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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빠는 어떤 아빠일까?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는 일에 대하여

우연히 넷플릭스에서 만난 영화 ‘더 키친’을 보다, 문득 아버지로 산다는 것이란 무엇일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한 인간이 성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함께하고 보살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도 아이를 낳고, 아이가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정성껏 키우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그럼, 과연 저는 아버지일까요?


아이를 처음 갖게 되고, 아이가 작은 수레에 실려서 영유아실로 실려오는 모습을 보던 순간 ‘아, 귀엽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지켜보았던 그 순간이 기억납니다. 두근거리고 살짝 비현실적이었던 느낌도 기억납니다.


내 팔뚝만 한 아이를 정성스레 안으며, 아내와 둘이서 며칠간 지내던 산후조리원에서, 난생처음 아들의 얼굴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가져간 노트 한 장을 찢어서 그린 아이의 모습은 지금도 냉장고 문에 붙어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시간이 지나서, 이제는 제법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또 한 명의 사람으로 함께 살아가고 있죠.


길을 걸으며 함께 웃기도 하고, 서로에게 화내기도 하고, 가끔은 너무 사랑하는 마음에 꼭 껴안고 있기도 하며, 비교적 즐겁게 아들과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습니다. 네 살 무렵 이사를 하면서 심하게 앓아서 말도 행동도 느려졌던 아이를 낯선 도시의 평범한 아이들 사이에서 키우려면, 감내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죠.


아내의 설움 섞인 하소연을 들으며 함께 분노하고, 아이의 어눌한 말투를 들으면서 화가 치밀어 오를 때도 있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일들이, 미숙한 저를 아버지라는 이름에 조금 가깝게 만들어준 감사한 일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장애 없이 정상적으로 잘 자라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것이 많지만, 그중에 하나를 꼽자면, 아이는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사랑을 표현해 주고, 안아주고, 뽀뽀해 주고, 함께 놀아주고, 웃게 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죠. 그 대상이 부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고, 자신을 즐겁게 해 주며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최대한 그렇게 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물론 가끔 아이 앞에서 아내와 다투기도 하고, 실수든 아니든, 아이를 화나게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에서 함께 웃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행복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사람은 배움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멋진 아빠가 되는 것도, 훌륭한 아빠가 되는 것도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며, 함께 잘 놀아주고, 웃게 해 주는, 뽀뽀해 주고 안아주는 그런 아빠를 아이들은 좋아합니다. 아이가 원하는 바로 그때에 아이와 놀아주고 안아주고 사랑해 주는 아빠를 아이들은 원하죠. 아이가 필요한 아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게 해 주고,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주는 것이 중요하더군요. 갖고 싶은 것도 가능하다면 갖게 해 줘야겠지만, 이 모든 것에는 당연히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준다면, 아이가 망가져버리겠죠. 마치, 우리가 우리의 욕망대로만 살아간다면, 스스로를 망가뜨려서 후회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마치 스스로의 욕망을 다스리며 살아가는 것과도 비슷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자기 스스로를 다시 키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과연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모르겠습니다만, 아버지로 산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 저에게는, 최대한 아들과의 시간을 많이 가지며, 아들이 많이 웃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 아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최대한 즐겁게 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런 것들인 것 같네요.


그리고, 보다 본래의 내 모습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일인 것도 같습니다. 내가 욕망하고 선망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원래 가지고 있는 나의 모습, 태어나면서 서서히 잊혀가고 있는 본래의 내 모습, 불교에서 말하는 바로 그 심연 속의 본래 내 모습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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