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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May 12. 2017

영국은 왜 디자인의 강국이 되었나?

과거 영국의 경제불황에서 현재 우리의 경제불황을 바라보다

'과거 영국의 경제불황에서 현재 우리의 경제불황을 바라보았다.'


나른한 일상의 오후였다. 요즘 나는 희뿌연 먼지 사이로 남산 타워를 바라보면서 그날의 대기오염 농도를 측정한다. 어제는 그래도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 잿빛 하늘 사이로 보였던 하루였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점심을 서둘러 먹고 가게 문을 일찍 연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게다. 청소를 한 뒤 쓸고 닦고 정리를 할 즈음이었다. 한 말쑥하게 생긴 청년이 들어왔다.


"아까 전화드렸던 사람입니다."


'전화?' 전화받은 적은 없는데......


"문 여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거 그랬다면 미안한 걸.'


까페 안에 음악도 제대로 틀지 못한 상황이라서 좀 뻘쭘한 상황. 그래도 청년은 개의치 않고 중정 마당으로 나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그늘 하나 없고 햇살이 가득 비치는 제일 한가운데 자리로 말이다.


"햇살이 너무 따갑지 않겠어요?"


"괜찮습니다. 오늘은 일부러 햇살 좀 받고 싶어서요."



우리 가게 중정 마당은 조용히 구름과 달을 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다.


그가 주문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서둘러 내려서 다시 중정 마당으로 나갔다. 그러고 보니 저 청년 며칠 전에도 왔던 친구다. 처음엔 혼자 왔다가 나중에 다시 친구들까지 죄다 불러 모았던 게 기억이 난다. '동네 청년일까?'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 어차피 혼자 온 손님인데 몇 마디 건넨다고 기분 상할 리도 없을 터. 슬쩍 '나도 햇살 좀 받고 싶어서...', 라고 표정까지 지어가면 옆 자리에 앉았다. 보통은 주인이 그렇게 옆자리에 앉으면 손님은 어떤 기분이 들까? 하지만 뻔뻔하게도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동네 분이세요?"


궁금한 건 역시 제일 먼저 입에서 나온다. '날씨가 좋네요.', '커피맛 어때요?'... 보통 이런 말들로 서양 사람들은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시작된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는 좀 직설적이다. '밥 먹었어요?', '어디 가니?'... 또 쓸데없이 옆길로 샜다. 요즘 자꾸 그런 버릇이 생겼다. 나쁜 건지 좋은 건지는 결과를 좀 더 두고 봐야 알겠다. 아무튼. 다시 청년으로 돌아가서.


"아뇨. 광진구에서 왔어요."


성동구 옆이 광진구다. 성동구에는 어린이대공원이 있고. 서울 지도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자치구, 거길 지나면 구리시로 빠진다. 거리 상으로도 그렇지만 심리적으로도 결코 가까운 곳이 아니다. 그런데 일부러 그곳에서 서촌까지 일부러 찾아오다니. 내 안에 있는 오랜 다큐멘터리 PD의 본능이 발동했다. 그래서 몇 마디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이어졌다. 그와 나눈 대화는 결국 오늘 아침 영국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에서 전시되고 있던 오래된, 아니 다 쓰고 버려졌던 콜게이트 치약 껍데기 하나로 내 기억을 이동시켰다.

영국 디자인 뮤지엄에 전시되었던 콜게이트 치약과 비슷한 이미지


스물여섯 살 청년, 대학에서는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남들처럼 군대를 갔다 와서 이제 올 2월에 졸업을 했단다. 사회에 첫발을 디디는 초년생이다. 가구 디자인을 전공했고 그래서 가구 회사에 들어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역시 취업의 문턱은 말 그대로 높았다. '뭘 하며 살까?', 고민하던 청년은 친구와 함께 창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재 그는 자신이 꿈꾸는 작은 기업 하나를 창업하려고 고민 중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그의 프로필이다.


"뭔가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찾아서 하고 싶어요. 쉽진 않겠지만...그래도 창업 지원 프로그램 덕분에 저 같은 청년들이 스타트업 하는데 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한 번 도전을 해보려고요."


