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치 향유 - 필름사진을 본 후 쓰고 그립니다.
나는 술을 즐겨 마시는데, 너는 그렇지 않았지. 이유없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아무 영화나 틀어놓고 마시는 위스키 한 잔의 조용한 취기, 맛보다는 분위기로 먹는 식당에서 친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친해질지도 모를 사람과 레드와인 한 두 잔을 곁들여 마시며 조금씩 풀어지는 긴장감, 하루 건너 보는 친구들과 딱히 새로이 할 말도 없어서 목구멍에 콸콸 들이붓는 맥주로 정신이 나가버리는 기분까지 나는 좋아했어. 한 때는 술 없이 사람을 사귀는 건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까지 했었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각을 해야 하는 인간이, 생각 없이 취해버리는 순간들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너의 기분은 언제나 흔들림 없이 단정했다. 술을 마셔도 맥주 반 잔 정도 이상은 마시지 않았어. 맑은 머리에 안개가 끼는 것처럼 흐릿한 기분이 불쾌하다고 내가 권하는 술을 상냥하고 단호하게 거절하곤 했어. 그것 빼고는 모든 게 다 잘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다른 우리의 핵심 이었을까. 너와 있을 때 나의 감정은 술을 마시지 않아도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처럼 두려웠고, 기대했고, 짜릿 하다가 허탈함의 반복이었는데. 이제서야 생각해. 나와 있을 때 네가 느꼈던 감정은 평소와 변함없이 출퇴근하는 전철의 흔들림 처럼 늘 같고 얕은 진동같은 것 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너는 내가 없어도 될 것 같아.” 우리의 마지막에 난 이렇게 말했고,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넌 대답했지.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알 것 같더라고. 말 끝의 줄임표 안에 생략된 말을.
‘아마 너 역시 내가 없어도 계속 살아갈 거야.’
나는 거짓말처럼 너를 만나기 전의 나로 돌아와 바에 앉아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고 있다. 창 너머 무슨 이야기인지 열중하다, 간간히 웃으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맑은 날씨에 우울증이 더 심해진다는 어떤 연구 결과를 떠올린다. 밝은 햇살같은 사람들에 비해 난 혼자 비를 쫄딱 맞은 듯 축축한 기분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습관처럼 이 몽롱한 생각 없음에 취해 있다.
두 번 째 병맥주를 비우고 집에 가는 길에 내 앞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가 보였다. 아까 테라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얄밉기도 부럽기도 한 알 수 없는 기분에 빠른 걸음으로 그를 좇아 말을 걸었다.
“아까 디스트릭트에서 봤어요.”
“아, 그래요?”
“제가 지금 좀 절망적인… 그런 상태라서. 밝아 보이더라고요, 아까.”
남자는 갑작스러운 나의 고백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은 듯, 속도를 늦춰 나와 발걸음을 맞추며 가볍게 웃었다.
“괜찮지 않나요. 언젠가 희망이 있었으니 절망할 수도 있고, 또 그럴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는 거.”
속 편한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의 얘기니까 그렇게 웃을 수 있겠지. 모두는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침묵하자 남자는 말을 이어갔다.
“16도에서 19도 사이의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는 날들의 낮에, 테라스에 앉아서 진하게 내린 커피를 마시며 보내는 오후는 어쩌면 기분좋은 나른함에 가깝겠지만, 동시에 극도로 허무한 나른함일 수도 있잖아요. 과거엔 나도 어떤 희망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절망을 반복하면서도 계속해서 나아갔던 적도 있었죠. 그런데 어떨까요, 그러다 처음부터 잘못된 방향으로 너무 멀리 와버린 기분이 들어버린다면요”
이해할 수 없다는 나의 표정을 그는 이해한 듯 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죽음이 닥쳐 왔을 때 내가 해온 모든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걸 깨닫는 다면요. 내가 열중해온 일들이 사실 내가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거 라면요. 다시 시작하려면 다시 돌아가야 하고, 그렇게 다른 방향을 간다 해도 그게 맞는 건지 확신할 수 없다 면요. 그러면 그냥 나른 해져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아까 우리들은 그냥 오늘 밤 같이 죽어버리자고 결심 했거든요. 더 이상 절망할 힘 조차 없어서.”
“뭐라고요? 진심이에요?”
“글쎄요. 아마 당신처럼 전력으로 힘들어할 수 있을 때, 그 때가 기회인지도 모르죠.”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조용히 걷는 속도를 높여 빠른 걸음으로 나와 멀어져갔다. 이 비 현실감은 뭐지. 살짝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그렇게 마신 것도 아닌데 왠지 거대한 피로감이 몸을 짓눌렀다. 대충 옷만 갈아입은 채 푹 자고 일어나자 밤도 새벽도 지나고 환한 아침의 중간에 있었다. 어제의 피로감은 사라졌고 개운한 몸놀림으로 오랫동안 공들여 샤워를 했다. 그리고 조간 신문의 부고란부터 찾아 훑어보기 시작했다.
작고 이상한 기대감에 사로잡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