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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최고'를 새롭게 정의해나가는 요리사

궁정을 깨고나와 세계를 맞이한 요리사


배 위에서의 생활은 이대로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가 또 이대로는 너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온했다. 생각하면 일상이 단순하고 평온했던 적은 나로서는 태어나서 이 배 위에서가 처음인 것 같다. 


궁정이란 모든 사람들이 서로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곳이다. 항상 누군가를 의식하는 삶들이라 조금씩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생활이라는 느낌도 이 배에서 새삼 깨달았다. 


역설적으로 '스타일'이라는 갑옷의 중요성도 깨달았다. 배에서는 스타일 따위는 필요도 없고 조롱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할 말 하고 살면 되는 거지 뭐가 그렇게 조심스럽냐는 것이다. 글쎄, 그건 배 위에서와 같이 생활이 단순하고 위계가 확실한, 혹 뭔가 헛갈리는 상황이라면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즉시 해결하는 사회니까 하는 얘기다. 거꾸로 말해서 스타일을 통해 폭력과 위압을 피하는 것이 인간사회이기도 하구나 하는 깨달음이 생겼다. 


뱃사람들은 거칠고 무례하긴 해도 단순하고 씩씩한 사람들이 많다. 거칠고 무례하다는 면에서는 어린 시절에 충분히 겪었기 때문에 두려울 것도 불편할 것도 없다. 


베르사이유의 궁정과 배 위의 선원들의 세계는 시궁창과 이 대양만큼이나 다르다. 무엇이 더 좋다고 생각하진 않겠다. 하지만 폭력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장점이라는 생각만은 든다.


하지만 폭력이라는 게 눈앞의 주먹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면에서 보면 역시 베르사이유가 덜 위험한 곳은 아니다. 친구의 손에서 완성되는 음모와, 복종의 비굴함을 가장한 속임수가 난무하는 파리에 비하면 여기는 훨씬 직설적이다. 목숨에 관련한 일이라면 베르사이유 쪽이 여기보단 안전하지만 조심해야할 것은 그쪽이 훨씬 많다. 


이런 평온한 항해는 가끔 위험의 감각을 잊게 만들어 준다. 별로 심하지도 않은 파도에 몸개그를 한 것이 불과 한 주 전인데 이제는 흔들리는 배를 제법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나는 원래 어디가든 생활에 꽤나 적응이 빠른 편이다. 


선원들과의 대화와 생활은 나에게 배 위에서 익혀야할 여러가지 기술과 관습뿐 아니라 인생의 여러가지 측면을 가르쳐 준다. 특히나 아메리카나 아시아의 이름만 듣던, 혹은 이름도 못 들어본 음식에 대한 경험담 같은 것은 귀가 자라나는 느낌으로 듣게 된다. 이런 공부를 화려한 궁전 안에서 어찌 해보겠나. 요리사로서는 정말 행운아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가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타들어 가지만···




가끔 콜드웰 선장과 둘이 갖는 식사시간은 내 인생에 대화의 즐거움이란 것을 깨닫게 해준 시간들이기도 했다. 콜드웰 선장은 말 그대로 풍파를 다 겪고도, 혹은 그래서인지, 인자함과 이해심이 넓은 사람이었다. 나도 나이가 더 들면 이런 어른이 되고싶다고 할만한. 


선장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간도 가지고 인생이란 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기도 했다. 궁정요리사의 화려한 위치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불안한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런 전락이 삶에 대해서는 새롭게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 인생의 아이러니다.


첫 기항지인 마데이라를 코앞에 둔 어느날의 저녁 식사 때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에 선장이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에 어렵게 자랐다오. 우리 아버지는 원래 아일랜드 출신으로 아메리카로 간 ‘계약하인(Indentured servant)’이었소.”


이제까지 마시던 맑은 클라레 와인이 아니라 독한 포트와인을 마셔서 평소보다 취기가 조금 돌아서였을까. 선장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계약하인이요? 선장님 아버님이 하인이었나요?”


계약하인이 뭔지 잘 모르는 나는 조금은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선장은 대개는 대를 이어서 하는 직업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소. 일반 하인과 계약하인은 좀 다르지요. 계약하인이란 유럽에서 아메리카 식민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이주방법 중 하나요. 가난한 사람들은 이민을 가려해도 뱃삯이며 정착비용을 마련할 수 없으니 아메리카에 정착한 부유한 식민지 주민들의 하인으로 계약을 맺고 가는 것이지요.”


“아, 신대륙으로 이주하는 방법이군요 계약하인이란.” 

“그렇소. 식민지의 주인이 비용을 다 대고 계약하인들은 일정기간을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는 거지요. 얼핏 일종의 노동계약 같지만, 실은 반쯤은, 아니 반 이상이 노예계약 같은 것이라오. 일반적인 노예와 달리 계약기간은 정해져 있고 임금도 받긴 하지만, 제공해야하는 노동의 종류나 시간 같은 것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입니다.”

“계약기간과 임금이 정해져 있으니 노예는 아니지만, 사람 자체를 노예 같이 부릴 수는 있다는 거군요.” 


