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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대양을 건너는 배에서의 연회란

Creativity under limitation.

대서양을 건너는 것은 빨라도 4~5주, 혹은 중간에 풍랑을 만나거나 한다면 몇 달까지도 걸릴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아예 도달 못 할 수도 있고. 이런 길고 위험한 여행을 앞에 두면 누구나 잠시 숨을 돌리고 몸도 마음도 잘 준비된 상태로 떠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스페인이나 포루투갈이 대항해 시대에서 유리한 것은 난바다로 나서면 바로 무역풍을 받고 아메리카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영국이나 프랑스의 대서양 방면 항구들이 있는 고위도대에서는 오히려 편서풍이 연중 불고 있어서 역풍의 항해를 해야하기 때문에 저위도 지방으로 와서 한 번 기착하는 것이 유리하다.


스페인 배들이라면 카나리아스 제도의 라스팔마스를 주요 기착항으로 삼는다. 스페인과 영국은 현재는 공식적으로 전쟁 중은 아니지만 대서양의, 더하여 이제는 태평양의 제해권까지를 놓고 겨루는 중이라 항상 긴장상태다. 입항해 있는 와중에 전쟁이라도 터지면 바로 배가 억류되거나 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술집에서 스페인 선원들과 시비가 붙는다거나 하는 정도의 일로도 운수 사나우면 큰 봉변을 당할 환경이다. 그러니 스페인령의 항구들은 기항지로 적합지 않다.


포루투갈은 대항해시대 초기에는 희망봉을 도는 인도무역항로를 최초로 개척하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아메리카 무역에서 한 발 뒤지면서부터는 다시 국세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이 위축된다기 보다는 다른 나라들이 추월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몇 번의 전쟁에서 줄을 잘 서서 거의 뭔가 소득을 챙겼음에도 점점 2류국가로 밀려났으니까.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앙숙이다보니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서 스페인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바로 그런 이유로 마데이라의 푼찰(Punchal)항을 영국 배들이 제 집 드나들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리스본으로부터 서쪽으로 1000킬로 정도나 떨어진 곳이니 대서양 횡단 기착지로 이곳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다.


세인트주드호가 푼찰항에 거의 도달했을 때였다. 기항지 가까이에서 잔잔한 순풍을 맞다보면 영국인들이 '젠틀 브리즈(gentle breeze)'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인지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바다의 위험과 뱃일의 고단함을 다 내려놓게 되는 그런 순간, 어찌보면 그래서 위험한 순간이다. 


순식간에 돌고래때들이 배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을 짓는 것 같은 돌고래들을 보기만 해도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긴장되고 지루한 항해에서 돌고래때를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선원은 없다.

돌고래들도 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뭔가 시끌벅적하게 반응을 보이는 것을 즐기는 것도 같다. 하지만 돌고래들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배의 선수가 바다를 가르며 일으키는 물보라를 타고 헤엄을 친다. 꼬리 지느러미로 중심을 잡으며 물 위에서 하얀 거품을 타고 쏜살같이 나가는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젏게 파도를 타고 거침없이 달려보고 싶었다.


"돌고래들이군."


뒤를 돌아보니 콜드웰 선장이 역시 긴장을 조금 놓은 듯한 얼굴로 흐믓하게 말했다.


"신기하네요. 뱃전에서 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리한 동물들이지요. 단순히 파도(wave)가 아니라 저렇게 하얗게 부서지는 물거품(serf)을 타야만 부력으로 파도 위에 떠서 앞으로 나간다오. 남아메리카 해안에 가면 갈대 같은 것을 엮어서 만든 보드를 타고 저렇게 움직인다오. 이동수단이기도 하지만 놀이로 하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경험 많고 해박한 콜드웰 선장의 설명이다.




리버풀에서 마데이라까지는 순풍을 타고 10일만에 도착했다. 기록적인 순항이었다고 한다. 


“더치들이 배는 참 잘 만든다니까.”


콜드웰 선장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 


나중에 선원들에게 들어 알게 된 것이지만, 네덜란드의 ‘이스트인디아맨’이라는 것은 배의 이름이 아니라 선급을 말하는 것이고, 동인도회사에서 인도나 중국으로의 원거리 무역용으로 만든 배들을 통칭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배는 넉넉히 천 톤이 넘는 화물을 실을 수 있는 크기라서, 대포도 40여문이나 싣고 있어서 단독항해에도 해적 걱정은 별로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검역이 늦어지면서 배에서 하루를 더 보내게 되었다. 오후에 검역이 시작되면 저녁 늦게 입항할 수도 있지만 선장은 서두를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정확히 말하면 선장이 아니라 푼찰항의 검역소 측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지만.


