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 백팔미, 108가지 토종쌀의 블랜딩

씹는 맛 하나 기가 막힌 블랜딩


지금의 얼터렉티브살롱 자리로 오면서 전기밥솥을 놓고 압력솥이나 기타 매뉴얼로 조정이 가능한 도구로 밥을 짓게 되면서 밥맛에 눈을 뜨기도 했다. 어지간한 소스나 반죽을 자기 손으로 만드는 것이 요리사이듯, 밥도 전기밥솥에 던져놓아선 안 된다는 것, 해보면 참 자명한 사실인데 말이다.


그래서 토종쌀도 내 손으로 하나하나 밥을 지어보고 그 특징을 파악해보자 싶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쌀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 쌀만의 고유한 어떤 점을 알아주는 작업이 당분간 내가 할 일이다.   


우보농장에 처음 방문했을 때 받아온 쌀은 이 108미다. 108가지(혹은 그 이상)의 쌀이 블랜딩된 토종쌀 종합 선물세트. 그런 의미에서 보면 쌀 하나하나마다 이름을 불러주자는 의도에는 잘 안 맞지만, 주실 땐 주신 뜻이 있을 것이니 받은대로 밥을 지어본다.


혼합쌀에 대한 이미지는 물론 좋지 않다. 우리나라 쌀 유통에서 '혼합'은 지역도, 품종도 모르게 뒤섞여버린 쌀을 이야기한다. 고급쌀이라면 이렇게 취급하지 않는다. 마치 보르도의 네고시앙들이 이름 없는 포도밭의 그다지 잘 지어지지 않은 포도들을 사들여서 혼합하는, 그런 느낌인 것이다. 쌀 마케팅을 봐도 브랜드쌀들은 지역과 품종의 앞으로 내새운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보르도에서도 싸구려 포도만 혼합하는 것이 아니다. 유명한 포도밭들도 자기 포도를 기둥으로 삼되 다른 포도밭의 여러가지 포도들을 사들여서 더 좋은 맛을 내기 위한 혼합을 하고 있고, 그것이 양조가의 능력이자 정성이다. 스코틀랜드의 위스키는 또 어떻고(참고로 싱글몰트도 자체적으로 블랜딩은 한다)? 술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블랜딩 자체가 품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전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맵쌀과 찹쌀, 백미와 현미를 블랜딩한 이 쌀, 어쩐지 괜찮을 것 같다.


보기에도 재미있다. 개량종이라면 찹쌀과 맵쌀, 백미와 현미 정도로는 설명이 안되는 테크니컬러풀함이 보인다.


찹쌀과 현미가 들어가니 물은 평소 멥쌀밥보다   조금 더 잡았다. 참고로 나는 원래 밥도 알덴테가 좋은 편이라 내 취향은 거북해하는 사람도 많을 정도의 단단한 밥을 먹는 편이다. 쌀과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압력솥밥을 해서 바로 먹는 기준이면 물은 쌀이 잠기고 간신히 찰랑거릴 정도. 이번의 108미밥은 그보단 조금 많이(400그람 기준으로 5~60미리 정도) 물을 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밥물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조금 부족한 듯 정도일 것이다.


압력솥에 넣고 불은 우선 최고로 올린다. 압력솥에 넣으면 끓는점이 120도 정도로 올라가기 때문에 힘차게 증기가 뿜어져나오기 시작하면 사실 밥은 다 익은 상태다. 하지만 여기서 좀 더 익혀줘야 맛이 좋아진다. 특히나 나같이 물 적게 잡는 사람은. 불을 언제 줄일 것인지는 냄새를 맡아본다. 사실 처음 겪는 혼합미니까 냄새로 얻는 정보는 종잡기 힘들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누룽지를 만들 것인지, 다시 말해 바닥을 어느 정도 태울 것인지 기준을 삼는다면 새쌀이고 헌쌀이고 별 상관 없다.


탄 내가 살짝 올라오는 기분이 드는 정도에서 불을 꺼버리고 뜸을 들이면 바닥의 누룽지는 긁을 정도는 아니고, 밥을 풀 때 자연스럽게 같이 올라오는 정도가 된다. 하드코어한 누룽지 러버라면 압력솥보단 돌솥을 권한다. 


갓 지은 밥을 그릇에 뜬 사진이 없다. 어쨌든 맨 윗 사진이 밥솥 뚜껑 열고 바로 찍은 사진이다. 물이 적으니 사진을 찍을 때 촉촉한 윤기가 올라오는 분위기는 아니다. 사진발 잘 받으려면 밥은 무조건 물을 많이 잡고 지어야 하지만...


밥은 아주 맛있었다. 특히 현미와 찹쌀이 텍스쳐에 변화를 주는 것이 매력 만점이다. 현미만 먹으면 거칠고 찹쌀만 먹으면 찐득거리지만 백미를 기본으로 적당한 비율의 블랜딩이 이런 즐거움을 준다. 보름날 먹는 찰밥보다 훨씬 산뜻한 식감. 


108미를 통해서 블랜딩이라는 것에 대해 깨달음을 얻었다. 좋은 쌀을 블랜딩하는 것은 해볼만한 일이다. 밥맛 좋다는 일본은 식당에 따라 고유의 블랜딩이 있다고도 하니까.


오늘의 밥은 85점 정도. 밥 짓는 사람보다 쌀이 할 일 다 한 느낌이다. 성공적.


밥은 갓지어서 빨리 먹는 것이 답이지만 현실이 그렇게 되나. 좀 넉넉하게 지어서 먹고 남은 것은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 심지어 냉동시키는 것도 인정해야할 현실이다. 이런 밥이라도 햇반 같은 즉석밥보다 맛이 좋다면, 아니 맛이 좋아야만 하는 것. 적어도 요리사라는 사람이 하는 밥이라면 말이다.


108미밥은 냉장상태에서도 좋은 특성이 있다. 보통 냉장고에 들어가면, 아니 그 전부터라도 전분의 노화가 일어나면서 표면은 딱딱해지고 탄력이 사라진다. 딱딱한 것은 전자렌지에 한 번 돌리면 많이 완화가 되고, 국물이며 반찬이며 수단이 많은데 씹는 탄력이 사라지는 것은 좀 참기 힘들다. 햇반류를 싫어하는 이유도 기본적으로 그 흐믈한 식감 때문. 108미밥은 전분의 노화저항성이 꽤나 좋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미와 찹쌀의 공도 클 것이고, 백미들도 분명 개량종 쌀에 비해서 냉장시 식감 문제는 우위에 있는 것 같다. 전자렌지에 2~3분 돌리면 그런대로 씹는 맛이 괜찮은 밥이 나오는 것도 큰 장점이다. 


https://writerpaik.stibee.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