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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terego Apr 16. 2019

남 앞에 서기 두려운 당신에게

떨림이 설렘이 되기까지

  MIT 대학원 1년차 때 일이다. 내가 속한 전자과에서는 매년 연구성과를 공유하는 학회를 연다. MARC (Microsystems Annual Research Conference) 라고 불리는 이 내부 성과 공유회는 집안 잔치지만 성과의 면면이 워낙 출중해 Intel, IBM, TI, Analog Device 등 기업의 중진들도 참석하는 중요한 행사다. 유명한 MIT 교수들과 잘나가는 업계의 중역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니만큼 그 수준은 이 분야 최전선을 간다.


  미국에서 나의 첫 발표는 이런 빡센 자리에서 이뤄졌다. 그렇다고 긴 연설은 아니었고 짧은 90초 발표였다. 학회 기간 중 학생들은 전시장에서 각자의 연구주제를 포스터로 전시하게 되는데, 학회 첫 날은 200여명 되는 참석자가 모두 모인 가운데 한 명씩 연단에 올라 자신의 연구성과를 90초 동안 홍보한다. 이제 막 미국땅 밟은 동방의 코흘리개가 세계적인 거장들 앞에서 학술적인 이야기를 그것도 영어로 하려니 눈앞이 캄캄했다.


미국에서의 첫 발표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데뷔전을 즉흥으로 나가서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 많은 초짜들이 그렇듯 스크립트를 쓰고 달달 외웠다. 90초는 생각보다 훨씬 짧은 시간이라 말할 수 있는 문장이 몇 개 안되더라. 그만큼 핵심만 간결하게 말해야 했다. 사전을 찾고 인터넷을 뒤지며 문법과 표현을 점검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하며 장고 끝에 스크립트를 완성했다. 그리고 기숙사 방에서 혼자 우물거리며 연습에 연습을 더했다.


  발표 당일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학생들이 하나 둘 연단에 올라 발표하기 시작하는데 순번이 한참 남았음에도 두 손에 땀이 흥건했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바이킹 내려갈 때 느껴지는 내리가즘에 아랫배가 이상했다. 오한까지 생겨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다른 학생들 발표 따위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나의 대사들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나를 봤다면 대사에 몰두한 모습이 좀 웃기고 안쓰러웠을 거다. 어느새 바로 앞 순번이 발표를 마치고 내려갔다. 이제 내 차례다. 후덜덜.


  연단에 올라 발을 내딛기 무섭게 엄청난 시선의 집중이 나를 눌렀다. 수많은 눈들이 제각기 힘을 가진 기를 뿜었다. 살아있는 기 (살기) 를 느꼈다. 연단 아래에서 발표자를 보는 시점과 연단 위에서 청중을 보는 시점은 완전히 다르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굉장히 낯설고도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무대 중앙에 서서 발표를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오른쪽 다리가 제멋대로 후들거렸다. 생전 처음 오금이 저렸다. 지리는 무대공포란 이런 건가. 무대조명은 나를 데우고 이마에는 땀이 비 오듯 했다. 겨드랑이와 팬티 허리춤까지 축축해졌다.  


처음 무대에 서서 바라본 시점은 굉장히 낯설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내 얼굴에 모아진 눈과 내 입가에 모여든 귀를 어떻게든 쳐내야 했다. 일단 수없이 반복한 도입부로 첫 문장을 밀어냈다. 목소리는 떨림으로 가득했고 스피커를 통해 나도 긴장한 내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청중의 집중과 적막은 엄청난 압박이었다.


  이제 두 번째 문장을 말해야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할 단어가 생각나질 않았다. 머리가 하얘져 스크립트 내용이 지워졌다. 이런 젠장. 하지만 어색함을 방관하고 침묵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크립트를 치우고 포스터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안에 삽입했던 그림들을 떠올리며 떠듬떠듬 프리스타일로 90초를 때웠다. 10점 만점에 2점으로 쉴드 치기도 민망한 부끄러운 발표였다.


  그날의 발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내게는 잊지 못할 충격이 됐다. 자괴감과 함께 내가 부족한 능력이 무엇인지 처절히 깨닫는 계기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의 흑역사가 있어 오늘날 강연하는 내가 있다. 내 강연의 이유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위한 나눔이지만 자신을 위한 채움 때문이기도 하다. 홍대 앞 버스킹과도 비슷하다. 지금도 남 앞에 서기는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그 자리에 선다.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는 수천 명 앞에서도 강연하고 수많은 국제 학회에도 출격한다.


  사실 나는 선천적으로 발표에 적합하지 않은 형질을 타고났다. 주위의 이목에 얼굴이 금새 빨개지는 수줍음 체질이다. 아버지는 무대 체질이기에 아마도 부끄럼 많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형질이다.


  누군가 나를 칭찬하든 질책하든 어떤 이유에서든 그로 인해 시선이 집중되면 무조건 몸이 반응한다. 별일 아닌데도 말이다. 신체가 위급할 때 작용한다는 교감신경이 멋대로 작용한다. 혈관을 넓히고 심장을 펌프질해 얼굴로 혈액을 밀어 올린다. 얼굴에 피가 순식간에 몰려와 붉어지고 뜨거워진다. 누군가 “얼굴 빨개졌다” 말 한 마디면 더 빨개진다. 쪽팔려서 숨고 싶은데 얼굴이 붉어져 주목을 더 받게 되는 몹쓸 피드백이 돌아버린다.  


