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중년 부부 덕분에 김PD가 얻은 작은 교훈
'까페 에세이' (8)
여자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데...
와인 파티 때문에 중정 마당에 서빙하러 분주하게 들락거리는데 중년을 넘기신 두 분이 들어오시더군요.
인상이 참 선하게 생기신 게 살아온 인생의 경력이 은근히 궁금하게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동글동글한 남자 분 인상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가벼운 옷차림에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부부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평생 다툼 한 번 안 해본 부부가 없겠지만, 그래도 한 평생 알콩달콩 서로 아껴주며 살아온 분들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왠 걸요. 예상을 깨고 들어오자마자 작은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여자 분은 마당이 보이는 '연인석'에 앉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남자 분은 안쪽에 널찍한 자리에 여유롭게 앉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여자: "나는 여기가 더 좋은데..."
남자: "뭐가 나는 저기가 더 좋아!"
자리 하나를 놓고 다툼이 시작됐습니다. 그럴 때 중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좀 난감합니다. 1,2분을 그렇게 서성이던 두 분. 결국은 늘 그렇지만 여자 분이 양보를 하시더군요.
여자: (여전히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에이...난 저기가 좋은데..."
남자: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뭐가. 여기가 넓고 좋잖아?!"
남자 분 선한 인상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제 제 시선은 여자 분에게로 갔습니다. 시선만 간 게 아니라 마음까지 움직였습니다. 약간의 동정 어린 시선까지 포함해서...그래서 용기를 내서 여자 분을 위해서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여자 분이 앉고 싶었던 자리는 저희 공간에서 좀 특별한 자리입니다. '연인석'으로 통하는 자리예요. 저기 앉으시면 사랑이 마구마구 싹튼답니다."
나름 신경 써서 한마디 한 것인데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 되었습니다. 남자 분이 바로 자세를 모로 돌리며 한마디 툭 건네시더군요.
"아고! 그럼 절대 앉으면 안 되겠네. 35년을 지겹게 살았는데, 또 연인이 되면 어떡하겠노!"
아...! 이제 드디어 남자 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야 말았네요. 그 한마디에 서운한 건 역시 여자 분이겠죠. 눈물까지 글썽글썽한 게 제가 다 무안해졌습니다. 그래도 참 대단합니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앉으셨습니다. 우리나라 여성들 인내심은 세계 최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특히 1950,60년대 태어나신 분들에겐 그런 게 일상의 삶이었겠죠.
괜한 말을 꺼내서 오히려 여자 분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드린 건 아닌지, 사실 좀 걱정도 됐습니다.
그냥 자리를 털고 돌아올까 하다가 그래도 결자해지, 제가 한마디 하지 않고 나올 수는 없겠죠.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고 하잖아요. 제 생각에는 연인석에 앉으셔서 못한 사랑 알콩달콩 나누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다시 분주하게 서빙을 시작했습니다. 토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그날따라 손님은 왜 그렇게 많았는지요.
잠시 후, 갑자기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일까요? 조금 전까지 남자 분 원하시던 널찍한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두 분의 모습이 순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연인석으로 자리를 옮겨서 앉아 계신 게 아니겠어요. 결국 남자 분이 양보를 하고 '연인석'으로 자리를 옮기신 것이었습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 오늘 밤 이 자리는 두 분을 위한 자리인 것 같습니다."
웃으며 다시 짐을 옮겨드렸습니다. 잠시 후 두 분이 글라스 와인과 모히또 한 잔에다 감바스 알 아히요를 시켜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정하게 이야기 나누며 웃음 짓는 모습을 보니까 제 마음도 너무 기뻤습니다.
'역시 마지막 한마디가 제대로 적중했어...여자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그 한마디...'
속으로 그 평범한 진리를 다시 되새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나는?' 하고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자로 살면서 언제나 내가 중심이고, 나만 잘났다고 산 건 아닌지...문득 그런 반성의 시간(?)도 짧게 가졌습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아무튼...
덕분에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알고 보니 인천에서 오신 분들이더군요. 그 먼 곳에서 일부러 서촌까지 오셨는데 조금이라도 좋은 추억을 만들어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어제도 정신없이 일하다 임대표는 발등을 다쳤습니다. 접시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날카로운 접시 모서리에 발등에 상처도 났습니다. 바닥에 산산이 깨진 접시 조각들을 치우면서 무던한 나는 '괜찮으냐'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습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부분에 부딪쳤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한 일이었습니다.
손님들이 다 가고 나서야 소독약을 발라주면서 그제야 '괜찮아?'라고 한마디가 입에서 나오더군요. 왜 그랬을까요? 남자로 사는 게 참 힘듭니다. 물론 여자로 사는 건 더 힘들겠죠.
사는 게 늘 그렇게 힘들지만 그래도 가게 불을 끄고 웃으면서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을까요...영화에서나 보았던 남태평양의 환상적인 섬에서 며칠이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아무것도 안 하고 사는 삶이 천국 같은 삶일까?
아니면 호화로운 요트에 몸을 싣고 바람을 가르며 석양을 음미하는 삶? 도심의 야경을 굽어 보며 와인 한 잔 기울이는 여유와 낭만?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다운 삶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것에 행복의 시작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건 때로는 한 평밖에 안 되는 비좁고 답답한 가게 주방에서도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의 꽃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죠.
누군가의 인생에 행복한 조연이 되고 그들을 위해 서치라이트를 비춰주는 삶에도 삶의 즐거움과 행복은 있습니다. 그것이 서촌의 작은 골목길에서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기다리는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가는 지 모르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왔을 땐 비록 자리 하나 놓고 티격태격 자기만 고집하던 두 분도 자리를 떠날 때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어둑어둑한 통의동 좁은 골목길 너머로 사라지는 공간. 우리들의 공간에는 그런 소박한 행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역시 '여자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말은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김PD가 얻은 어제의 작은 교훈이었습니다.
'이름도 모르는 어제 손님! 저는 알 것 같아요. 말씀은 그렇게 퉁명스럽게 하셨지만, 두 분 살아오신 35년 인생, 참 아름다웠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35년 더 그렇게 다정한 연인처럼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행복하세요.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지만, 두 분 자리는 영원히 '연인석'입니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