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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그리면 숲이 아름다워져요?

자연 심미안 기르기 knowhow

오늘은 숲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그림 그리기’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그림이란 건 뭘까요? 제가 생각하는 그림은 추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림을 보면서 어딘가 어느 순간인가를 기억하는 것이죠.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이 될 수도 있고, 아주 유명한 무언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할아버지의 초상화로 할아버지를 추억하기도 하고, 벽에 걸린 설악산그림으로 설악산을 추억하기도 합니다. 어릴 적 사진으로 어릴 적 시절을 추억하는 것과 비슷하죠. 그림이란 그래서 그리움이라고도 합니다. 그림, 그리움... 비슷하죠?


저는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별로 보고 그리지 않습니다. 봤던걸 생각하며 그리죠. 가끔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참고할 때도 있지만, 그러면 그림이 좀 시시해지더군요. 그래서, 어차피 망치느니, 그냥 안 보고 그립니다. 그 대신 그려야 할 대상을 외울 정도로 자주 봐두죠.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숲과 자연, 삶의 아름다움을 그리려고 하다 보니, 숲과 자연을 자세히 볼 수밖에 없습니다. 본걸 또 보고, 지난번에 그리려는데 헷갈렸던 부분을 또 찾아보고, 그렇게 장님 코끼리 더듬거리듯 삶 속의 아름다움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신기한 일이 생기더군요. 예를 들어 일본잎갈나무 두 그루를 그리려고 자주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그 두 나무들이 처음 볼 때보다 훨씬 더 거대해지고 뭔가 신비로워지고 아름답다기보다는 경외스러운 그런 대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더군요.


다른 나무들도 그랬습니다. 어느 날은 바람에 휘날리는 도토리나무들을 그려보려고 했는데, 바람이 워낙 세서 마치 물결 속에서 일렁이는 미역줄기들 같더군요. 그걸 어떻게 그릴까 고민하다가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어서 구석구석을 잘 관찰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설명을 하다 보니, 이야기가 좀 중구난방이네요. 아무튼, 그렇게 자연을 기억하며 그리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리고, 그 결과물인 그림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대상, 숲과 나무들이 이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살짝 주객이 전도되기 시작하더군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숲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숲을 아름답게 느끼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것 같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순간이죠.


전에 불교명상 관련한 책을 읽다가 들은 구절인데, 명상을 통해 평안하고 조용한 평정심을 얻게 되는데, 사실 그 평정심은 목적이 아닌 도구일 뿐, 그 도구를 이용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구석구석 살피는 것이 진정한 명상의 목적이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전 마음이 평안해지고 고요해지는 것을 명상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명상이었는데, 저의 목적이 단지 명상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그 이야기가, 제겐 참 이질적이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그림에서도 그렇습니다.


예쁘고 평안한, 기분 좋은 그림을 그리려고 숲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작 그림은 숲을 바라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숲을 바라보며 내 가슴속에 가득히 차오르고 절절히 흘러내리는 충만감이 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버렸죠.


심미안이라는 말이 있죠. 대상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심미안은, 숲과 나무들이 가지고 있는 범접하기 어려운 거대한 무언가를 바라보며 느끼는 경탄, 마치 위대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느끼게 되는 경외감과 감동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눈을 가지고 숲길을 걷는 것은, 그야말로 천상의 숲을 걷는 것 같다고나 할까요? 살짝 오버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명산대첩을 굳이 찾지 않습니다. 설악산, 지리산, 오대산, 월악산, 이 땅의 좋다는 산에 많이 가보고, 특히 도봉산과 북한산, 수락산의 줄기 아래에서 자라며 아름답다는 산자락을 많이 봐왔지만, 저는 굳이 그런 산에 가지 않아도, 동네 산책길가에 피어있는 꽃다지만 봐도 참 기쁘고, 익어가는 대추열매들을 보고 있자면, 내 자식이 잘 자라고 있는 것같이 뿌듯하고 대견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눈을 조금만 돌려서 보면, 사람 사는 모습에도 참 예쁜 구석이 많습니다. 아내와 동네 공원을 걸으며 잔잔한 행복을 즐기는 이름 모를 아저씨의 아름다움, 아이의 손을 살포시 잡고 동내 공원 풀밭에서 개미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아저씨의 아름다움, 여름밤 베란다에 앉아서 아들과 함께 바라보는 달님, 참 우리 사는 주변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그득그득합니다. 다만,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보입니다. ㅎㅎ 착한 사람한테만 보인다는 그런 이야기죠 결국...


그렇게, 우리는 삶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눈만 가지고 있어도,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가슴을 가득 채우는 행복감과 충만감을 느끼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뱃속에 밥이 들어가고, 졸리면 편히 누울 수 있는 집이 있을 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입에 들어가는 밥이 꼭 수십만 원짜리 정식이 아니라 하얀 밥에 된장국뿐이더라도 배는 부르고, 수십억짜리 롯데타워 호화빌라가 아니고 세 식구 소박하게 살아가는 작은 집이라고 하더라도 잠은 편하게 잘 수 있는 것이라서, 도구는 그저 도구일 뿐... 자동차는 굴러가고 뚜껑 달려있으면 되고, 자전거는 디디면 굴러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오늘도 심미안을 이야기한다고 하곤 또 삼천포로 빠지고 있네요. ㅎ 뭐, 쓸 때마다 그런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제 스타일 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사는 이야기가 나물 캐는 이야기든 우주의 광활함을 논하는 것이든 일맥상통하는 것이니까요.


오늘은 그렇게 변명하며 이만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쓸 만큼의 시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네요.


다음에는 어쩌면 ‘숲 속 명상‘을 통해서 숲 속자유를 느끼는 법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숲 속의 명상이라면 막연하게 들릴 수 있는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풀밭에 가만히 앉아있는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ㅎㅎ 흥미진진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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