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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ofs Oct 18. 2024

[장편소설] 붉은 눈 2부 -8-

내가 반정부 인사가 맞기는 하지. 총통이  얼마나 더 집권할 수 있을까?

*

 최연경은 기획기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녀는 결국 신문사에 입사했다. 화학과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전공과 전혀 다른 길을 생각했다. 학생운동과 시위에 적극적이었던 그녀는 권위주의 정부가 학생들과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학교생활은 시위의 연속이었다. 정당성이 없는 권력은 끊임없이 학생들을 회유했고 탄압했다. 그녀가 신문사를 직장으로 택한 이유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경찰출입기자였을 때부터 불같은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학창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끈질긴 취재로 경찰 간부와 건설업자의 유착관계와 비리사건을 파헤쳐 여려 명이 옷을 벗기도 했다.

 정권은 본보기를 보여주려는지  비리와 관련된 기사에는 관대한 편이였다. 하지만 권력에 도전적이고 비판적인 기사는 어김없이 검열로 삭제되었고 그녀와 데스크는 수없이 싸웠다.  최연경기자가 싸움닭이라고 불리는 이유였다. 입사 후 15년이 넘어  그녀는 사회분야의 차장기자가 되었다. 경영진에서 부장승진을 권유했지만 거부하고 차장으로 남아 현역으로 기사를 썼다.  보건정책 및 여러 사회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정부비판적인 논조의 기사를 만들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적도 우호세력도 늘어났다. 하지만 그녀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수 년이 지나자 그녀는 어느덧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유명인이 되었다.


 정권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그녀를 무기와 방패로 써먹었다. 기명 칼럼을 연재하며 그녀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갔다. 정권과 보수세력은 그녀의 사생활을 문제 삼아 부정적 여론을 퍼뜨리기도 했다. 바로 미혼모로 정엽이라는 아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시간이 흐르자 용기있는 선택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권력과 반대세력은 그녀를 눈엣가시로 여겼다. 최연경은 어느 날 메일을 하나 받았다. 개성의 끔찍한 상황에 대한 취재 요청이 반복해서 그녀의 메일함으로 도착했다. 메일을 보낸 이는 개성에 살고 있다고 했다. 최연경의 기사와 활동에 오래전부터 감명을 받았고 이곳의 문제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그녀도 얼마 전부터 개성공단의 비인간적인 대우와 무정부상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가 촬영해 공개한 개성공단과 개성의 상황은  지옥도와 같았다. 공단 조성 초기에는 북한정권의 관리에 운영되었지만 북한의 내부 쿠데타와 지역사령관의 반란은 그곳을 내전과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치안은 엉망이었다. 길거리에서 마약을 하고 있는 주민들과 외국인들 강간과 폭력을 담은 영상은 삽시간에 인터넷에 퍼졌다.


 북한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 여론몰이를 하려는 듯 자료는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언젠가 특별 취재반을 구성해 이 문제에 대한 여론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부장과의 갈등은 있었지만 칼럼을 이용했다개성지역의 실태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는 기사와 칼럼을 지속적으로 써 여론을 만든것이다.  자신을 개성공단에서 일했던 전직 20대 여성이라고 밝힌 이 제보자는 공단 근처에서 함바집과 같은 음식점을 하고 있다고했다. 최연경은 그녀를 만나러 가겠다는 칼럼을 쓴 뒤 당국에 취재를 요청했다. 번번이 거절당하다 조건부 승낙이 이뤄졌다. 당국은 개성지역의 실체가 정권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연경이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낸 이유가 있었다.  정권이 권력을 통해 사람들의 반발을 억누른다 하더라도 유명세가 시작되면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돤다. 또한 자신에게 우호적인 여론도 만들 수 있다. 권력도 마냥 여론을무시할 수는 없다. 연경은 자신이 어느 순간에 누군가에 의해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적인 힘이 생기면 이들도 쉽게 자신을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연경이 끈질기게 여러 공적이슈와 논란의 중심에 선 이유였다.


