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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terego May 31. 2019

행복, 그것이 알고싶다

당신의 안녕감은 안녕하신가요

  사는 게 참 편해졌지만 사는 게 참 행복하지만은 않은 세상이다. 풍요 속 빈곤과 풍류 속 피곤을 동시에 경험한다. 분명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는데 정신적으로는 빈곤하다. 확실히 즐길 것은 많아졌는데 막상 즐기려니 골치가 아프다. 소득이 오르니 근심도 늘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지만, 걱정을 하면 걱정이 늘어나서 걱정이 태산이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이 천년치 걱정을 하고 산다.


  모두가 행복을 소원하지만 대부분 그것과 소원하다. 모두가 행복을 바라지만 대부분 그것을 바라보기만 한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는데 개똥도 찾으면 없다고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성공했지만 불행하다고 말한다. 도대체 행복이 뭔지 모르겠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세상에 많이 출판되는 도서 순위에 행복 지침서는 빠질 수 없다. 행복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표지를 달리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같은 듯 다른 말로 가르쳐준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행복을 찾는다. 그만큼 보고 읽었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나 보다. 그럼에도 행복에 대한 책은 계속해서 출판되고 또 꾸준히 잘 팔린다. 술이나 담배처럼 그것이 독자들에게 일시적으로나마 행복을 선사하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시중에 베스트셀러 1위는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곰돌이 푸가 행복이 결핍된 독자들에게 “매일 행복하진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라는 차분한 조언과 위로를 전한다. 행복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다는 말처럼 시점과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겠다. 동화책 같은 삽화와 문구로 내용은 유아틱 하지만 마음은 푸근하고 푸우하다. 어쩌면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비로소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깊은 메시지를 전하는지도 모른다. 1926년 세상에 태어나 올해 92세인 곰돌이 푸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짚어주는 행복에 대한 영감이다.


곰돌이 푸가 알려주는 행복론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 <랑겔한스섬의 오후> 에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나온다. 작(小)지만 확(確)고한 행(幸)복이라는 뜻이다. 그는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된 속옷이 잔뜩 쌓인 것을 보거나, 막 새로 산 하얀 런닝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 쓸 때 소확행을 느낀다고 했다. 오늘날 대입, 취업, 결혼 등 굵직굵직한 굴곡을 넘어야 겨우 얻는 빡센 행복은 인기가 없어졌다. 하교 길 친구와의 수다, 퇴근 길 맥주 한 잔, 적금 만기, 1+1 행사 같이 일상의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대세다. 쉽게 소환해 수확할 수 있는 자기만족적이고 멘탈방어적인 self 행복이다. 다만 허기진 행복을 속이기 위한 궁색한 훼이크는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는 소확행


  법륜 스님은 <즉문즉설> 강연에서 “행복은 무엇인가?” 에 대해 “괴롭지 않은 것” 으로 설파한다. 우리가 으레 생각하는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은 행복이 아닌 쾌락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건 지속 불가능한 반쪽짜리 감정이라는 것. 기분 좋으면 반드시 기분 나쁜 때가 있고, 즐거우면 반드시 괴로운 때가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는 함께 공존한다. 때문에 기분 좋고 즐거운 것을 행복의 잣대로 삼으면 필연적으로 불행을 맞보게 된다. 결국 ‘괴롭지만 않으면 행복하다’ 는 것이고 맘 비우고 내려놓는 구도자적인 견지다.


법륜 스님의 행복에 대한 정의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은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을 배경으로 한다. 행복동은 작품 속 공간인 줄 알았는데, 녹색 검색창에 ‘행복’ 을 쳐보니 전라남도 목포시 행복동이 나온다. 작품의 배경과 같은 장소는 아니겠지만 행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동네가 실존한다니 신기했다. 붕어빵에 붕어는 없지만, 행복동에 행복이 있을까? 실제로 작년 여름 KTX 를 타고 당일치기로 다녀왔다.


  목포역에서 바다가 손짓하는 방향으로 십여 분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작은 항구 동네였다. 뒤에는 유달산이 위치해 배산임수에 입지한 한적한 촌락이었다. 그곳에서 욕심이라곤 찾을 수 없는 순박한 사람들과, 부심이라곤 관심도 없는 소박한 가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개항기 유적지가 근처에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특별할 것 없이 차분한 일상이 숨쉬는 곳이었다. 행복한 인생은 그 의미를 묻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면 그렇게 묻지도 찾지도 않는 일상 자체가 행복인지도 모른다.


전라남도 목포시 행복동


  이렇듯 저마다의 관점으로 행복에 대해 같은 듯 다른 말을 한다. 누가 완전히 맞지도 틀리지도 않다. 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한마디로 아리송하다. 상사에게 보고라도 한다 치면 정리되지 않아 깨지기 딱 좋은 상태. 뭔가 체계적인 정의와 아우르는 개념이 있으면 좋겠다. 이런 부분은 학계가 전문이다. 학자들 목소리에 귀 기울여본다.


