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마르크는 의아한 듯 물었다.

여기서 일하려면 소식에 밝아야 합니다. 저희의 생산 물품은 이미 일부가 시장에 풀려있고 반응을 보고 있는데 나쁘지 않습니다. 앞으로 남한에서 제품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을 기대하고 있고요. 펜타닐 성분의 패치와 더불어 다양한 약품과 진통제도 생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수요가 더 늘 것이라는 전망이 있고요. 형식상으로 박사님은 여기 소속되어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국가 프로젝트로 일하신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일을 도와줄 연구진 몇 명이 추가로 배치될 겁니다.

여러 정보를 알고 계시는군요. 단순하게 사업체만을 운영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하, 제가 그렇게 구식으로 생겼습니까? 김수필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저도 여기저기 걸려 있는 게 많아서 뭐. 열심히 하는 거죠. 아무튼 필요한 것이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바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구실로 이동하실까요? 김수필은 마르크를 공단 연구시설로 안내했다. 공단은 두 블록쯤 지나 산과 붙어 있는 가장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굳이 연구동 공단을 가장 외부에 두신 이유가 있습니까? 마르크가 물었다.

음... 아무래도 연구시설에서 다루게 될 것들은 보안유지가 필요하고 외부인의 관심이나 각종 실험들이 있을 텐데 여러모로 좀 안전한곳에 설치하는 게 낫다 뭐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이쪽 공단 구석으로 연구시설이 만들어 진겁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실까요? 그를 따라 걷자 누런색 황톳길 한 가운데로 새로 깔아 놓은 검정색 아스팔트가 보색처럼 눈에 잘 들어왔다.

설비는 1차로 완성을 해서 현재 시험가동 중입니다. 나머지는 며칠 내로 들어올 예정입니다. 더 궁금하신 것은 없으신지. 숙소는 본동에 마련돼 있습니다. 내일부터 바쁜 일정이 시작 될 테니 오늘은 푹 쉬면 됩니다. 김수필은 그를 보며 히죽 웃었다.

예 알겠습니다.

박사님은 혼혈이라고 들었는데 크게 이국적이지는 않으신 것 같습니다. 말투도 한국어가 약간 어색한 정도?

아무래도 어머니 유전자가 컸나 봅니다. 말투는 아직 좀 어색하죠?

아닙니다. 박사님 연구를 저도 관심 있게 지켜보겠습니다. 관심이 많습니다. 꼭 원하는 목표 이루시기 바랍니다.


  둘은 생산본동으로 돌아왔다. 마르크는 숙도로 돌아와 몸을 던지듯 침대에 벌떡 누웠다. 기숙사 형태의 숙소였지만 그가 묵는 곳은 고급 집기를 사용해서 인지 호텔느낌이 났다. 마르크는 연구와 강의를 위해 일주일에 몇 번은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나가야 하기에 이정도면 쓸 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안보실 관계자와 만난 일 한국에 도착해서 여러 일정을 생각해 보았다. 과연 어떻게 연구를 지원해 준다는 것인지 그는 확신할 수 없었다. 잠깐 쉰 뒤에 오후에 설비를 보고 점검을 할 참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그는 스르륵 잠에 빠져들었다. 그 잠깐 사이의 낮잠에서 마르크는 악몽을 꾸었다. 검게 탄 형체의 사람들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숨이 막혀 켁켁거리며 깨어났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지만 갑작스런 환경 변화가 심적으로 긴장을 일으킨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히 세면을 한 뒤 공단과연구동을 둘러보러 밖으로 나왔다. 공단은 아직 공사가 한창이라간간히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고 요란한 기계음이 자주들렸다. 공사가 진행 중인 철골시설과 소규모의 크레인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고층건물을 올리기 전이었다. 지반을 다지는지 흙을 실은 덤프트럭이 곳곳을 오가고 있었다. 생산동을 둘러보자 컨베이어 벨트 앞에 앉은 북한 노동자들은 열심히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곧 퇴근 시간이 되면 수십 대의 통근 버스들이 줄지어 공단으로 들어올 것이다. 이들은 말 한마디 없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남쪽 사람들과의 접촉을 철저하게 차단하며 퇴근 시간이 되면 통근 버스로 개성거주지로 이동한다. 공단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본 뒤 마르크는 연구동쪽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주변시설을 둘러볼 생각이었다.


<관계자외 출입금지>라는 노란색 표지판을 넘어 철문을 밀고 마르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앞쪽을 돌아 여기저기를 돌아보다보니 오른쪽 건물 뒤편에 잠기지 않은 문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르크는 문을 밀어 열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멀리서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는 것 같았고 소독약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아무래도 동물실험을 일부 진행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지하는 축축하고 어두웠다. 싸늘한 한기가 그의 몸을 덮쳤다. 천장의 형광등은 군데군데 불이 커져있었다. 문득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연구동은 아직 공실이라 설비 등이 아직 정돈되지 않은 채 방치됐고 서류들이 한쪽구석에 널려 있었다. 공사장비와 철근 자재등도 눈에 띄었다. 어디선가 비명과 신음소리를 섞어 놓은 것 같은 소리가 들리는듯 했다.


