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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수호박 국수 3종 + 1

기대치와 경험치, UX 설계 

국수호박은 호박인데 국수같은 텍스쳐다. 영어로도 Spaghetti squash이라고 한다고. 연곡면의 김영신 농부님 출품.

호박이 국수같은 텍스쳐라는 게 뭔지 이해가 안 가시는 분들은 이제 좀 보시면 알게 된다.


우선 손질부터. 위아래 꼭지 부분을 따내고 반으로 가른다. 속을 파내고 찔 준비. 오늘은 반만 쓸 거니까 반은 속만 파낸 상태로 냉장고로 가고.



나머지 반은 찜그릇에 넣기 좋도록 더 잘라준다. 

찜기에 한 20분 정도 찌면 충분히 물러진다. 시간보다도,  찔러보면 안다. 푸~ㄱ 들어가는 그 느낌.



이건 파낸 속 일부 쪄본 것. 호박류 손질에서 안의 씨부분은 무조건 파내는 것으로 아는 경우들이 있는데,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경우도 많다. 주키니나 애호박 같은 경우는 이 연한 부분이 물이 생겨서 보관이 불편하니까, 이런 좀 더 큰 박류의 경우는 거기에 씨가 단단해 그냥 먹기 쉽지 않아서가 이유가 된다. 대체로 가정보다는 업소에서 중요한 이유들이다.

국수호박 속을 쪄보니 텍스쳐도 비슷하게 나오고, 씨는 뱉어내가면서 먹을만 하다.  

하지만 꼭 이렇게 먹지 않아도 되고, 남은 부분은 청을 담궜다. 



숟가락으로 긁어내면 아주 쉽게 긁어진다. 껍데기에서도 어찌나 깔끔하게 분리되는지, 호박이란 게 무르면 진짜 다루기는 쉬워진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무른 것 같아도 국수같이 올올이 분리된 조직들은 무르긴 커녕 사각함마져 간직하고 있다는 것. 맛은 보통 호박과 비슷하다. 애호박보단 살짝 달고 향이 있는데 늙은 호박보단 색도 향도 맛도 연한 편. 


자, 국수호박이니 국수를 해보아야지.


<한우 라구소스 버젼>

만들어둔 한우 라구소스로 스파게티 호박의 명성에 걸맞게 스파게티 버젼.

한 번 더 불이 닿았음에도 텍스쳐는 거의 변화가 없는 것이 특징. 카펠리니 같은 얇은 면을 가지고 했다고 생각하면 될까? 하지만 라구소스에 약간의 사각함은 딱히 나쁘진 않아도 인지부조화의 대상. 확실히 이 사각함은 고민할 점이 많다.



다음으론 마침 루꼴라 잎을 선물로 받았기에 페스토를 만들기로.

생생한 어린잎에 홍천 황잣, 올리브유도 제법 고급품이다. 인터넷 어딘가를 뒤져보다가 발사믹 식초를 넣는 레시피를 발견해서 오오 하면서 따라하기.

 

<루꼴라 페스토 버젼>


하지만 발사믹은 그닥...이다. 이것도 페스토에서 느껴지는 맛과 구현된 맛의 인지부조화 측면이 크다. 그냥 페스토 아니고, 파스타 아니고 다른 음식이라고 생각했었으면 나쁘지 않았겠지만 역시 국수라는 음식에선 기대와 많이 다르다.

  

<콩국물 버젼>


콩국물 버젼이 좀 낫다. 뭐가 나은지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그냥 그간 국수호박의 텍스쳐에 기대치가 적응해간 과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미림헌의 콩국물이 워낙 뛰어나서 그럴지도 모른다.

괜찮다 싶긴 한데 그냥 콩국수와 비교하면 이쪽이 낫단 생각까진 들지 않는다.


<하이브리드 버젼>


우리국수 칼국수면과 국수호박을 섞어서 콩국물에 마니까 만족스럽다. 사실 이 단계에서 국수호박은 고명 같은 역할을 하고있는지도 모른다. 찰지고 꽉찬 식감의 칼국수가 이미 텍스쳐의 태반을 점유했다. 익숙한 느낌. 거기에 약간 사각한 국수호박은 어쩌면 오이채 같은 고명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맛이란 것은 이렇게 사람의 기대치와 적응과정에도 영향을 받는다. 매번 다른 요리를 하는 요리사로서는 이런 부분의 기대치 예상과 UX 설계가 요리보다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국수호박은 당분간 굳이 국수로 먹길 고집하진 않을 것같지만 고추장 소스의 비빔면 버젼은 한 번쯤 시도해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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