 방북기획기사 내용이 결정되고 연경은 김희수 사진기자와 방북 길에 올랐다. 개성의 미래와 개성공단에 대한 심층적인 르포기사가 연재될 예정이었다. 회사 내부적으로도 기대가 있었다. 그녀는 간부들과 기사 방향을 결정하고 촬영기자와 함께 일정을 잡았다. 3월 13일 판문점을 넘어 드디어 북한 지역으로 들어갔다. 개성공단 착공 이후 개성으로 단독 취재를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출입국 관리소를 거처 월경을 하고 북한 버스로 갈아탄 뒤 개성으로 향했다. 그녀는 가벼운 흥분을 느꼈다. 아직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미지의 땅에  들어가는 탐험대의 심정이었다. 아스팔트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빼고는 경치는 남한의 시골과 차이가 없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시멘트와 슬레이트 지붕들과 오래된 듯한 단층건물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개성까지는 오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였다.  차량이 시청으로 보이는 건물을 지나 개성 남대문의 원형 로터리를 통과했다. 이후 한 바퀴 돌아  <자남산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이라기보다 초등학교건물을 바뀌 만든 숙소와 같아 보였다. 여러나라의 국기가 걸려 약간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연두색으로 칠한 삼층 건물은 미적 고민에 대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오래돼 방치된 둔탁한 관공서 느낌이었다. 로비로 들어섰다. 연경이 듣기에 과도한 반가움을 표하는 직원은 간단히 숙소를 안내하고 객실 열쇠를 건 내 주었다. 연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호텔의 비품은 낡아 있었다. 시간은 20세기 중반에서 멈춘 듯 했다. 일단 객실에서 짐을 풀고 짙은 체리색 문을 열어 복도로 나와 로비로 향했다. 첫날은 우선 스케치 기사부터 시작하기 위해 개성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호텔정문에서 나와 시가지에 발을 딛었다. 무채색으로 채워진개성사람들의 옷차림이 연경의 눈에 들어왔다.  이국적이었다. 개성은 다른 세계 다른체제속 공간이었다. 간간히 낡은 차량과 트럭이 지나가기는 했지만 그 수는 손에 꼽을정도였다. 사전에 연락한 가이드로 보이는 사람이 호텔 정문에 인민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을 림영수라고 소개했다. 가벼운 인사를 한 뒤에 연경이 가이드를 보고 물었다. 가이드 일을 한지 오래되었냐고.


사회 안전성에 있었지요. 남쪽에서는 뭐 경찰이라고 한다지요? 먹고 살게 아득하니 어쨌든 정보가 들어와서 이거라도 해야지 어카겠시오?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지 안캈소? 개성 내부의 사정을 정확하게 모르기에 연경은 조심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이를 눈치 챘는지 가이드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뭐 일없시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는 거지. 뭘 그리 눈치를 봅네까? 북조선식 사회주의가 어쨌든 망조가 든 것 아니겠소? 난 그렇게 봅네다. 내가 사회 안전성 출신이니 아무래도 도움이 좀 될게 있을 거요. 그래도 여기는 아직 과거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이 많소. 남조선 기자라 하니 특별히 잘 대해주라고 하더라고 며칠간 잘 다녀 봅시다. 관광명소부터 들러 보시 갔소? 개성은 볼게 많지. 고려유적지가 많아.

음. 아니요. 유적지와 관광지는 천천히 보면 되고 시민들의 일상과 관련해 얘기를 듣고 싶어요. 내일은 공단하고 공단 시장 근처를 가서 확인해볼 내용이 우선이에요. 저는 북한 주민들의 일상에 관심이 많아요.

인민들이 사는 게 뭐 그리 궁금하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지. 개성사령관 군 출신들이 임시정부에 들어가 있고. 김병철의 입김이 아직도 크오. 그 때문에 당신도 여기에 올수 있게 된 게지.


