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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terego Apr 08. 2019

스펙보다 스펙타클한 스토리

오스트랄로 스펙쿠스에서 호모 스토리스로

  오늘날 청년실업은 심각한 사회적 이슈다. 밤늦게 노량진 학원가를 지날 때면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도 취준생들로 북적북적하다. 젊음이 휘발되는 근심 가득한 거리다. 청춘이란 ‘뭐든지 다 할 수 있는데, 뭐든지 할 수 없는 것’ 이라는 어느 취준생의 인터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입에 문 담배처럼 마음은 타들어가고 현실의 장벽은 높게만 보인다. 뿜어낸 연기에 깊은 한숨을 숨겨본다. 바람은 근심까지 날려버리진 못한다. 그들은 어두운 밤보다 더 어두운 얼굴을 하고 가방을 들어 또 어디론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하고, 가장 우수한 토익점수를 보유하며, 가장 스마트한 기기를 다루는 세대인데 직업은 백수다. 백마탄 백수가 따로 없다. 살면서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커보니 밥벌이는커녕 눈칫밥으로 연명한다. 황당하고 억울하다. 로또 밖에 답이 없다고 한다.


청춘이 말하는 청춘의 정의는 안타까운 현실을 반영한다


  청년들이 만들어낸 자조 섞인 단어들은 이 시대 청년실업상을 반영한다. 청년백수 전성시대라는 ‘청백전’ 을 시작으로, 20대 태반이 백수라는 ‘이태백’, 인문계 졸업생 90% 가 논다는 ‘인구론’, 자기소개서 작성 공포증에 시달리는 ‘자소서포비아’, 소설로 지어 쓰는 ‘자소설’, 서류 합격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서류가즘’ 등등.


  이런 해학은 애환을 품었다. 암담한 현실 속에 힘없는 청년들의 소박한 시위다. 흥 속에 숨겨진 한을 살피고 보듬어줘야 한다. 하회탈처럼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은 슬프기만 하다. 나라의 높은 양반들이 알아줄 리 없지만.


  이미 막장테크를 탄 청년실업의 세태를 우리가 당장 어떻게 바로잡을 수는 없다. 정치적 로비 능력이 없는 시민은 힘없이 당할 뿐이다. 여의도 계신 높은 양반들이 설국열차 뒷칸을 알아줄 리 없다. 고사리손으로 고시래 투표해봤자 결국 그 놈이 그 놈이고,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선거 때 믿고 거르는 이름이 한둘이 아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다를까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다. 위장전입, 세금탈루, 병역면탈, 부동산 투기 등을 경력처럼 쌓아왔다. 이게 출마 요건인지 헷갈릴 정도다. 더한 사람을 출마시켜 덜한 사람을 고르도록 한다. 오줌과 똥의 대결이고, 하수구와 시궁창의 승부다. 기권은 암묵적 동조이기에 최악을 피해 차악이라도 찾아본다. 하지만 선택지는 개차반. 기표소에 들어가 찍지 못해 나오질 못한다. 똥맛 나는 카레냐, 카레맛 나는 똥이냐 선택하기 더럽게 어렵다.


선거를 통해 뭔가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덧없다


  궁지에 몰린 청년들이 찾은 나름의 방편은 스펙으로 경쟁력을 쌓는 것이었다. 스펙은 영단어 Specification 의 준말로 개인의 능력을 보여줄 학벌, 성적, 경력, 자격증, 과외활동 등을 총칭한다. 한마디로 지원자의 ‘사용설명서’ 다. 스펙은 선발하는 입장에서 보면 일면식도 없는 지원자를 평가하는 객관적 지표이기에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스펙에 대한 불명확한 가이드가 오늘날 청년들의 과도한 스펙쌓기를 초래했다.


  일단 스펙에서 밀리면 면접 기회 자체가 없다. 그러니 뭐라도 남들이 가진 스펙 이상은 갖추고 봐야 할 것만 같다. 세상은 등호보다 부등호를 원하니 더 많은 만리장스펙으로 우위를 점해야 할 것만 같은 거다. 요즘 세간에 알려진 취업 9종 세트란 학벌, 학점, 토익, 어학연수, 자격증, 공모전, 인턴경력, 사회봉사, 성형수술이다. 편입을 통한 학벌세탁, 빚 내서 다녀오는 어학연수, 팔자에도 없는 극기훈련 등 천태만상이다.


  다행히 최근 기업들은 과열된 취업준비의 폐단을 인지하고 채용 프로세스를 수정하고 있다. 직무능력과 무관한 증명사진, 부모직업, 어학연수, 봉사활동, 극기경험 등을 지원서에서 삭제하고 잉여스펙은 반영하지 않는 추세다. 지원자를 호구로 보던 호구조사도 없애고 이름, 성별, 나이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심사를 도입 중이다. 결국 남는 것은 직무관련 역량과 경험이며, 이는 삼성, 현대, LG, SK 등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도 강조하는 부분이다. 이제 이렇게 좁혀진 항목 내에서 지원자들은 어떻게 자신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변화하는 채용 프로세스에서 어떻게 자신을 보여줄 수 있을까?


  스펙을 넘는 스펙타클한 스토리에서 그 답을 찾는다. 잘 구성된 자신만의 스토리는 대체 불가한 경쟁력이다. 직무 역량과 착실히 연결된 참신한 스토리면 더할 나위 없다. 스토리는 목적에 맞게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면 강력한 셀링 포인트가 된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차별화 포인트다. 동일한 스펙은 갖출 수 있어도 동일한 인생은 가질 수 없기에 고유하다.