일단 무조건 박수부터 칠 일이다. 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역동적인 사회는 청년들이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는 사회라 믿는다. 조용필의 노래처럼 '산기슭에서 먹이를 찾아서 헤매는 하이에나가 되기보다는 눈 덮인 산정에 올라가 차라리 굶어 죽을 수도 있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어야 한다. 그런 패기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미래를 향한 횃불이 된다. 이 노래가 나온 해가 1985년이었다. 대학교 2년 때의 일이다. 별로 손에 가진 것도 많지 않았던 시절인데, 그래도 난 그 노래를 들으며 스무 살 청춘을 보냈다.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아니 실제로 뭐든지 노력하면 될 수 있었다. 그런 8,90년대를 보냈던 나 같은 세대는 아마 지금 저 청년이 겪는 고통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탱자 탱자 놀면서 대학을 졸업해도 또 어떻게 어떻게 직장에 들어갔고, 은행 대출을 끼고 아파트 한 채라도 사놓으면 2,3년 뒤엔 대출을 갚고도 남을 정도로 집값이 올라 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고도성장기의 단물을 먹고살았던 세대가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안타깝지만 우리에게 그런 기회는 다시 올 것 같지 않다. 물론 예단할 수는 없는 일. 잘 될 수도 있고 못 될 수도 있는 게 인생이다. 결국 인생을 사는 주인공은 '나' 자신이다. 그렇게 공동체의 운명도 결정된다. 잘 살던 못 살던, 그 책임 역시 공동체 구성원들이 짊어져야 할 몫. 다만 변화의 진자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에 있다. 나는 그걸 믿는 편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일상의 생활에서 나온다. 이제 슬슬 오늘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2009년 나는 kbs '문화지대' 프로그램 제작을 하면서 남들은 쉽게 해볼 수 없는 경험을 하나 했다. 그것은 세계의 잘 나가는 유명 도시들을 오로지 '디자인'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일이었다. 프로그램의 제목도 그래서 '도시의 경쟁력, 디자인'이었다. 뉴욕에서 시작해서 런던, 파리, 베를린, 암스테르담, 시카고, 도쿄, 상하이까지 나는 그 유명한 도시들이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될 수 있었는지를 '디자인'의 관점에서만 분석했다. 그동안 경제나 환경, 정치 같은 큰 담론의 도구에서 도시를 분석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디자인이라는 아주 일상적인 작은 소재로 접근을 시도한 참신한 기획이었다. 덕분에 내 여행 목록에 '3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추가되었다.


세계의 주요 도시들을 시간적 격차 없이 거의 동시간대에 방문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방문하는 도시마다 그 나라에서 가장 잘 나간다고 하는 디자이너들과 인터뷰도 할 수 있었다. 세계의 대륙을 지나고, 두 개의 대양을 지나는 긴 여정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도 많이 얻었던.


그 '30일간의 세계 일주'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그게 바로 오늘 이야기하려고 하는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었던 콜케이트 치약 껍데기다. 영국 디자인의 헤드쿼터이자 레거시(Legacy)가 간직된 곳. 원래는 템즈 강가 런던에서 제일 아름다운 타워 브리지 옆에 있었던 걸 이제는 하이드파크 쪽으로 새롭게 증축 이전했다. 허튼 돈 별로 쓰기 싫어하는 브리티시들이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증축을 한 것만 봐도 지금 런던에서 디자인이 차지하는 위상을 느낄 수 있다. 실제로 런던이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핵심적인 골격과 뼈대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던 곳도 영국 '디자인 카운실(Design Council)'이었다. 쉽게 말해서 올림픽을 체육 관련 부서가 아니라 디자인 파트쪽에서 담당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디자인에 대한 이해와 관점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늘날 런던이 어떻게 그리고 왜 디자인의 강국이 되었는지 알고 싶다면 '디자인 뮤지엄'에 가봐야 한다. 건축, 패션, 유니버설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부가가치가 높고 특색있는 창의적인 디자인들이 런던에서 배출된다. 덕분에 수많은 젊은 크리에이터들이 몰려드는 디자인의 성지가 되고 있다.


런던 템즈 강가에 있었던 옛날 '디자인 뮤지엄' 건물


모든 박물관은 역사의 기록이고 미래를 내다보는 창이다. 런던의 디자인 뮤지엄 역시 그런 기능을 하고 있었다. 기획 전시가 열리고 디자이너, 건축가들의 강연회, 초대전이 연일 계속된다. 뭐, 그 정도만 보면 여타의 박물관과 다를 게 없을 것이다. 2009년 내가 그곳을 방문했던 날도 그랬다. 다만 한 가지가 눈에 다르게 들어왔다. 그건 맨 꼭대기 층,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상설 전시실이었다.