 연경은 공단 근처의 장마당과 개성의 변화된 상황이 궁금했다.  자본주의경제가 실제 어느정도로 확산됐는지 직접확인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취재하면 현장의 상황이 전달될듯 했다. 제보자의 말처럼 그곳이 정말 인간시장 같은지도 확인해야했기에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었다. 관심사는 우선 제보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공단은 어떻게 변했는지. 개성지역이 평양과 관계를 끊고 자본주의 경제가 어떤 형태로 자생했는지도 파악해야  르포기사가 만들어질 것 같았다. 연경은 우선 가이드에게 주변인에 대한 인터뷰를 몇 명 요청했다. 날것 그대로 그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속 깊은 이야기. 체제에 대한 이야기 한 개인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연경도 가이드도 그 부분에 대해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다. 그 누가 단번에 속사정을 파악한다는 말인가. 자신역시 관광객처럼 보일 텐데. 하지만 연경은 그 틈새를 파고 들고 싶었다.


 그들의 일상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라도 좋았다.가이드는 신문사로부터 비용을 지급받았기 때문에 최대한 협조해 줄 심산이었다. 시내를 걸으며 사진기자를 포함한 세 명은 거리의 모습과 사람들의 표정을 찍었다. 잠시 후 가이드는 거리로 나가더니 누군가를 한명 데려왔다.그녀는 48세로 개성 보육원의 보육교사라고 소개했다개성이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전쟁과 같은 상황이 무서웠지만 이제는 안정을 찾아 일상을 되찾는 중이라 했다. 철강 노동소에 다닌다는 30대의 남자도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냐고 묻자 연경은 됐다는 말을 꺼냈다. 만나봐야 다 똑같은 얘기만 반복할 듯 싶었다. 그는 자신이 보안성에 있었기에 사람을 데려오는데 도움이 된 것이라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연경은 피식 웃으며 고맙다고 답했다. 림영수도 저들의 대답이 별 도움이 안된다는것늘 아는 눈치였다.


자 자. 인민들 이야기는 차차 듣기로 하시오. 억지로 하려면 안돼. 그보다 오늘은 개성 시내하고 관광지 몇 군데를 돌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가이드는 잠시 후 차를 몰고 왔다. 투닥 거리는 엔진소리와 함께 그가 손을 흔들었다. 20년은 족히 된 듯한  낡은 차량이었다. 연경과 사진기자는 뒷 자리에 앉았다.

이게 공화국의 휘파람이라고 하는 차요. 그럭저럭 잘 나가는데 여기선 이것도 정말 구하기 힘들지. 그가 몰고온  차는 내구성이 좋지 않아 보였다. 직물시트는 다 헤졌고 내부에서는 플라스틱과 오래된 퀴퀴한 냄새가 심하게 났다. 히터를 켜자 설명할 수 없는 탄 냄새가 올라와 연경은 살짝 창문을 내렸다. 차량은 60km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개성시장을 지나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소. 좌우로 보이는 큰 건물이 있는데 저게 통일관과 영생탑이요. 개성의 상징같은 거지. 일단은 김일성 동상부터 가봅네다. 가이드는 북쪽으로 차를 몰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통일관 옆 언덕으로 김일성 동상이 보였다. 그런데 동상은 이미 흉물스럽게 변해있었다. 누군가 페인트로 칠해놨는지 검은 얼룩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상체는 돌에 맞은 듯 한 흠집이 있었고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주변에는 듬성듬성 수풀이 무성했다.

어떻소. 권력은 이처럼 무상한 게요. 인민들을 먹이지 못하고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화국의 실상이 알려지자 저렇게 됐소. 북한의 모든곳에 세워져 있는 영생탑의 붉은 글자도 검은색 페인트를 누군가 뿌린 듯 글자들이 많이 지워져 있었다.


 근처의 백화점은 이름만 있을 뿐 빈 건물이나 다름없었다. 둘은 선죽교와 만월대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관광지였지만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주민들이 가끔 산책삼아 돌아다닐 뿐 이였고 대부분 노인이었다. 연경은 정몽주가 죽임을 당한 선죽교를 기대했지만 연못크기는 동네 공원에서 볼수 있는크기였고 선죽교는 10미터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돌다리였다. 그나마 재건한 것이라고 했다. 주위의 숭양서원까지 둘러보고 연경이 말을꺼냈다. 사진기자는 많은 것을 담으려 수없이 셔터를 눌렀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요?  연경이 림영수에게 물었다.