 김수필의 말로는 지하에 실험시설이 있다고 했는데 동물들이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 바람소리 같기도 했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 마르크는 관계자가 오면 함께 시설을 둘러볼 생각을 하고 문밖으로 나왔다. 날은 어둡기 전이었다. 멀리 황량한 벌판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이 벌판의 색과 비슷해 지평선과 수평선이 맞다아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일단 돌아가서 짐을 정리하고 좀 쉬어야겠다고 마르크는 생각했다. 창밖의 커튼을 열자 저 멀리 민둥산이 보였다. 나무가 보이지 않아 미국 유타주 서부의 한 사막이 떠올랐다. 어릴 때 아버지와 캠핑을 하던 황량한 아리조나의 사막과 선인장이 멀리 촘촘하게 박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산을 쳐다보며 마르크는 커피를 끓여 마셨다. 들고 있는 컵만 아니라면 공간을 초월해 중부의 사막에 뚝 떨어졌거나 화성탐사를 하는 것은 아닐까. 초현실적공간의 탐험가가 된 기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화요일이었다. 개성평화유지군 부사령관 이병수는 주말에 집에 다녀온 뒤 부인과 싸움을 벌였다. 사소한 집안일 때문이었지만 감정의 대립이 결국 큰 싸움을 불렀다. 이병수는 그렇지 않아도 상관과의 견해차이로  폭발 직전이었다.  김병철과의 만남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더했다. 조만간 이곳에서 나갈 생각으로 보직변경을 신청했다. 이번 주는 야간 훈련이 잡혀 있어 그의 신경은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났다. 대위 하나가 병사관리를 잘못해 한명이 팔이 부러졌고 무기고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징계여부도 논의해야 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부대장인 그도 여러 사건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숙소로 돌아와 침대 밑바닥의 나무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수 억원의 현금뭉치가  들어 있었다. 월경을 할 때마다 조금씩 돈을 옮겼지만 아직도 금액은 많이 남아 있었다. 가끔 검문을 하기이 인해 조금씩 옮겨야 했다. 상자를 열고 금액을 확인했다.


 피가 뭍은 뭉칫 돈을 보고 욕설을 내뱉었다. 이번 주는 운이 없을 것 같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음 주에 김병철을 만나 마지막 거래를 하고 보직변경을 받아 내려갈 생각을 하니 그래도 한층 마음이 가벼웠다. 이제 여기까지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일의 야간 훈련만 마치면 더 이상 걱정거리는 없을 듯 했다. 관사의 침대에 누워 이병수는 개성에서의 시간을 떠올렸다. 곧 이곳과는 작별할 것이다. 여러모로 짜증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었다. 하지만 김병철과 김수필과의 관계를 끊어야 할 때였다. 이병수는 그 맺음을 어떻게 할지에 생각이 미쳤다. 김수필은 그렇다 치더라도 김병철은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다. 안보실에는 마지막까지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마르크 박사의 행방을 요구했지만  몇 달 아니 일 년이 넘도록 박사라고 하는 놈은 대체 어디에 틀어박혔는지 아무리 찾아도 행방을 알 수 없었다. 땅으로 꺼졌는지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몽타주를 붙이고 주둔군을 통해 탐문을 해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이 계약조건을 들먹여 귀찮게 할지 모른다. 이병수는 갑자기 개성의 모든 것이 넌덜머리가 났다.


김병철은 영향력은 무시할 정도가 아니다. 개성임시정부에 알게 모르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뿐 그가 실권자임이 분명하다. 그 늙은 여우의 입을 막을 수 있는 확실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지난번 만남이후 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일단은 물증을 확보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잠에 빠져 들었다. 사건만 없다면 군인의 일상은 평범했다. 당분간 평양세력과 교전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다. 아침에 올라온 무기수급 현황, 사건 동향 파악 등으로 하루일과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오늘은 야간 훈련이 있는 날이었고 멀리서 한 외국군대의 구보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일정은 치안상황 점검이었다. 관리구역인 개풍군 일대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는 보좌관과 차를 타고 마을로 향했다. 얼마 전 있었던 주민들 간의 다툼과 폭행 사건도 순조롭게 마무리되어 큰 문제는 없었다. 오후일정을 마치고 이병수는 부대로 귀환했다. 잠깐 관사에 들러 짐을 챙기고 야간 훈련 일정을 마무리 하면 오늘도 이번 주도 별 일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앞으로 무엇이 닥쳐올 것인지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이병수는 일정을 점검한 뒤 후방에서 훈련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때 이병수는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대령님 괜찮으십니까?  부관이 소리쳤다. 순식간에 응급상황이 발생했다는 무전이 들리고 있었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격이었다.

저격이다. 부사령관님 보호해.

 누군가가 소리쳤고 부대는 순식간에 전투 대열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병수가 쓰러진 이후 더 이상 하무런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다. 훈련은 종료되었고 이병수는 군 엠블런스로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이미 숨져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병수의 죽음은 전 부대와 부대원들을 잔뜩 긴장시켰다. 모든 부대에는 비상이 걸렸다. 윗선에 보고가 이뤄졌다. 가끔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탈영병들이 소규모 게릴라 형태로 평화유지군에 대한 공격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 사건은 차원이 달랐다. 부사령관의 죽음은 정치적으로도 큰 소용돌이와 후폭풍을 불러 올 것이 뻔했다. 예상대로 군은 즉각 성명을 발표했다. 비장한 표정의 대변인은 이번 사건에 큰 우려를 표한다고 했고 비상태세가 한층 강화될 것이며 반드시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묻겠다는 정치적 수사와 같은 말투를 쏟아 냈다. 김병철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남한의 긴급속보 방송을 무표정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스테이크가 놓여 있었다. 곧 시작되겠군.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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