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깨고 사내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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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수가 죽었다고 한다. 바로 방으로 와.
메시지가 와 있었다. 부장의 호출이었다. 오전에 보고하러 간다고 얘기를 해 놓았는데 이제 답변이 온 것이다. 국수본 사무실에서도 뉴스채널을 커놓고 몇몇의 사람들은 국방부 대변인의 발표 내용을 듣고 있는 중이었다. 정엽은 사건이 터지고 몇 시간 뒤에 소식을 전해 들었다. 부장의 호출이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간부회의가 끝났을 것이다. 개성에서 돌아와 바로 보고를 마친 뒤 이틀이 지난 후였다. 며칠 전까지 얘기를 나누고 서로 업무와 관련해 얼굴을 붉힌 기억이 생생했다. 정엽은 착잡한 심정으로 부장실로 가 문을 두드렸다.
부장은 누군가 중요한 통화를 하는지 정엽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을 했다. 방을 왔다 갔다 하며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적극 설득하고 있는 것이었다. 통화가 끝나고 부장실에 들어온 뒤 정엽은 부장실에서 보지 못했던 아레케야자와 고무나무, 킹 벤자민과 선인장류의 대형 식물화분을 처다보고 있었다. 그가 서류를 들고 서 있자 부장이 뒤돌아 한숨을 지었다.
뭘 그리 멀뚱하게 있어. 자리에 앉아라. 부장은 도기에서 차를 우려내고 잔에 따랐다.
근데 이상한 낌새는 없었어? 이병수 죽은 거 말야. 넌 이병수랑 직접 여러 얘기도 했을 테고. 그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특이한 것은 없었냐는 거지.
잠깐이었고 그런 느낌은 잘 못 받았어요. 제가 와서 있는 게 귀찮고 성가시다는 느낌은 있었죠.
음..... 부장은 차를 마시며 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저도 당황스럽네요.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며칠 전까지 같이 얘기한 사람이 죽었다니 안타깝고.
근데 저 거대한 화분은 뭔가요? 왜 들이셨어요? 갑자기 이 방이 작은 식물원 같아 보이네요. 취미 새로 만드셨어요? 함부장도 난초에 정성을 들이고 있던데. 부장들의 취미인가요?
아 그거? 별거 아냐. 공기도 건조하고 뭔가 좀 삭막한 기분이 들 더라고. 그래서 분위기 반전 좀 시키려 화분을 좀 놨다.
분위기 반전에 화분이 효과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데요. 부장님 심경의 변화가 생겼나요?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나? 전에도 한번 방 분위기 바꾼다고 했을 때도 새로운 거 하시던데. 야당인사 외신 인터뷰 몰랐다고 그거 때문에 곤혹을 치르셨다고.... 부장님 공간이 바뀌면 뭔가 수상한 기운이 돕니다. 부총통도 국면전환을 원할때 인테리어를 바꾼다면서요.
심경의 변화까지야. 그렇게 물고 늘어지지 마. 괜한 기억 떠올리게 하지 말고 본론만 말해. 그놈 보러 가려고 하는 거지?
부장님 눈치 채셨군요. 아 근데 진짜 뭔 일이 있으세요. 아까 통화도 뭔가 적극적으로 하시는데요. 평소답지 않으세요.
부장은 슬쩍 웃었다. 내가 짬밥이 몇 년인데 그걸 모르겠냐. 말 돌리지 마. 자식아. 적극적은 뭐가 적극적이야. 귀찮은 일투성이지.
참. 시위 가담자와 폭력행위 한 사람들에 대한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별거 있겠냐. 그냥 관성대로 하는 거지 뭐. 불법집회 모임 등에 대해서 언제나 관용을 허용하지 마라. 이게 지침이잖아. 이번 사태는 분위기상 쉽게 넘어갈 수 없어. 배후인물까지 털어야 해. 그 때문에 정신없이 움직이니까.
뭐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정엽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뭔 생각을 하고 있어. 왜 너도 1과로 다시 가게?
아뇨. 딱히 그런 것은 아니고. 정엽은 말을 얼버무렸다.