“포르투갈놈들, 영국배에는 항상 이렇게 시간을 끌지. 평소보다 며칠이나 일찍 왔으니 서두를 것은 없다. 오늘은 잘 쉬고 내일 아침에 입항한다.”


백발이 성성해도 이렇게 명령을 내릴 때는 위엄이 가득한 목소리다. 아마 포르투갈 항구 관리가 들었으면 조금 움찔 했을 거다.


보급품은 남아돌고 하루 밤을 바닷가에서 묵으며 입항을 기다린다. 나로서는 또 한 번 연회를 준비하게 되었다. 연회라고 하지만 배에서의 연회는 궁정에서의 연회와는 다른 점이 있다. 달라도 많이 다르다.


궁정에서는 말그대로 특별한 것이 필수다. 산해진미로는 이미 물려버린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이다 보니 뭔가 진귀하고 호화로운 식재료를 필사적으로 찾는다. 오르톨란(Ortolan)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솔직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개똥지빠귀나 아니면 메추리를 아르마냑에 마리네이드해주어도 뭐가 뭔지 잘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 맛의 차이가 그다지 큰 것은 아니니까.  게다가 버터와 송아지뼈 육수가 듬뿍 들어간 소스나 나무딸기를 설탕으로 졸인 꽁뽀뜨 같은 게 곁들여지면 솔직히 오르톨란이고 뭐고, 소스 맛으로 먹는 음식이 된다. 오래 숙성시킨 콩테 치즈나 샹베르텡 와인 같은 것이라면 몰라도, 비둘기보다 조금 큰 정도인 이 작은 새의 미묘한 맛과 향은 사실 오븐에서 나가서 식탁에 오르는 동안 대부분 사라진다. 남는 것은 아르마냑의 강한 향이라는 것이 진실일 것이다.


그러니 오르톨란 요리를 할 때마다 이 조그만 새가 불쌍하단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의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해 죽어가는 새들. 그럴때만은 그냥 기름기 자글거리는 쇠고기를 최고로 치는 무감성의 영국인들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정도다. 




음, 물론 그때 뿐이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영국 같은 곳에서 살게 될 줄은 당시로선 꿈에도 생각 못했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해먹을 수 있으니 망정이지 영국인들은 안 그래도 별로인 재료(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영국은 식재료도 참 별로다. 오로지 사과만은 훌륭하지만)를 더 맛없게 만드는 영국인 요리사들은 어디 구두방의 가죽 손질하는 일자리라도 알아보는 게 좋다고 생각을 한다. 


내 생각에 이런 무감각은 몇 가지 요소의 절묘한 결합이다. 

첫 째로 호사한 것을 죄악시 하는 성향이 있고, 둘 째로는 좋은 음식, 정성들여 맛과 멋을 낸 궁정 스타일의 요리를 별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로 영국인들은 책임감은 강한 반면 창의성이 부족하다. 뭔가를 충실하게 이행하고 팀워크를 짜서 움직이는 것은 프랑스인보다 훨씬 낫지만 무엇에 대해서 스스로의 생각을 가지고, 자기만의 방식을 실험해보려는 정신은 부족하다. 상점의 점원이나 청소 같은 일을 하는 하인이라면 모르겠지만 '스타일'을 중시하는 궁정요리사로서는 기본 성향 자체가 낙제들이다.  


그래서 왕실이나 돈많은 귀족들은 항상 프랑스인을 요리사로 고용하는데, 독일에서 온 군인출신의 하노버 왕가는 수석요리사도 독일인이라지. '조지왕의 군대가 강한 것은 왕의 식사와 병사들의 식사가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 이라는데, 국왕께서 스스로 화려한 연회 같은 것을 멀리하는 성향인 것은 확실하다. 이러니 이 오귀스뜨 뻬뻥이 요리하는 왕세자의 궁정에 외국 대사들이나 유력한 귀족들이 얼굴을 보이길 더 좋아하는 게 아니겠나.


어쨌든 진귀한 재료도 한계가 있는 법. 궁정의 연회에서는 요리와는 별 상관 없는 퍼포먼스가 곁들여지기도 한다. 설탕조각으로 사람 키만한 높이의 탑을 만든다거나 하는 것은 요즘은 애교에 속한다. 루이 14세 폐하 즉위 초년때만 해도 설탕이 귀해서 과시효과가 상당했지만 요즘은 한물간 유행 취급을 받고 있다. 