관광객이라고 해봐야 얼마 안 되지. 가끔 외국인들이 오는 정도요. 공단 활성화와 주변지역 건설을 위해 개성 임시 정부에서는 외국인 노동자까지 받고 있소. 그래야 경기가 살아나고 투자도 들어 올 테니. 남조선은 왜 기업들이 이곳에 투자를 하지 않소?

대기업들이 공단추가 조성에 투자했고 일부 건물도 올렸죠. 실적이 조금 나오고 하면 기업은 장기적으로 접근할 거예요.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요. 그 부분 때문에 망설이죠. 사실 남한 정부도 맘만 먹으면 협상을 통해 공단 협력 사업을 더 키울 수도 있을 텐데. 평양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 위쪽도 곧 정리가 돼야겠죠. 불확실성은 경제에 좋지 않아요. 연경이 말했다.

뭐 글키도 하겠네.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더 둘러 볼 거요? 날도 저물어가고 하는데.

아뇨. 숙소로 가서 쉬고 내일 공단지역 둘러보고 장마당에 가봐야겠네요. 공단 기업과 인터뷰도 있고요

아 그러시구만. 밤에는 험한 일 당할 수도 있으니 가급적 안 나 가는 게 좋소. 치안이 아직은 좋지 않을 거요. 나가봐야 할 것도 볼 것도 없고.

네. 쉬고 기사 정리하고 하려고 합니다. 내일시간 맞춰서 뵈어요.

그렇게 합시다.


인민복을 입은 림영수는 그렇게 가이드 업무를 마치고 둘을 자남산 호텔에 데려다주고 사라졌다. 연경은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이 나오다 말다해서 한참을 기다리다 씻기를 반복하고 1층 로비의 식당에서 후배 사진기자와 냉면을 시켜 먹었다. 같은 말을 쓰는 사람끼리 달러로 계산을 하는 것이 낯설기도 하고 외국에 나온 기분이 들었다. 가끔 직원들이 귓속말을 하며 이들을 힐끗 거리며 처다 보았다. 음식 맛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숙소로 올라와 침대에 누워서 일정을 확인하고 노트북을 꺼냈다. 총 7회에 걸쳐 작성하게 될 기사와 사진 자료 등을 정리해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퇴근시간이 끝나자 호텔 앞 도로에는 지나가는차량이 거의 없었다. 적막감이 들었다. 간혹 트럭과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보였고 멀리 민둥산의 산등성이가 황량한 속살을 내놓고 있었다. 내일 만날  김수필이라는 서해산업 대표에 대한 질문과 공단의 상황, 개성에서의 생활은 어떤 것이 있을지  질문을 추려놓았다.  


생각해 보니 김수필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대학교 선배와 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김수필 선배가? 아니겠지. 연경은 그렇게 생각했다.수필선배의 전공도 아니고 갑자기 전혀 관련 없는 분야의 대표로 이곳에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연경은 아래에 내려가 맥주 몇 캔을 사와서 후배기자와 개성에 대한 감상과 일정을 얘기하고 찍은 사진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자리를 파하고 자신의 객실로 돌아온 후 휴대폰의 wifi신호를 확인했지만 역시 되지 않았다. 아주 약한 신호만이 잡힐 뿐이었다. 인터넷은 포기하고 텔레비전을 틀어보았다.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내용에는 전혀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흥미 없는 다큐멘터리를 강제로 앉혀 눈을 부릅뜨고 보도록 하는 느낌이었다. 컬러텔레비전이었지만 왜인지 화면이 모두 무채색 같은 느낌이었다. 공단 근처에는 남한 방송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개성은 아직 인 듯 했다. 그렇게 누워있자 긴장이 풀리고 어느새 스르륵 잠으로 빠져들었다. 전일 긴장을 해서 그런지 아침에 일찍 잠이 깼다. 낯선 잠자리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정리를 하고 로비로 나와 사진기자와 함께 간단한 조식을 먹고 림영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휘바람 차량을 타고 림영수는 다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10시정도가 되었다.