나는 얼굴이 쉽게 빨개지는 몹쓸 체질을 타고났다


  얼굴 붉힘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면 혼자 있는데 얼굴이 붉어지진 않는다. 사회적으로 관계하고 교감하는 사람이 있을 때라야 얼굴이 반응한다. 인간임을 증명하는 표식인데 왜 놀림거리가 돼야 하는지 조세호처럼 억울하기도 하다.


  주변 사람들은 붉어지는 얼굴에 친근함을 느끼고 경계를 늦춘다고는 하나 사회적 동물이 사회생활을 해나가는데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른다. 붉어지는 얼굴을 어찌해보려 관세음보살을 외는 등 여러 시도도 해봤지만 도로아미타불 다 소용없었다. 어머니의 핫 플래시처럼 불가항력의 영역이다. 인간은 영락없는 호르몬의 노예다.


  하지만 나는 도피보다 현실에 뛰어들었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주목에 당당하기로 했다. 이목이 쏠려도 빨개지면 빨개지는 대로 감추지 않았다. 변해봤자 얼굴색이지 아연실색 아니다. 내 얼굴보다 내 말에 주목할 수 있도록 말에 더욱 집중했다. 그러는 사이 얼굴은 자연스럽게 평정을 되찾았다. 이제는 이런 다이나믹한 내 얼굴색에 익숙해져 긴장과 두려움 때문이 아닌 설렘과 기대감 때문이라고 뻔뻔하게 얘기한다. 얼굴은 두껍게, 말투는 초연하게, 자세는 호연하게, 안면몰수하고 후안무치로 대응한다.


  강연요청도 일정만 맞으면 전부 받았다. 사람들 앞에 설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다. 2013년부터 한국고등교육재단 주관 청소년 강연 프로그램인 ‘Dream Lecture’ 의 연사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료 강연을 진행 중이다. 회사에 재직 중인 사유로 휴가를 내거나 주말에 시간을 쪼개 틈틈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회사에서 칙칙한 아저씨, 아줌마만 보다 발랄한 학생들을 만나면 오히려 내가 힐링 되기도 한다. 그 밖에도 삼성 주관 사회공헌활동인 ‘드림樂서’ 에서 2천여명 청소년 앞에서 강연했고, 소외계층이나 저소득층 자녀를 대상으로 강연봉사도 해왔다. 후배 임직원들에게 회사생활에 대해 강연하는 자리도 있었다.


2013년부터 전국의 청소년들에게 강연 봉사를 해오고 있다


  내가 불편함을 이겨내는 방법은 나를 계속해서 불편한 상황에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익숙해지거나 이겨내거나 둘 중 하나다. 무인도에 불시착하면 어떻게든 정착하거나 살아나갈 방법을 찾게 된다. 닥쳐야 하는 인간의 습성을 잘 알고 있다.


  강연 수락까지 깊이 고민하지 않는 이유도 그렇다. 냅다 수락하고 거기에 나를 던져 놓는다. 강연을 준비하고 남 앞에 서기까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지만 이래저래 해내고 나면 그보다 더 큰 성취감이 스트레스를 날려버린다. 그리고 주목 받는 자리가 조금은 편해진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조금씩 불편함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당연히 한 번에 잘 되지는 않는다. 바보 같았던 MARC 에서의 첫 발표처럼 시행착오를 거치며 점점 덜 바보 같아질 뿐이다. 마음처럼 되지 않지만 점점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도 강연이 끝나면 돌아오는 길에 내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아쉬웠던 부분을 셀프 디스한다. 족함에는 늘 부족함이 있다. 그렇게 수십 번 고치고 다듬다 보니 조각되어 여기까지 왔다.


  비 온 뒤에 땅이 굳고, 찢어진 근섬유가 근육으로 자라듯 그렇게 내 맨탈도 제법 단단해졌다. 이제는 박수소리가 들린다. 선망의 눈망울도 보인다. 무대 위에서 귀가 들리고 눈이 보이니 나도 즐겁다. 그렇게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간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 중 하나는 거기에 뛰어드는 것이다


  나 같은 수줍음 체질이 남 앞에 서는데 알아두면 쓸데있는 몇 가지 팁을 공유하고자 한다. 실전에서 검증한 경험에 근거한다. 회의, 면접, 강연, 데이트 등 다양한 상황에 적용해볼 수 있겠다.


  첫째, 상대의 눈을 보는데 부담을 느낀다면 대신 코를 보고 말한다. 소통의 기본은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며 특히 눈을 보고 말할 때 진정성이 느껴진다.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자동문처럼 열리는 감정이 서로의 솔직한 속내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떨리고 수줍은 마음까지 상대에게 전부 내보이고 싶지는 않다.