실은 바로 내가 이런 유행을 시대의 흐름으로 밀어내고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베르사이유의 수석요리사가 이제는 안 한다고 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서서히 다른 귀족들의 주방에서도 설탕조각은 촌스러운 것이 되어가고, 오래지 않아 아무도 하지 않는 그런 것이 된다. 그런 것이 프랑스 왕국의 수석요리사 자리가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궁정요리의 화려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큰 새를 구운 요리의 배를 가르니 작은 새들이 날아오른다거나 와인 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었다는 둥의 전설같은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나도 궁정요리사지만 이런 허세 가득한 퍼포먼스는 딱 질색이다. 음식은 음식다와야 하고, 시각이나 촉각도 물론 무시할 수 없으나 음식의 감상에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미각과 다음으로 후각이 가장 중요한 감각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각이 우선인 것은 요리가 아니라 미술이 되는 것이고.


단적으로 눈 먼 사람이라도 음식을 즐길 수 있지만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게 어렵지 않겠나?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도 좋은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할 수는 있지만 눈이 멀어버렸다면 그런 예술을 하기 아주 힘든 것처럼 말이다. 화려함이란 대체로 재료의 희귀함을 넘어서면 시각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런 건 요리사가 과하게 고민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 한다. 


과도한 웅장함과 화려함을 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첫 째로 어마어마한 낭비이기 때문이고, 둘 째로 권위로 사람을 위압하는 그런 방식이 싫기 때문이다. 


'짐이 곧 국가다 (L'Etat, c'est moi).'


라는 말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하시던 '태양왕(Le Roi Soleil)' 루이 14세 폐하께서는 연회를 군주의 위엄을 보여주는 자리로 생각하셨다. 그래서 언제나 화려하고 사람들의 기를 죽이는 그런 자리를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셨다. 그에 비해서 '선량왕(Le Bien-Aimé)'이라는 별명이 붙은 루이 15세 폐하는 그런 대단하고 위압적인 분위기를 싫어하셨다. 


그렇다고 선왕께서 하시던 방식을 이렇게 바꾸라 저렇게 바꾸라 하신 것은 없지만,  젖먹이 왕증세손 시절부터 곁에서 모셔온 나로서는 폐하께 가장 어울리는 것은 어떤 것일까 늘 고민하고 그에 맞춰서 개별 요리도 개발하고 연회릐 계획도 짜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 것이 로코코 스타일이고 말이다.  




궁정의 로코코는 그렇다 치고, 다시 세인트주드호의 겔리로 돌아오자. 


배의 음식의 경우에는 궁정의 화려함과는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장거리 항해를 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있을지 모르니 모든 음식은 저장성이 좋은 것을 우선으로 하고 그것도 아끼고 아끼는 것이 모든 배의 주방장들의 습관이다. 나도 그렇게 운영을 해왔지만 이제 내일은 상륙이다. 어차피 푼찰에서 모든 것을 새로 보급해야 하는 상황이니 아끼는 것이 아니라 빨리 다 써버리는 것이 목적이 되었다. 


대단한 화려함을 추구할 것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안 된다. 실은 선원들이야 그저 남은 보급품을 거하게 풀어서 배불리 먹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음껏 마실 수 있게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푼찰항은 이렇게 큰 배가 입항하기엔 좀 까다롭다오. 그러니 다음날 정오 전에는 사람구실들을 할 정도로만 마셨으면 좋겠는데...'


골드웰 선장의 걱정어린 당부도 있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어차피 육지에 내리면 신선한 채소와 고기, 술을 마음껏 먹고마실 수 있는데다가 이쪽도 순항으로 풍족하게 남은  보급품을 ‘탕진’해야하는 것이다. 이런 탕진잼을 극대화 하면서 배에서도 좀 더 좋은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선원들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보존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보급품의 구성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런 식재료들을 다루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서는 훨씬 멋진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요리들을 개발할 참이다.

 

그 요리를 페드로에게 전수하면 내가 이 배에서 내릴 때에도 세인트주드호의 선원들은, 아니 어쩌면 이 배에서 시작하여 모든 뱃사람들이 좀 더 좋은 음식들을 먹으며 힘든 항해를 견딜 수 있게 하자는 것이 나의 희망인 것이다.


자 이제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구상해볼 차례다.


나는 스턴(Stern, 배 뒷편)으로 가 난간에 걸터앉아 기우는 석양을 마주했다. 좋은 요리사는 머리속으로 그리는 것들과 실제로 구현되는 것의 차이가 적다. 많은 경험과 감각으로 상상만으로도 어떤 요리는 어떻게 할 지가 현실과 거의 차이가 없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런 고도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혼자만의 집중이 필수다.


흔들 거리는 배위에서 대서양으로 기울어가는 태양을 안고는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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