잘들 주무셨소?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일찍 깼어요.

남조선 숙소보다 여기가 한참 못 할 거요. 그렇지 않소? 음식이든 뭐든. 그래도 곧 발전할 것이요. 남조선 만큼이나 말이지. 평양도 좀 정리가 되고 새로 뭔가가 들어서겠지. 림영수는 말을 멈추고 운전에 집중했다.

오다가 봤겠지만 공단은 여기서 멀지 않소.


최연경은 조금 더 창밖의 경치에 집중했다. 개성 시내를 벗어나자 금새 너른 들판과 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들목을 빠져나가자 도로의 포장 상태가 급격하게 악화됐다. 대부분의 도로는 중앙선이 그어져 있지 않았고 아스팔트는 패여 있었다. 다행인 것은 오가는 차량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저 멀리 철길이 눈에 들어왔고 작은 간이역이 보였다.

공단은 이제 곧 보일 거요

 최연경과 사진기자를 태운 차량은 공단 입구 초입에 들어왔다. 공단 초기 부총통의 방문과 행사 여러 매체의 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기는 했지만 공단의 규모는 생각했던 것 보다 컸다. 기반시설 및 관리인원까지 포함하면 20만 명 정도 수용이 가능하고 지역의 새로운 성장 발전 동력원으로서의 가능성은 충분했다. 물론 고부가가치 산업은 아니지만 추후 다른 분야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단 초입은 공사가 한창이 이었다. 완공된 건물 옆으로 크레인이 계속 건물을 올리고 있었고  덤프트럭이 끊임없이 흙을 나르고 있었다. 그때마다 흙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연경은 재빨리 창문을 올렸다.


일단 한 바퀴 돌아 보갔습니다. 가볼 곳이 어디라고 했지? 아, 서해산업 그기는 어디냐 하면 그는 표지판을 넌지시 보면서 차를 몰았다. 저쪽 왼편 끝이네요.

차는 아직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를 가로질러 공업지구 왼쪽 구석으로 이들을 안내했다. 서해산업은 가동이 이뤄지고 있었으나 공단곳곳은 아직 한창공사가 진행중인 상태였다.  넓은 벌판에 각종자재와 철근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서해산업이 공단 중에서 착공이 빨라 외관은 거의 완성이 된듯한 모습이었다. 업체의 규모가 예상보다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림영호는 경비에게 방문예약이 되어있다는 말을 전했고 곧이어 견고해 보이는 철문이 열렸다. 차량은 회사 현관으로 이동했다외부인 접객을 위한 공간은 2층에 마련되어 있었다. 연경은 지나가며 생산 공정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고 거친 기계 소음이 복도 까지 들렸다. 생산시설을 힐끗 보니 흰색 작업복을 입은 여자들의 손이 분주해 보였다. 가장 안쪽의 접객실로 둘은 이동했다. 응접실은 소박했다. 붉은 카펫이 깔려 있고 여러 고급스런 소품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뭔가 전체적인 조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긴 사각형의 테이블이 있고 베이지색 계열의 소파가 마주보고 놓여 있었다. 유리로 만든 탁자에는 개성공단의 지도와 업체 현황이 적혀 있었다. 잠시 후 중년의 점퍼차람의 한 남자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아 연락을 주셨던 삼한일보의 기자분이시군요. 한참동안 말을 안 한 생태였는지 그의 목소리는 약간 갈라져 있었다.

네 최연경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명함을 주었다.

연경이 맞나?

혹시 김수필이 선배였어? 연경은 놀라 눈을 크게 떠졌다.

 와... 이거 오랜만이군 기래.

 뭐야 말투가 왜 그래? 여기 있더니 아예 북한 사람이 된 거야?

