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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어 선생님'을 본 요리사의 문어 손질하기

 죽여야 사는 존재들, 생명

<문어>


이 며칠간 한 문어요리는 대호평이라 갑자기 삶의 질을 높아지게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한 것은 아니니, 본질적으로 요리사는 살생을 하는 사람이다. 


문어를 요리하기 위해서는 문어가 죽어줘야 한다. 아니 돌리지 말자. 문어를 죽여야 한다. 문어를 죽이는 것은 꼭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 시장에서 이미 죽은 문어를 사와도 되고, 상인들에게 죽여달라면 대수롭지 않게 숨을 끊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문어를 죽인 것은 나로부터, 나의 '수요' 혹은 '욕망'에서 비롯된 일이다.


문어만 죽이는 것은 아니다. 채식을 하려는 편이긴 하지만 철저한 것도 아니고, 고기를 먹는 것이 도덕적으로 단죄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내가 고기를 먹으면 나로 인한 생명의 죽음이 유발된다는 것도 하나 다를 것이 없다. 유독 문어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선은 내가 실은 이렇게 살아서 펄떡이는 생명체를 내 손으로 숨을 끊는 일은 사실 별로 없다는 이유에서 시작할 것이다. 회는 남이 떠주거나 적어도 머리 따고 내장 제거까지는 내 손으로 안 한다. 대게라면 버둥거리는 것을 홀랑 찜통에 넣고 불을 올리면 그만이다. 뒤집어 버둥거리겠지만 그 절명의 순간을 내 손으로 직접 접촉하진 않는다. 유독 문어는 내 손으로 숨을 끊는 경우가 많다. 

 

내가 넷플릭스에서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멘터리를 봐버렸다는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문어는 똑똑하고 사랑스럽다. 적어도 이 다큐에선.

흔히 말하는 '고통을 느끼는' 혹은 '똑똑한' 이나 '감정이 있는' 동물들은 좀 더 우대해야 한다는 논조에 대해서는 극혐한다. 히틀러가 유대인과 유색인종을 학살하며 써먹은 우생학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사고방식이다. 개는 먹으면 안 되고 돼지는 된다는 이상한 문화에서 자라난 이상한 이론이랄까.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는 문어는 이미 오징어, 가재, 소라 등과는 다른 위치를 내 마음 속에 차지하게 되었다. 이건 키우던 동물을 잡아먹는 건 아니잖냐 같은 감정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안 보신 분은 한 번 보시길 권한다. 잘 만든 다큐이기도 하고, 특히나 우리가 살아있는 것을 잡아먹고 살 운명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 고민이 미치는 분들에게 권할만 하다. 먹을 땐 먹더라도 살생에 대한 약간의 불편을 소금처럼 간직한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믿는다. 스포는 하지 않기로.


https://www.netflix.com/title/81045007



<내장제거>


호랑이가 사슴이나 개를 잡아도 배를 가르고 내장부터 먹는다. 내장이 가장 잘 상하는 분위라서 그렇다. 문어의 내장은, 이것도 들여다보면 먹을 부분이 있겠지만 인터넷상에도 그런 분류는 못 찾았다. 오로지 아주 쓴 일부 부위만 잘 제거하면 될텐데. 그런 것을 탐구하기엔 생생한 살생의 흥분이 아직도 지속되어야 한다. 문어는 생명력이 강하고, 그 의지를 꾸준히 전달하는 생명체, 식재료다.


사진 좌하측에 허옇게 드러난 것이 문어의 머리(실은 배)를 뒤집은 것이고 좌상측에 거뭇한 부분이 내장이 든 주머니. 이 주머니를 잡아뜯으면 가뿐하게 내장 제거다. 다른 생선에 비해서 피도 없고 내장주머니만 손상 안 하면 상당히 깔끔한 작업이다. 머리를 (배를) 뒤집는 순간 문어는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어진다.

 

<소금으로 씻기>

이제 소금으로 문질러 씻는 과정이다.이미 뱃속이 텅 빈 문어지만 빨판에는 아직 의지가 역력한 힘이 느껴진다. 몸부림을 치면서 그릇 밖으로 탈출하려고도 하고 씻어내는 손에 강하게도 달라붙는다. 내 목숨을 놓지 않겠다고 힘을 쓰는 느낌에 몸서리가 친다.


소금으로 몇 번을 씻어내도 끈적하고 미끈한 액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거품까지 부글거리면서 올라오는 와중에 이 빨판의 촉감을 느끼며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소금으로 박박 문지르는 일은 확실히 뭔가 날 것의 순간이다. 의지를 꺾어서 생물을 식재료로 바꾸는 과정. 누구라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되고, 책임이 있는 그 순간들.

<입과 눈 제거>

하지만 내장이 제거된 문어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다. 빨판의 힘이 빠지고 나로서도 그 감각에 어느 만큼은 둔감해 진다. 입과 눈의 제거는 가위로 잘라내는, 비교적 간단한 과정이다. 이제 요리법에 따라 문어 각 부위를 해체해서 요리하면 된다. 빨판의 흡착이 사라지고 놔둬도 그릇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 식재료 문어를 다루는 일은 생명이 있는 문어를 다루는 일보다 훨씬 쉽고, 무감하다.


이런 꼴을 보기가 솔직히 말하면 싫다. 죽은 문어를 사올까, 혹은 손질을 부탁할까 하다가, 그래도 신선도를 생각하면 문어는 주방까지 살려 와야 한다. 그런 일에 이 몸서리 치는 감촉을 마다않고,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무감해지는 것, 그것이 요리사라는 직업이다. 나의 문어 선생님 같은 것을 떠올려봤자 일만 더디고 나도 손님도 불만을 남기게 된다. 손에 칼 든 일이란 결국 감정도 잘라내게 되는 것인가 보다.


채식을 하면 좀 나을까. 나는 살생이라는 면에선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문어 같이 몸서리 치는 그런 감촉이 없다는 것 뿐. 결국 연민도 무엇도 다 제멋대로 느끼는 감정인 것이 인간이다. 먹지 않고, 죽이지 않고는 살지도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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