어찌보면 큰 차이가, 어찌보면 별 것 아닌 차이가 있었다. 어쨌든 대가가 있고 끝이 존재하는 계약이라는 점에서는 노예보단 나았다. 하지만,


“그렇소. 이주는 물론이고 결혼도 주인의 허락 없이는 할 수 없소. 뭐 허락을 해준다한들 가난뱅이 계약하인에게 시집 오겠다는 여자는 어차피 없겠지만. 체벌을 하는 것도 허용이 됩니다. 하는 일이나 의식주의 처우는 흑인노예보다 나을 것도 없으니 한마디로 본국의 가난한 농사꾼들보다도 못한 생활이요. 그래서 계약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죽는 사람들도 많소. 하지만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에는 급료를 받지 못하지요. 이러니 하인보다는 노예에 가깝다는 탄식이 나오는 거지요.”


그러고보니 기억이 난다. 내가 살던 파리의 빈민가에서도 한 때는 이 계약하인 제도에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떠났으나 이런 현실이 알려지고나서는 최근에는 거의 가려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다. 아메리카의 농장주들도 더 싸게 더 마구 부릴 수 있는 흑인노예들을 선호하기도 하고 말이다.


“계약하인이란 계약기간 동안은 실은 흑인 노예보다 나을 것도 없소. 계약노예제라고 해도 좋을거요. 어쨌든 주인이란 사람들은 본전을 뽑겠다고 덤비니까, 그들에겐 백인의 목숨이든 흑인의 목숨이든, 같은 신을 믿는 기독교도이든 이교도이든 사실 별 차이가 없지요. 그들에겐 돈이 신이고 교회는 주말에 마음 편해지려고, 혹은 사업상 사교하러 가는 곳이란 말이요.”

“그래서 요즘은 가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들었습니다. 선장님 아버님 때라면 그 때는 프랑스나 스페인에서도 가려는 사람이 많았고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에서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갔다고 들었습니다.”

“글쎄, 확실히 희망을 품고 아메리카로 가려는 사람도 많이 있었던 모양이요. 우리 아버지도 그 중 하나였고.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의 사실상 식민지라서 귀족들조차도 불만이 많을 정도니까, 손바닥만한 땅도 없는 농민들이란 목숨을 걸고라도 대서양을 건너려고 했겠지요.”


콜드웰 선장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본국에서보다 나을 것도 없는 생활이라면서요.”

“그렇긴 한데 오로지 하나의 희망은 있었어요. 흑인이나 인디언 노예와 달리 이 계약하인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해방이 된다는 거지요. 그리고 일정한 보상도 있소. 우리 아버지 때에는 100에이커의 토지였소. 물론 농사를 지을만한 땅이 아니고 언제 짐승들이나 인디언들이 출몰할지 모르는 변두리 땅이지만, 농민에게 자기 땅이란 무엇보다 소중한 겁니다. 작은 땅이라도 있으면 가족들이 배고프지 않게 할 수는 있거든. 남자 인생에 그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소.”


그렇다. 그 얘기를 들으니 내 마음은 순식간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아, 마리와 삐에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프레데릭 왕세자님이 자상하게 챙겨주실 거라고 믿긴 하지만, 왕세자의 보살핌도 영국땅에 무사히 도착을 했을 때나 가능한 일인데 제 때에 도버에 도착을 할지 어떨지, 생활이야 어떻게든 꾸려간다고 해도, 다시 볼 수는 있는 것일까? 걱정을 하자니 앞뒤도 없이 근심거리가 쏟아진다.


선장이 내 기분을 알아채고는 위로의 말을 건내온다. 


“뻬뺑씨.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가족들 걱정을 시켰군요. 가장이란 건 가족들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는 게 책임이니까, 지금 상황에선 생각만 해도 마음이 탈 거요. 하지만 잊지 마시오. 당신은 최고의 요리사라는 걸. 그 요리솜씨만 있으면 어디 가서도 반드시 솟아날 길을 만들 수 있을거요."


그렇다. 나 오귀스뜨 뻬뼁은 최고의 요리사다.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즐겁게 하는 것을 보람으로 살아왔다. 세상에 배고픔이 있고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이 있는 한 오귀스뜨 뻬뻥은 쓸모가 있는 존재다라고 생각하니 마음에 다시 희망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메리카에서 나의 신세에 대해 불안감도 많지만 그곳에서 접하게 될 새로운 먹거리와 문화를 생각하니 마음이 설레기도 했다. 파리나 런던 같은 대도시 주변만 맴돌다 일생을 보내는 궁정요리사들은 생각도 못할 수준의 요리사가 되었다고 자부한다. 이제 넓은 세상을 모험하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익히면 최고 중의 최고가 될 것이다.


"당신은 유럽의 궁정에서 공연히 음식으로 멋이나 부리고 설탕으로 단맛이나 내는 그런 요리만 만드는 사람과는 다르오. 당신이 이제까지 여정에서 식재료와 각 지방의 요리를 배우려는 것을 보고 탄복했소. 당신같이 자기 일에 열심히인 사람은 분야를 막론하고 평생 살면서도 드믈게 보았다오. 당신은 이미 보통의 요리사들과는 다른 수준에 올라섰을 거요. 아메리카에 가게 되면 더 발전이 있겠지요. 그러니 절대 희망을 잃지 마시오. 절대로. 오귀스뜨 뻬뻥은 최고라는 말을 새로 정의해나갈 요리사니까.”


바로 그렇다. 최고 중의 최고, 사람들은 상상도 못해본 그런 경지에 오르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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