 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가끔 튀어나오기도 해. 그건 그렇고 이게 얼마만이야. 수필은 크게 웃으며 몇 번이고 연경의 손을 쥐었다. 연경의 표정도 한층 밝아졌다. 후배기자를 소개시켜 주고 셋은 자리에 앉았다. 차와 간단한 다과가 준비돼 있었다.    

아니 난 상상도 못했어. 선배가 여기의 대표라는 것을 어떻게 이런 업체의 대표가 된 거지? 원래 이 분야의 일을 한 게 아니었잖아.

음......사실 나도 내가 여기서 이 업체를 운영하게 될지 상상도 못했어.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제약회사에 들어갔다가 영업도 하고 여러 일도 했지. 그러다가 업계 노하우를 배우게 되고 이렇게 흘러 왔어. 내도 내가 어떻게 여기서 일하고 있는지 안 믿길 때가 많아.

와 그래도 여기가 공단에서 상징적인 업체라 들었어그래서 인터뷰도 준비한 거고 그런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연경은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이라 반가움과 과거의 인연에 대한 추억도 떠올라 한층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살다보면 내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지만 전혀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기도 해. 내 경우에는 그런 것 같아.

암튼 밀린 얘기는 좀 이따가 하고 일단 인터뷰부터.


 후배기자는 김수필의 사진을 찍었고 연경은 준비한 질문을 알려줬다. 김수필은 자연스레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공단 초기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매출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답변을 이어갔다. 인터뷰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수필은 이야기를 꺼냈다.    

연경이 네가 하는 일들 다 예전부터 보고 있었지. 최근에는 유명해 졌던데? 정부에서도 요주의 인물로 보고 있고. 김수필은 농담 삼아 말을 꺼냈다.

푸하하, 내가 반정부 인사가 맞기는 하지. 총통이 과연 얼마나 더 집권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총통은 이미 정상적인 판단력이 없어. 그 밑의 인간들이 여전히 권력을 놓지 않으려 이 이 사달을 만들고 있는 거지. 그동안 어떤 짓을 해왔는지 아마 엄청날걸 권력을 놓치면 그게 낱낱이 다 까발려 질 거야. 내 유명세? 그거 나 안 죽으려고 하는 거야. 그나마 유명인이 돼야 저들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너는 여전하구나. 김수필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으며 연경을 쳐다보았다.

나도 선배한테 궁금한 게 있는데 우리 한참 같이 반독재 투쟁을 벌였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그만뒀어. 어느 순간 선배는 없어져 버렸더라고. 그게 난 궁금했어.

음.. 그건 긴 얘기가 될 것 같아. 언제고 할 때가 있겠지. 암튼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그래도 우리가 차린 것은 없지만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가.

아.. 그게 가이드 분도 같이 오셔서.

같이 들고 가면 되지. 가이드는 운전해야 해서 술을 안 먹을 거고. 그래도 오랜만에 봤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지. 김수필은 사양하는 연경을 여러 번 설득했다.

그러면 공단 관리위원회와 몇 군대 더 둘러 볼 때가 있으니 이따가 다시 올게요.

그래, 김수필의 얼굴은 한층 밝아졌다.  둘은 정문을 나와 걸어 가이드의 차에 다시 올라탔다.    

얘기는 잘 된 거요?

하하. 뭐 협상을 하러 온 것은 아녀요. 후배 사진기자가 말했다. 선배님 대학선배가 저곳의 대표로 있지 뭐에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어요. 그 덕에 취재도 쉬웠고 협조적으로 인터뷰 내용도 많고 잘 끝났지요.

아 기래요? 림영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얘기를 하고 싶었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으려는 그런 인상이었다.

암튼 갑시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저의 공단위원회와 남측 사람들을 만나서 알아볼 것이 있어요.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참 점심은 드셨나요? 연경이 림영수에게 물었다.

여기 차에서 뭘 먹겠소.

 그럼 공단 관리사무소에서 가서 같이 간단하게 점심을 드시죠. 저녁은 여기서 먹어도 될 것 같아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림영수는 차를 몰아 공단 한 복판으로 움직여 관리위원회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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