참 너 개성 갔다 와서 쓴 보고서는 잘 봤고. 보고서는문장쓰기 능력을 시험하는 게 아냐. 핵심이 없어. 의심된다고 하던 부분은 어떻게 처리 할 거야? 부장은 정곡을 찌르고 있었다. 사실 공단폭발사건과 관련해 최초로 첩보를 제공한 것은 부장이었다. 정엽은 우선 그 부분을 조사하러 갔지만 부장이 지적한 것처럼 확실한 단서를 건져낸 것은 아니었다.
부장님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이번 방문은 전초전과 탐색전이었죠. 확인해야 할 정보가 아직 많습니다. 일단 대표인 김수필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히 있어요. 서해산업의 매출은 계속 늘어갑니다. 그 수익이 어디로 가는지도 알아야 하고. 김수필이 주로 누구와 접촉하는지 어떤 업체와 거래를 늘려서 그 수익을 만들고 있는지. 그것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모리는 뜻하지 않은 성과이기는 했고요.
전직 형사로서의 직감이야?
그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요. 일단 필요한 정보를 좀 모아두고 있는 것이고요.
어머니 사건은 어떻게 됐냐? 가서 뭔가 확인한 게 있어?
그 부분은 손도 못 댔어요. 권한도 없는 제가 쉽게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차후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가 보고한 것 보고 좀 떠오른 게 있어. 서해산업하고 관련지어서 생각하면 뭔가 구린 냄새가 나는데 말야. 너 유치장에 있는 그놈 한테 뭔가 알아내고 싶지? 그놈에 대한 보고서를 보면 음침하고 뭔가 미스터리한 그런 기분이 든단말야. 네가 총격을 당하는 그 순간 보았다고 한 놈하고 아무 기록 없는 유치장에 있는 저놈하고 엮일 것 같은 생각도 들고.
부장님의 직감은 언제나 잘 틀리시죠. 지난번 산업스파이건도 그렇고.
아. 그 얘기는 왜 또 꺼내. 부장은 목소리를 높였지만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개성에 다시 들어갈 생각이라면 제대로 준비해서 보여줘 봐. 그게 국가를 위하는 일이니까. 얘기 했잖아지저분한 일은 1과 애들이 맡을 거라고.
총통의 집권연장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겠죠.
너 말에 뭔가 가시가 있어 보인다. 총통이 곧 국가 아니냐. 이 나라에서.
일단 이병수가 죽어서 사건이 복잡해 질수 있어. 사태가 커지면 여기저기서 달려들 텐데. 정리되면 서로 자기 성과라고 시끄럽게 나댈 테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치적으로 목소리가 또 나올 거란 말이지. 우리도 가만히 있지 못할 거고 뭔가 압박하는 액션을 취하겠지. 그럼 김병철도 가만있지 못해. 당분간은 또 공단 입 출입 제한이다 뭐다 이렇게 저들이 움직일 수 있다는 거 염두해 둬라.
이병수는 뭔가 좀 숨기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개성임시정부에는 암암리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김병철이 있고 그의 부대는 지금도 암약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아요. 이병수와 대립한 것인지 비밀리에 협력을 한 것인지. 이번 건은 외부기관과의 공동조사가 필요하다고 말씀 좀 해 주십시오. 군부는 어쨌든 독립적으로 수사를 진행할 테고 저는 그 틈을 봐서 공단과 서해 산업 상황파악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만약 이병수의 비리가 그의 죽음으로 공소권 없는 것으로 묻히면 노력이 모두 헛수고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겠지. 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국정원 하고 군하고도 협조도 해야 하고 조금만 있어봐. 저들과 조율을 좀 해보자.
usb 메모리 내용은 뭔가요. 정엽이 말을 마치자 부장은 서류를 하나 책상에 던졌다.
읽어봐. 이병수의 비리는 모두 사실일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네가 준 암호화된 파일은 풀었다. 스트립 암호로 돼 있고 어려운 암호는 아닌데 해독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하더라. 대략적인 것만 알아냈어. 포렌식 팀에서 내용을 보라고 일부러 쉬운 암호로 암호화 했을지도 모른다는거야. 마치 좀 알아봐달라는 말 같다고.
