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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호박 적후추 무스

후추를 맛있게 먹는 방법

<캄폿 적후추>


사실 잘 몰랐는데, 후추는 캄보디아 캄폿지방의 후추가 그렇게 좋다더군. 마침 캄폿 후추 3종이 있다.

오늘은 이 후추를 주인공으로 하는 요리를 해보려고 한다. 향신료에 진심인 편이라서, 언제나 조연만, 때론 악역을 맡는 것같은 향신료들을 주연으로 한 음식들을 구상할 때가 종종 있다.


우선 후추 뽀개기. 그라운더로 갈면 너무 곱게 나온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주연이 되기 위해선 텍스쳐가 어느 정도 있어야 제 맛. 밀대로 꾹꾹 눌러 밀었다. 잘 안 부서진다. 그게 포인트. 사실 이제 다시 보니 알후추를 써도 될 것인데, 괜히 헛힘을 썼나 싶기도 하군. 후추는 역시 어딘가 안티히어로 같은 맛이 있다. 그래서 좋아하나.


<미리 긁어낼 걸>


강릉산 단호박을 찐다. 단호박 무스로 화려한 무대를 만들 심산이다.

그런데 정신 놓고 호박을 속을 안 파내고 그냥 쪄버렸다. 바보같군. 씨를 긁어내는 것은 나의 몫. 


<그리크 요거트 투하>


찐 호박이 뜨겁기도 하고, 날 것일 때같이 씨부분과 과육 부분의 경계가 말끔하지 않기 때문에 씨 골라내는 게 대단한 일이 된다. 이걸 너무 차게 식히면 무스 만들 때 좀 성가신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일단 대충 골라놓고 빨리 무스부터 치기로 한다. 사진에도 보면 드믄드믄 씨가 보인다. 이건 먹으며 골라내는 방향으로 하자.


무스를 만드는 방법은 다양하다. 요는 텍스쳐를 어떻게 만들어줄 것인가인데 머랭을 쳐서 좀 단단한 텍스쳐를 가하는 방법도 있지만 귀찮기도 하고, 후추가 주연일 때는 그저 달콤하고 부드럽고 감칠맛 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생크림이 제격인데, 사실 유통기한이 짧은 크림은 잘 안 사는 편이다. 홈메이드 그리크 요거트로 해결. 약간의 산미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국수호박청>


단호박만으론 당도가 좀 부족하다. 후추가 주인공이지만 디저트로 쓸 것이라 달아야 한다. 호박과 맛과 향이 일맥상통하는 국수호박청을 좀 넣어준다.


<생강청>


이건 향신료 존재감 드러내는 버릇에 쑥 손이 가버린 생강청. 궁합이 나쁘다거나 하는 게 아니고, 딱히 후회도 아니지만 후추 원탑의 설계에선 좀 모순이 있다. 하지만 원탑론을 버리면 이쪽이 좀 더 밸런스 감각이 있는 배합인 것도 사실이다.


<무스완성>


이날따라 핸드블랜더도 고장이라 그저 손으로 퍽퍽 휘져었다. 질감이 좀 거칠해서 이것도 후추원탑용 설계로는 조금 계획이 어긋났다. 하지만 약간 거친 이런 질감이 덜 지루하고 좋기도 하다.


<최종본>

후추를 투하하면 이제 완성. 부드럽고 달콤한 무스에 씹을 때마다 후추가 톡톡 향을 발산하는 것이 매우 만족스럽다. 이거 디저트화 해서 예쁘게 손님상에도 나갔다. 반응은 역시 일방적인 호는 아니었던 듯.

그래도 개인적으론 매우 만족했던 맛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래서 향신료가 주연이 되는 요리란 것이 별로 없구나 싶기도 하다. 후추를 돋보이게 하려면 뭔가 평소의 음식 감각으론 부자연스러운 설계들이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또 더 생각해보면, 음식이란 익숙해지면 다 소울푸드 아닌가. 앞으로도 향신료 주연의 요리들을 가끔씩 하게 될 것같다. 누가 말리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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