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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루밥 크럼블

앤 데이비스 여사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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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회 즈음에 루밥이 손에 들어왔다. 대황이라고도 부르는데 루밥이나 대황이나 한국사람들은 감이 잘 안 오는 먹거리임에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루밥은 영국에 있을 때 처음 먹어봤다. 하숙집 할머니 앤이 마당에서 수확해와서 파이인가를 만들었던 기억. 설탕과 버터가 넉넉히 들어가서 대략 맛있게 먹었던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또 엄청 인상이 남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 루밥으로 무엇을 해볼까 하다가 일단 청을 좀 담그고 남은 것은 디저트로 만들까 한다. 루밥은 잎은 옥살산이 많아서 못 먹는다고 한다. 잎을 떼어내고 난 줄기는 붉은기 도는 샐러리 같은 느낌이랄까. 적당한 크기로 토막쳐서 설탕에 재운다. 일부는 꺼내서 쓰고 나머지는 아예 청으로 고이 담글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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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를 많이 만들어먹는다는 것은 아는데 파이시트 만들기도 복잡하고 해서 방향을 살짝 틀었다. 마침 이 쑥도 향이 생생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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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딸기와 우유를 밑에 깐다. 설탕은 따로 넣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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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위엔 쑥을 깔고, 그 위엔 설탕에 절여두었던 루밥을 올린다. 크러스트만 있었으면 파이를 해도 되겠지만 크러스트는 생략하고 크럼블을 만들어 이 위에 올리고 오븐에 굽는다. 크럼블은 설탕, 버터, 밀가루를 적당히 섞어서 너무 큰 덩어리가 없을 정도까지 잘 주물럭거려서 버터와 설탕이 잘 먹은 가루를 뿌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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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물은 제법 괜찮다. 화려하고 꿈같은 디저트는 아니지만 버터, 설탕, 딸기와 우유에 루밥의 시큰함이 간이 잘 맞는다. 아이스크림을 올리고 후추와 올리브유로 마무리하는 것은 로코코의 사과와 같다. 그러고보면 이 루밥딸기크럼블이 로코코의 사과의 오트밀쿠키를 대체하고 있기도 하네.


앤 엘리자베스 데이비스 여사는 나를 아들같이 귀여워해줬고 20여년간 꾸준히 연락이 이어져왔는데 올해 봄에 암으로 유명을 달리하셨다. 삼가 명복을 빈다. 언젠가는 묻히신 곳에 찾아가 인사 올릴 날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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