그래요? 무슨 내용인데요. 김부장은 한참을 고민하며 말을 꺼냈다.
인체 비밀실험에 대한 내용이다. 네가 그 메모리를 어디서 입수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그걸 왜 너한테 넘겼을까?너 어디서 훔쳐온 것은 아니지?
네? 정엽은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인체대상 실험이요?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그 데이터고요? 북한당국에서 뭔가 일을 벌였다? 정엽은 중얼거렸다.
그건 아직 모르지. 북한당국인지 아니면 비밀조직일수도 있을 테고. 다른 집단일수도. 일단. 대외비로 해두고 있으니 좀 더 알아봐. 국장님하고 본장님한테는 일단 보고할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너 총 맞은 얘기 좀 구체적으로 해봐라. 이번 광장에서 잡힌 놈하고 네가 겪은 상황하고 뭔가 맞아 들어가는 거라면 그림이 그려지지 않겠냐.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생각할 때 특유의 버릇처럼 고개를 숙이고 양발을 번갈아가며 차 올렸다. 그 모습이 흡사 아이들이 물장구치는 모습처럼 보였다.
보고서 이외에 더 특별한 것은 없어요. 개성에서 개풍군 쪽으로 이동할 때였죠. 개풍군 평화유지군막사로 가는 길이었고 그 때 멀리서 갑자기 저격을 받았습니다. 총격으로 타이어가 터지고 차가 도랑으로 굴렀죠. 아마 그대로 있었으면 죽었을 텐데. 근처를 지나던 다른 나라 평화유지군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어요. 운전자가 총을 맞고 의식을 잃었죠. 순간 누군가가 다가오는 듯 했어요. 멀리서 본 것 같은데 빠른 속도로 다가오더군요. 지난달 시위자 중 검은 옷을 입은 자와 비슷한 느낌은 있었죠.
누구를 말하는 거야? 지금 잡힌 놈 얘기하는 거지? 그럼 그 잡힌 놈이 개성에서 온 것이라고? 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서.
가능성이야 있으니까요. 부장님 직감을 따라보죠. 그놈은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고. 인적사항파악도 안되고 일치하는 지문도 없고.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하면.
근데 총격 사건이 있었을 때 그곳이 어머니 실종 장소랑 가깝지? 어머니 생각 때문에 좀 예민해져서 헛것을 본 거 아냐?
아닙니다. 그날 사고에서 분명히 그놈은 절 죽이려고 했어요. 조준사격이죠. 그 기억은 분명해요. 의식을 잃기 전이었고요. 상상이나 그런 것이 아녔어요. 부장은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개성에 다시 가서 무궁화 부대 책임자를 만나면 이병수의 개인비리에 대한 첩보가 있다는 것을 가지고군수사와 협력하는 방향으로 가보겠습니다.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켜야죠. 안 그럼 시끄럽게 한다고 하고.
정엽아. 내가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어머니 사건은 공단 초기니까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어. 거기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잊어버려 어쩔 수 없어. 네가 뭘 해볼 수 있는 시간이 이미 지난거야.
저도 압니다. 하지만 기회가 닿으면 해 봐야죠. 뭔가 연결지점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정엽은 부장의 방을 나와서 자리로 돌아와 필요한 서류를 정리했다. 이병수 저격은 군이 더 잘 조사할 테지. 그걸로 군은 뭐든 얻어내려 물고 늘어질 수 있으니까. 정엽은 끈질기게 찾으면 어머니 실종사건도 어디선가 분명 단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엽이 서울경찰청을 찾은 것은 다음날이었다. 민원실을 지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몇몇의 수사관들이 자리에 앉아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강력1계라는 푸른색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몇 년이 지났어도 이곳은 똑같구나라고 정엽은 생각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마른 체구의 젊은 형사가 책상에 앉아 정엽에게 물었다.
국수본의 이정엽입니다.