  이 때는 코를 본다. 임시방편으로 코를 보면 상대로 하여금 눈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주면서 동시에 나의 동요하는 마음은 들키지 않을 수 있다. 다행히 코는 눈처럼 감정을 투영하거나 교감을 시도하지 않는다. 기쁜 눈, 슬픈 눈은 있어도 기쁜 코, 슬픈 코는 본 적이 없다. 이처럼 코는 기능적이고 객관적인 기관이기에 안심하고 내 말에 집중할 수 있다.


  다만 코만 보고 말해선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다. 마음이 평정을 찾으면 다시 눈으로 돌아가야 한다. 눈으로 상대의 감정을 살피며 그에 맞게 반응해야 다. 그렇게 시선을 눈과 코에 번갈아 주며 소통한다. 번외로 안경을 벗거나 렌즈를 빼서 의도적으로 시력을 흐리는 방법도 있으나 (해봤으나) 진정 봐야 할 것을 못 보는 불편이 있어 추천하지는 않는다.


눈이 부담스러우면 코를 보고 말한다


  둘째, 내가 확실히 알고 대화를 끌어갈 수 있는 내용을 이야기한다. 자신은 확신에서 나오고 당당함은 떳떳함에서 비롯된다. 잘 모르는 내용에는 말이 짧아지고 구체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고 임시변통의 아무 말이나 하게 된다. 얼굴과 몸짓에는 어눌함과 허술함이 드러나고 어휘와 표현에는 무지함과 무뇌함이 묻어난다. 질문공세에 몰려 당황하면 말문이 막히고 패닉한다.


  반면 내 얘기나 내가 충분한 시간을 들여 알게 된 얘기는 힘이 있고 믿음이 붙는다. 그런 내용은 내가 주도권을 갖고 안정적으로 얘기할 수 있다. 흐름은 내 것이며 높은 점유율로 무대를 장악한다. 다양한 사례를 댈 수 있고, 질문은 예상 가능하며, 농담도 곁들이게 된다. 어느새 주머니에 손 넣고 짝다리 짚는 여유도 생긴다. 각본에 없던 애드리브로 이야기는 재미를 더한다. 결국 내가 말하기 편하다. 말하는 사람이 편하면 듣는 사람도 편하다.



  셋째, 이야기하게 될 환경을 미리 숙지한다. 특히 장소와 상대를 사전에 파악한다. 실전에서 ‘내가 어디에 서게 될지?’, ‘내가 누구에게 말하게 될지?’ 를 유념해두어야 한다. 그래야 막상 막이 올랐을 때 당황하지 않는다. 시각적으로 친숙한 장소에서 심리적으로 익숙한 대상을 상대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하다. 홈 코트에서 경기하듯 능숙하게 시선을 이겨낸다.


  나는 강연이나 면접이 있으면 그 전날 직접 현장에 가보거나 당일 30분 정도 일찍 도착해 강연장이나 면접장을 미리 둘러본다. 수능 예비소집이나 공연 리허설과 같은 거다. 강연장이 비어있으면 실제 무대에 올라 눈에 보이는 광경을 담아둔다. 면접장이 비어있으면 잠시 들어가 의자에 앉아 분위기를 살핀다. 눈앞에 청중과 면접관이 있다고 가정하고 미장센을 완성해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본다. 그러면 조금은 내게 익숙한 장소가 된다. 몸이 풀리고 긴장은 완화된다. 시간이 될 때까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반복적인 연습도 가능하다. 요새는 VR 기술로 가상 공간에서 가상 청중을 직접 앞에 앉히고 발표까지 해볼 수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새로운 만남은 상대를 미리 알고 가면 덜 어색하다. 소개팅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강연 전에 주최측에 꼭 물어보는 것이 청중에 대한 정보다. 청소년 대상 강연에서는 연령, 성비, 학교 공부환경 등을 미리 파악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나를 먼저 그들에게 친숙하게 만든다. 인터넷을 통해 학교정보, 뉴스기사, 졸업생 현황, Youtube 영상 등을 검색하고 1~2 페이지 자료로 만들어 강연 초입에 보여주기도 한다. 학생들은 자신들 이야기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나를 좀 더 가깝고 친근한 눈으로 맞아준다. 이렇게 시작이 풀리면 강연은 말리지 않는다.


환경을 미리 파악하면 강연은 훨씬 수월하다


  사회심리학자인 Amy Cuddy 는 그녀의 유명한 TED talk 에서 “Fake it till you become it” 라는 명언을 남겼다. 내가 바라는 모습대로 행동하며 스스로를 속이면 결국 그 모습이 내가 된다. 한 번 속이는 것이 아닌 완전히 그렇게 될 때까지 속이는 거다.


  남 앞에 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힘들면 달의 뒷면처럼 숨기자. 보이고 싶은 면만 보이며 인위적으로라도 당당하게 서본다. 자신감은 내가 취하는 자세의 면적에 비례한다. 포커페이스로 자신을 속여 자신을 만들어 낸다. 많은 연습이 필요할 거다. 다만 남을 속이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속이는 건데 죄책감 없이 얼마든지 해볼 수 있다. 떨림이 설렘이 되는 그날까지 Let’s do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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