  이 구역 전문가인 심리학자 에드 디너 (E. Diener) 는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 (Subjective Well-being) 으로 정의한다. 생각해보면 절묘하게 적절한 표현이다. ‘주관’ 이란 자신의 견해나 관점을 뜻하고, ‘안녕감’ 이란 심신의 편안함과 만족감을 의미한다. 행복은 모두에게 다 같은 모습일 수 없다. 행복을 느끼는 상황과 크기는 저마다 다르기에 주관의 개입은 필수적이다. 또한 안녕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기에 안녕감 또한 불가결 조건이다. 행복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명확한 정의 구현이다.


E. Diener 는 행복을 주관적 안녕감으로 정의한다


  행복은 인생 단계마다 그 모습을 달리한다. 주관은 그 시기 관심사를 반영하고, 안녕의 조건은 그에 따라 매번 바뀐다. 멋모르는 어린 시절에는 화목한 가정과 평온한 일상이 그저 행복했다. 학창시절은 학업적인 성취와 간헐적인 일탈이 꿀이었고, 연애시절은 감성적인 설렘과 인간적인 교감이 좋았다. 지금은 회사생활에서 사회적인 성장과 사업적인 기여에 만족을 느낀다. 아직까지 무소유나 무욕에서 오는 인생 전반에 걸친 영속적인 행복은 모르겠다. 미천한 중생이라 그 단계는 멀었다. 어쩌면 소유하고 욕심부리는 세속적인 현재가 있어야 도달할 수 있는 미래의 단계인지도 모른다. 가져봐야 비로소 부질없음도 알기에.


  일단 30대 중턱에서 바라는 행복은 이 세상에 자신을 세우는 입신이다. 고등학교 이후 반평생 꿈인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 을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왔다. 꿈을 이루는 단계를 배·세·나 (배움, 세움, 나눔) 로 나눈다면 지금은 배움을 거쳐 세움에 있다. 그 동안의 배움을 정리해 이제는 영향력의 주체로 자리잡는 것이 필요하다. 콜로세움처럼 세상에 나를 세우고자 한다.


  소확행 같이 일상에서 발견하는 소소한 행복은 소소하게 사라져버리는 공허함이 있다. 그래서 so so 하고 선호하지 않는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라 하지만 그것은 감도가 떨어지고 밀도가 부족하다. 단타 행복은 비거리가 짧다. 행복의 유통기한이 아쉽다. 나는 소유(所有)해 오래(長) 가질 수 있는 행(幸)복인 소장행을 지향한다. 30대에 세우는 견고한 입신은 그렇게 행복으로 롱런하기 위한 현재의 미션이다.


30대에 나의 행복은 소장행을 위한 입신에 있다


  한편 돈과 행복의 관계는 흥미롭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물으면 돈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태반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믿고 싶은 것이 대중의 정서다. 돈이 많아 불행해진 경우를 언론에서 자주 보도하고 경고하는 탓도 있다. 상대적 박탈감 때문인지 형편에 대한 합리화 때문인지 부자가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시기와 질투도 섞여있는 것 같다. 정말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을까?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 단, 주관적 안녕감을 더해주는 선까지만. 만약 돈의 효용이 더 이상 안녕을 도모하지 못하면 돈은 행복과 무관해진다. 최근 미국 퍼듀대 심리학과에서 164개국 170만명을 대상으로 “연간 얼마를 벌어야 행복할까?” 에 대해 조사했다. 그 결과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는 수준은 6~8천만원, 그리고 삶에 가장 만족하는 소득지점은 1억원 수준으로 분석됐다. 반면 1억원이 넘어가면 오히려 삶의 만족도나 행복수치가 낮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즉 가난에서 벗어나는 돈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돈의 증가가 계속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특정 소득까지 돈은 행복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그 이상에서는 중요성이 떨어지며, 오히려 행복을 저해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그 이유는 돈이 많아질수록 희생되는 것들이 생겨나며 인간관계, 건강상태, 여가선용 등에서 부작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소득에 언제까지나 비례하지는 않는다


  이왕 사는 인생 행복해야겠다. 행복 코스프레 말고 진실된 행복이면 좋겠다. 억지로 웃으며 행복한 척 하기보다 정말로 행복해서 저절로 웃음이 나와야겠다. 셀카로 찍은 억지 미소보다 누군가에게 찍힌 박장대소가 더 행복해 보인다. 자본주의 웃음보다 현실주의 웃음은 행복을 가득 품었다. 그렇게 행복한 인생이어야 인생샷이 나온다.


  오늘이 당장 행복한 하루가 아니어도 괜찮다. 매일이 행복하지 않아도 내일이 행복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면 된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이면 찾지 않아도 행복이 나를 찾아온다. 행복은 늘 뜻하지 않은 곳에서 그렇게 선물처럼 주어지니까.


정말로 행복해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인생이어야겠다


  지금 당신의 행복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현재의 인생 단계에서 주관적 안녕감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은 행복한지 묻고 싶다. 사실 우리는 매일 “안녕하세요?” 서로의 안녕을 묻는다. 행복한지를 묻고 있다. 과거에는 전쟁, 보릿고개, 호환마마 등에서 무사한지 생사를 묻는 질문이었다면, 먹고 살만해진 오늘에는 행복한지를 묻는 질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안녕하세요?” 물으면 기계적으로 “안녕하세요?” 되묻기보다 그 대답을 한번 생각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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