정엽은 신원을 밝히고 시위폭력행위 조사 담당 경찰관을 찾았다. 잠시 후 젊은 형사는 40대 중반의 반쯤 머리가 벗겨진 형사를 불러왔다. 강력반 반장인 모양이었다. 고참 형사는 단단한 느낌의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두터운 손과 벌어진 어께에 점퍼차림을 하고 머리는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었다. 형사는 손을 내밀었고 꾸벅 인사를 했다.
팀장님께 얘기 들었습니다. 국수본에서 오신다고 하더군요.
네, 광장 집회 폭력사건 검거 인원이 이쪽으로 왔다고 해서 조사 확인 차 왔습니다. 정엽은 상황을 설명하고 신원 불명의 사내를 찾았다. 그는 정엽을 조사실로 안내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둘은 접이식 의자에 앉았다. 다면경 조사실 즉, 사방이 유리로 된 조사실에서 그를 마주하자 단번에 단련된 듯 보이는 근육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변호사는요? 뭐라고 합니까?
뭐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일단 국선이 붙기는 했는데 변호사도 딱히 방법이 없는 모양입니다. 무슨 말을 시켜도 그냥 멍하니 앞만 보고 있어요. 둘은 조사실에서 혼자 앉아 있는 사내를 보고 있었다. 거울로 된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조사실안에서는 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변호사도 와보고 프로파일러도 와서 말을 끄집어 내 보려 하는데 입을 다물고 있네요. 그런데 온몸의 근육을 한번 보세요. 사람 같지가 않아요. 조사관님은 저런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저렇게 있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고 폭주하기도 합니다. 고통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그러다 또 원래대로 침착하게 돌아오죠. 뭔가 특수 훈련을 받았는지 일반인과 좀 다른 느낌이 있어요. 책상을 집어던지거나 거의 자해정도의 수준으로 몸을 쓰더군요. 다들 몇 번씩 왔다가 거의 포기 한 상태입니다. 이 상태로 구치소로 가서 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기본 검사에서는 마약반응이 나왔고 아직 다른 검사는 하기 전입니다. 그런데 일반 마약사범 느낌은 아니고요. 참 이상하죠. 구속기한은 최대 10일인데 벌써 5일째입니다. 어지간히 독한 놈들도 사실 이삼일이 고비라서 그 시간이 지나면 입을 열기 시작하죠. 그런데 이놈은 달라요.
제가 가서 심문을 진행해보죠. 형사가 놀란 모습을 물었다.
직접 조사를 하신다고요?
네, 광수대에 있었고 경험은 많죠. 일단 보고 입을 여는 지 한번 봐야겠네요.
소용없을 겁니다. 저희도 거의 포기 상태니까요. 형사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정엽은 의문의 사내에 대한 기록을 검토하고 지금까지의조서 내용부터 일단 살펴보았다.
정엽은 조사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사내는 누가 들어오든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짧게 자른 머리에 굵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군데군데 흰머리가 눈에 띄었다. 낡은 검은색 맨투맨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재질이 좋지않아 보였다. 티셔츠에는 얼룩이 묻어 있었고 보풀이 일정도로 낡았다. 그가 사내에게 가까이 가자 특유의 암내가 느껴졌다. 정엽의 눈길을 끄는 것은 팔과 어께에 있는 근육이었다. 한눈에 봐도 팔의 굵기와 근육이 보통사람 이상으로 보였으며 동맥이 피부에서 도드라지게 튀어 나와 있었다. 보디빌더의 몸이 아닌 단단한 근육이었다. 짧게 자른 머리로 동그란 두상이 눈에 들어왔다. 눈 주위는 움푹 패여 있었고 검게 그을린 얼굴은 강한 인상을 풍겼다.
이름과 나이는? 여기는 어떻게 오게 됐습니까? 집회에 참석한 목적은 무엇이고 거기서 무엇을 한 거죠? 정엽이 기본적인 정보를 몇 가지 물어도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군요. 계속 그렇게 있으면 모든 게 본인에게 불리해집니다. 이대로 구치로소 가서 재판을 받으면 말이죠. 여기 있을 시간도 며칠 안 남았어요. 사내는 고개하나 까딱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군요. 혹시 붉은 눈을 아십니까? 정엽이 그 말을 꺼내자 순간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정엽은 슬쩍 눈치를 보고 다시 말을 꺼냈다.
