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지도(西村地圖)

2년 동안 발로 걸으며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그린 서촌의 명물 지도

by 김덕영

'까페 에세이' (6)


어젯밤 30대 초반의 여성 한 분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렌지빛이 감도는 스카프를 목에 두른 모습이 조금은 세련된 여성 같아 보였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와인 한 병을 주문하고 싶다며 추천을 해달라고 했다. 보통 여자 혼자서 와인 한 병을 마시기는 쉽지 않다. 술이 세고 약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와인은 '대화의 술'이고 '이야기의 술'이다. 소주가 '분위기'와 '단결'의 술이고, 맥주가 '카~!' 하는 느낌의 청량감을 느끼고 싶어 마시는 술이라면, 역시 와인은 누군가와 이야기가 하고 싶을 때 어울리는 술이다. 그러니 혼자서 와인을 한 잔도 아니고 한 병씩 마신다는 게 내 눈엔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녀가 찾는 것은 미각적인 즐거움보다 후각적인 아로마에 맞춰져 있었다. '맛보다는 향기가 좋은 와인을 마시고 싶은데요...' 이럴 때는 조금 긴장도 된다. 사실 값이 좀 나가는 와인들이야 당연히 맛과 향기가 밸런스를 유지하지만, 대중적인 가격대의 와인들 중에서 한 사람의 취향에 맞는 와인을 고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맛과 향이라는 것도 무척이나 개인적인 것이다. 누구의 입맛에 맛는 것이 또 다른 누구의 입맛엔 별로인 경우도 많다. 당연히 이럴 때는 이야기를 좀 나눠보는 것이 한 방법이다. 가게 3년 하면서 터득한 생활 속의 지혜다.


이것은 얼마 전 한창 문제가 되었던 아파트의 층간 소음에서도 실제로 심리적 실험을 통해 입증된 것이기도 하다. 위층에 뛰어노는 아이들을 실제로 알고 있는 경우가 그들을 모르고 있는 경우보다 훨씬 소음이 작게 들린다. 물리적인 측정치로서 소음의 양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음을 내는 아이들에 대한 우리들의 마음이다. 그 아이들의 이름 석 자라도 알고 있는 경우에는 훨씬 소리가 작게 들린다는험의 결과다.


나는 늘 이런 게 사람이 사는 방식이고 지혜라는 생각을 한다. '타인'의 존재란 결국엔 나를 바라보는 거울이다. '타인에 대한 인식'은 곧 배려와 관용의 출발점이 된다. 이것은 서로 갈등을 극복하고 조화를 추구하며 다른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았던 우리의 가장 기초적인 삶의 방식이고 지혜였다. 어쩌면 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남이 두려워지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나는 어젯밤 혼자 가게에 와서 와인 한 병을 주문했던 그 여자분을 조금 알아가기로 했다.


"얼마 전에 서촌에 이사를 왔어요. 사람들이 좀 독특한 동네라고 해서... 이제 이곳에서 동네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요. 방법 좀 있으면 알려주세요."


예상 적중이다. 역시 처음부터 뭔가 다른 느낌의 손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녀가 한 말 중에서 '동네친구'라는 단어가 참 듣기 좋았다. 요즘처럼 삭막해져 가는 세태 속에서 '동네친구'라는 말은 왠지 모르게 '고향친구' 같은 단어처럼 들린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있고, 다정하고, 내가 기대고 싶을 때 언제든 어깨 하나 턱 빌려줄 것 같은 친구. 그녀가 찾고 있는 것은 사실 향기 나는 와인 한 병이 아니라 '동네친구'였던 것이다.


솔직히 친구 사귀기가 참 쉽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나의 경우에는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 해도 지난 겨울과 봄을 거치면서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단지 정국을 바라보는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가게의 발길을 끊은 단골들도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신간 인쇄를 며칠 앞둔 상황에서 자기 이야기를 책 속에서 다 빼달라고 한 사람도 있다. 언제는 자기 얘기 한 번 들어보라며 별별 말을 다 했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가 말한 소재를 책에서 빼라니... 그것도 편집을 마치고 인쇄 돌입 직전에 말이다.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얼마 전 발표했던 우리 공간의 3년 이야기를 담은 책, <하루키에겐 피터캣,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다큐스토리, 2016년)를 쓸 때의 이야기다.