  스토리텔링은 취업전선에서 자신을 부각하고 각인하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딱딱하고 차가운 종이 위 스펙과 달리 스토리에는 호소력 짙은 따뜻한 입김이 묻어있다. 입체적인 스토리는 단편적인 스펙보다 더욱 오래 기억된다. 우리의 뇌는 누군가를 기억할 때 그 사람과 관련된 스토리를 먼저 기억해내는 경우가 많다. 이름보다 일화가 선명하다.


  그런 스펙타클한 스토리는 어떻게 만들까? 매력적인 스토리를 이끄는 쌍두마차는 의외성과 진정성이다. 의외성에 혹하고 진정성에 빠져든다. 소개팅에서 호감 가는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그런 매력 있고 듣고 싶은 이야기는 걷고 싶은 거리와도 닮아있다.


  내가 좋아하는 연남동 거리는 의외의 볼거리와 진국인 가게들로 발길이 즐겁다. 멋과 맛이 공존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그 안에 있다. 예상치 못하게 마주하는 재미난 벽화와 개성 넘치는 인테리어에 시선을 뺏기곤 한다. 특별한 목적 없이 거닐어도 우연한 발견에 대한 기대에 지루함이 없다. 낯선 골목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새로운 생각과 만난다.


  생계 아닌 신념으로 운영되는 진짜배기 가게들도 곳곳에 숨어있다. 프렌차이즈의 공습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리를 지켜냈다. 공방의 소품과 맛집의 요리에는 만든 이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런 곳들을 발견할 때면 세렌디피티 (Serendipity) 의 희열을 느낀다. 우리의 스토리도 의외성과 진정성을 갖추면 듣는 이에게 세렌디피티를 선사할 수 있다.


연남동 골목은 의외성과 진정성으로 Serendipity 가 있다


  의외성은 논외의 영역에서 번외의 사건으로 발생한다. 악곡의 연주에서 악상의 변주와도 같다. 실수 같은 인생에 허수를 두는 것도 방법이다. 가끔은 무리한 요청도 받아들이고 정도에서 벗어난 길을 걷는 사이 만들어진다.


  류현진의 도루나 로드맨의 3점슛 같은 신선한 맨붕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평창 가려다 평양 가버린 어느 케냐인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통속과 신파로 뻔한 이야기보다 Fun한 스토리가 기억에 남는다. 의외의 한 수는 신의 한 수가 되기도 한다.


  한편 의외성은 진정성이 결여되면 급격하게 호소력을 잃는다. 신념에 기반한 도전과 그 이야기는 멋지고 아름답지만, 거짓된 의도와 속물적인 꿍꿍이는 추잡하다. 금지약물 복용한 운동선수처럼 배신감만 안긴 채 마음을 돌아서게 만든다. 스펙 채우기 위한 영혼 없는 학위, 자격증, 봉사활동, 어학연수, 극기훈련 등이 그렇다.


  스토리는 수많은 오늘이 차곡히 쌓인 결과다. 구몬학습처럼 벼락치기로 될 게 아니다. 한 문장을 말할 수 있기까지 수많은 날들의 증거가 필요하다. 흔히 내뱉는 “최선을 다했다” 는 말도 결코 쉽게 할 수 없는 거다. 진짜 식은땀 나고 쓰러질 때까지 해본 과정이 없다면. 뭔가를 “간절히 원한다” 는 말도 마찬가지다.  악물고 덤빈 시도가 없다면.


  대부분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다. 그냥 대충 원하지. 아가리 파이터들이 널렸다. 잠재력을 끌어내 성취하기보다 잠과 재력을 따로 취하려고만 한다. 증거가 인멸된 말로는 결코 진정성 있는 스토리가 나오지 않는다. 어렵고 힘들지만 오늘이 미래에 회자될 성공의 스토리 중 일부임을 생각하며 착실하게 나아가자. 기타의 부드러운 선율은 굳은 살이 만들어낸 결과다. 발레의 아름다운 자태는 상처난 발이 일으켜과다. 그렇게 진실된 하루를 쌓아가면 결국 멋진 스토리를 말할 수 있게 된다.


  스티브 잡스 (S. Jobs) 의 2005년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는 우리에게 스토리에 대한 혜안을 제시한다. 그는 대학을 6개월 만에 자퇴하고 호기심을 따라 타이포그래피 (활자의 서체와 배열을 다루는 분야) 를 독학하는 의외의 선택을 했다. 그러한 선택은 10년 후 매킨토시를 만들 때 컴퓨터에 예술성을 불어넣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관련이 1도 없어 보였던 타이포그래피와 컴퓨터는 마침내 접점을 찾았고 세상을 바꿔놓았다.


  예술과 기술이 융합된 애플의 혁신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처음에는 그도 서로 다른 두 점의 연결을 알지 못했다. 그때그때 옳다고 믿는 신념을 따라가다 보니 결국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 흩어진 점들을 잇는 ‘connecting the dots’ 에 대한 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스티브 잡스는 좋은 스토리를 만드는 혜안을 제시한다


  스펙의 시대가 가고 스토리의 시대가 온다. 스토리가 리스펙 받는 세상이다. 오스트랄로 스펙쿠스에서 호모 스토리스로 진화할 때다. 스토리는 살아갈 계획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재료로 만들어진다. 좋은 스토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참신하고 진실된 재료를 만들어놓는 것이다. 평소에 재료가 되는 경험의 데이터베이스를 차곡차곡 쌓아두면 훗날 다양하게 연결될 수 있다.


  쓸데없는 경험은 웬만해선 없다. 딴짓은 일상을 깨우고, 뻘짓은 인생을 채운다. 자의든 타의든 경험하는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와 복선이 있다고 믿는다.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우연이란 수많은 필연적 동기들로 만들어진다. 다양하게 받아들이면 다양한 연결고리를 찾게 될 것이다. 먼저 가본 길을 통해 후배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증언은 하나다. “It will pay off in the end. Yes, it really do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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