왜 그쪽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지. 지문이나 안면정보 생체기록이 전혀 없을 수가 없거든요. 그렇다면 해외태생으로 밀항해서 왔거나 아니면 북에서 넘어왔든가. 둘 중 하나겠죠. 그런데 생김새를 보아하니 북에서 넘어온 게 더 가능성이 있겠네요. 죄를 짓고 넘어왔던가. 아니면 특수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왔나? 정엽은 다시 그의 표정을 살폈다.
며칠 전 개성하고 공단에 다녀왔습니다. 사건을 조사를 진행하던 중에 붉은 눈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죠. 나에게 총격을 가한 것도 그중 하나일거라고 봅니다. 정엽은 갑자기 말투를 바꿨다.
그쪽도 거기에 속해 있나? 순간 그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그가 입을 열었다. 그는 뭔지 모를 웃음을 지었다.
개성에 다녀왔다고? 그는 큭큭 거리며 웃었다. 이후 눈을 치켜뜨고 정엽을 바라보았다. 조사실 밖에 있던 형사는 조사 상황을 주의 깊게 듣기 시작했다.
붉은 눈이 맞나. 역시 그랬군. 그럼 혼자가 아닐 텐데난 사실 궁금한 게 많은데 말야. 정엽이 말을 마치자마자 사내는 정엽을 쳐다보았다. 다른 일행이 잡혀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난 그쪽이 원하는 정보를 얘기할 생각이 없소. 몇 번이나 물어도 그건 마찬가지 일거야. 침묵을 깨고 사내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왜? 그게 당신의 삶보다 중요한가?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해서 하는 말이야. 당신이 북에서 넘어왔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있기에 여길 나가면 이제 국정원으로 조사가 넘어가게 될지도 몰라. 그들이 담당할 테니까. 그쪽의 보위부 같은 곳일 수 있지. 나처럼 여기 사람들처럼 당신을 대하지 않을 수 있어. 순간 그의 몸이 움찔했다. 사내도 그 말의 뜻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자신이 어떻게 될지 상상하는 듯 한 표정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어. 만약 우리한테 협조한다면 내가 자체적으로 조사할 수 있지. 나는 그럴 권한이 있거든. 그건 내가 장담할 수 있어. 사내는 침묵했다.
혼자오지는 않았을 테고. 그때 잡혀온 인원들을 모두 조사하면 누군가가 더 있을 거야. 당신이 끝까지 버텨도 다른 누군가가 얘기를 할 수도 있어. 그의 심리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정엽은 느꼈다. 말을 시작했으니 곧 정보를 이야기 할 것이다. 한고비를 넘겼다.
잘 생각해봐요. 이제 곧 국정원이 움직일 것이고 나도 다시 개성으로 넘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올 테니까당신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거야. 그 부분은 내 책임지고 얘기를 해 놓을 거니까. 정엽은 말을 마치고 조사실을 나섰다. 형사는 조사실에서 나와 복도에서 정엽과 대면했다.
저놈이 드디어 입을 열었군요. 형사는 의외라는 듯 말을 꺼냈다. 붉은 눈은 뭡니까? 진짜 북에서 넘어 온 것인가요? 그렇게 보십니까? 이름도 참 촌스럽네 ‘붉은 눈’이 뭐야. 그는 중얼거리듯 혼잣말을 하는 듯 보였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조사가 더 이뤄져야 합니다. 제가 말을 열어 놨으니 구치소로 넘어가기 전에 한 번 더 기회가 있을 겁니다. 국정원 쪽에서 연락이 오지는 않을 테니 아직은 연락하지 마세요. 업무 협조를 요청해 놓을 생각입니다. 두고 보시죠.
저도 일단 상황을 팀장님에게 알려 놓겠습니다. 형사는 뭔가 답답한 문제가 해결된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에서 나와 부장에게 내용을 전달했다.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고 그자는 붉은 눈을 알고 있으며 이제 막 입을 열기 시작했다고. 사건의 배후를 이제 알수 있을것이라는 말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