어쩌면 지난 3년의 시간은 나에게도 '동네친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시간인지 모르겠다. 인적도 드문 서촌 통의동 골목길에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나는 누군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랬다. 작고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고 싶다는 바로 그 이야기들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결코 적지 않은 숫자의 '친구'들이 그 먼 곳에서부터 우리 공간까지 일부러 이야기를 듣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되고 싶어서 자기 동네에서 금방 딴 포도를 한 상자나 들고 온 적도 있었다. 그것도 뙤약볕이 내리쬐는 8월 한여름 폭염 속을 뚫고서 말이다. 그녀가 들고 왔던 포도 상자는 남자인 내가 들어도 참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친구를 만드는 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공간을 찾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아주 특별한 '동네친구'가 있었다.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자 '서촌지도'를 만든 분이다. 실제로 그는 몇 년 전 자신이 살고 있는 서촌의 모습을 매일 같이 걸어 다니면서 작은 노트에 기록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작은 노트를 한 장의 지도로 만들었다. 일명, 서촌의 대동여지도 '서촌지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지도는 현재 '구루루'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는 디자이너 정재이 씨의 작품이다. 그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서촌 일대를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거리며 건물들을 기록했다. 포털 사이트 들어가면 어느 곳이나 한눈에 지도를 구해 볼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이 '서촌지도'만큼 정감 있고 사람 냄새나는 지도를 본 적은 없다. 이 한 장의 지도 속에는 동네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 있는 한 인간의 마음이 담겨 있다. 나는 그래서 이 사진을 가장 좋아한다. 우리 가게에서도 손님들이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이 사진을 붙여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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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동안 발로 걸으며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그린 서촌의 명물'서촌지도', 빨간점이 우리 가게가 있는 곳이다


통의동, 통인동, 누하동, 누상동, 필운동, 청운동, 신교동, 효자동, 옥인동, 필운동, 체부동, 창성동, 궁정동, 사직동, 적선동... 다른 지역으로 치면 일개 동(洞) 하나 면적밖에 되지 않는 서촌에 무려 15개나 되는 작은 행정구역상의 동(洞)들이 밀집해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있는 통의동에는 통의동 동사무소가 따로 없다. 우리 같은 경우 일을 보려면 효자동 주민센터로 가야 한다. 그건 서촌의 다른 동네들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동네가 만들어졌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대략 짐작해 보건대 그 옛날 경복궁 주변에 터를 잡고 살았던 중인 집단들의 서로 섞이지 않으려는 개성 있는 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어림짐작이다.


나는 그렇게 이곳 서촌, 통의동에서 3년이 넘게 '동네친구'를 만들고 있다. 내가 먼저 말을 걸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은 늘 그렇지만 우리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내가 손님을 단지 손님으로서만이 아니라 '친구'라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손님으로 와서 친구가 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 덕분에 3년 넘게 불황 속에서도 가게를 운영하고 공간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2016년 한 해 동안만 3,600개의 크고 작은 술집들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참 어렵고 힘든 상황이다. 과연 돌파구는 무엇일까? 쉽지 않은 질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촌, 통의동의 이 작은 공간이 뭔가 대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가 벌였던 다양한 노력과 지금까지 써 내려간 이야기 그 증거이지 않을까.


나는 이곳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어릴 적 뛰어놀던 골목길에서 친구를 만나듯이 그렇게 통의동 골목길에서 '동네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불을 밝히며 친구들을 기다린다. 그들이 몇 명이 되건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친구야!' 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어제도 그랬다. 비록 까다롭게 와인을 주문했던 손님이었지만, 그녀가 진짜 찾고 있었던 것은 향기 나는 와인이 아니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따듯한 '동네친구'였다. 비록 불쑥 가게 들어와 이것저것 꼼꼼하게 주문해서 나를 긴장시켰지만, 난 그녀가 어젯밤 어떤 마음이었는지 잘 안다. 왜냐고? 언젠가 나도 그랬으니까... 그녀가 하루빨리 좋은 '동네친구'들을 찾기를 바란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 작가)


<하루키에겐 피터캣,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중에서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와인 바(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작은 음악회와 강연회,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인문학 아카데미까지 일상의 작고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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