1,2층의 기획 전시실에는 늘 사람이 붐비지만, 맨 위층에 있는 상설 전시실에는 사람도 없고 좀 썰렁한 분위기였다. 어쨌거나 런던 디자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그곳에서 나는 놀라운 것을 하나 발견했다. 그곳에서는 런던 시민들이 일상의 생활에서 쓰고 버렸던 물건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새것이 아니라 헌것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가 바로 앞서 말한 1980년대 어느 이름 모를 런던의 누군가 사용했던 이리저리 짜다 뒤틀어진 콜게이트 치약 껍데기였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발견, 나에게 소중한 가치들은 모두 이곳에서 나온다. 거창하고 요란한 구호들이 아니라 그런 평범한 것들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는 재미가 있다. 그곳에는 그런 숨겨진 이야기들이 있었다. 구멍 난 주석 냄비, 색 바랜 플라스틱 물통, 녹슨 프라이팬, 심지어 어느 소녀의 머리카락을 묶었던 고무줄까지 런던 시민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도대체 그들은 왜 그런 일상의 버려진 물건들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붙잡고 인터뷰를 했다. 질문은 오직 하나, '도대체 당신들은 왜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까지 전시를 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시간이 오래 지나 그들과 나눈 대화들까지 세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때 취재 노트로 만들었던 책이 <유레일 루트 디자인>이었는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기억을 더듬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기록이 좋은 이유가. 그 책이 없었다면 아마 까맣게 잊혀졌을 일들이었다. 그만큼 시간이 오래 지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만 한 중년 부인과 나눴던 인터뷰는 지금도 책 없이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그녀는 런던 시민이었고, 디자인 뮤지엄을 좋아해서 늘 시간이 날 때마다 찾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뮤지엄에 올 때마다 기획 전시관뿐만 아니라 맨 위층에 있는 상설 전시관도 빠짐없이 들르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 콜게이트 치약 껍데기가 전시된 그곳이다. 그녀는 왜 그 버려진 런던 시민들의 생활 전시실을 이렇게 찾아오는 것일까?


"나는 슈퍼마켓 디자이너입니다. 그래서..."


"네?! 잠깐만요. 지금 직업이 뭐라고요?!"


그녀와의 인터뷰는 처음부터 작은 놀라움에서 시작됐다. '세상에 슈퍼마켓 디자이너라니!' 나로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직업이었다.


"저는 주부입니다. 아이들도 둘이나 있고요. 집에서 가까운 곳에 직장이 있죠. 그 슈퍼마켓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슈퍼마켓 디자이너는 고객들이 조금이라도 더 편하고 즐거운 쇼핑이 될 수 있도록 물건을 배치하는 일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손님들이 적은 비용을 들이고도 자신들이 원하는 물건을 어떻게 하면 많이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역할도 합니다. 인테리어보다는 사실 쇼핑 콘셉트를 잡도록 도와주는 역할입니다."


디자인을 데코레이션 정도로 알고 있던 시절, 나는 그녀의 디자인에 대한 콘셉트에 놀랐다. 그리고 그것이 일상의 작은 슈퍼마켓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로웠다. 그녀의 이야기는 영국이 힘들었던 시절로 이어졌다.


한때는 세계의 굴뚝을 자처하며 제조업의 강국이었던 영국은 새로운 제조업 강국들에 밀려 경제가 후퇴하기 시작했다. 돌파구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1980년대 영국의 산업이 그렇게 몰락해 가던 시점이었다. 그당시 영국은 새로운 돌파구를 '물건'이 아니라 '콘셉트'와 '아이디어'에서 찾기로 결정한다. 커다란 방향 전환이었다. 영국이 자랑하는 'Creative Industry', '창조 산업'은 그렇게 시작했다. 1989년 디자인 뮤지엄이 문을 열었고 그것은 세계 최초의 디자인 박물관이기도 했다. 런던 곳곳에 있던 오래된 공장 굴뚝 밑에 버려진 공간을 리모델링하고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창업의 공간으로 빌려줬다. 20년 후 런던의 창조 산업은 놀랄 정도로 발전한다. 그것이 런던의 경제를 새롭게 이끈 힘이었다.



그들은 답을 일상에서 찾았다. 그것도 버려진 것들이었다. 낡고 오래된 것들이 가치를 발휘하는 순간이다. 왜? 그럴까?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오래된 것들 속에는 시간의 흔적들이 스며 있다. 그 과거의 유산과 만나는 순간 창조의 불꽃이 튄다. 그것이 창조의 본성이다. 전통은 구닥다리 세련되지 못한 것만이 아니다. 과연 해 아래 새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 같은 대가들도 '창조는 기억'이라 말했던 것이 아닐까. 런던 시민 그 누군가 쓰다 버린 쭈글쭈글한 콜게이트 치약 껍데기가 말을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영국은 불황을 창조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그들에게 창조란 과거의 전통을 혁신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혁신은 때려부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인문학의 오랜 전통이 역할을 했다. 철학적인 사고 방식이 레거시를 강화시켰다. 굴뚝으로 가득했던 낡고 오래된 땅 위를 뜨겁고 젊은 피가 적신다. 그것이 영국 크리에티브 산업이 성공할 수 있는 힘이다.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답을 찾았고 결과는 대단했다. 과거를 폐기하고 단절시키려는 우리의 습성이 뼈아프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경제 불황의 돌파구를 정치적 구호나 멀게만 느껴지는 장기적인 대안에서 찾으려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은 도전과 실패에서 나온다. 런던의 청년들이 거침없이 질주할 수 있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마치 어른들은 놀이터를 만들고 아이들은 자기 마음껏 놀이를 즐기는 구조다. 간섭도 없고 도움 역시 없다. 오로지 스스로 혼자 가야 한다. 실패도 그들 몫이다. 하지만 그런 실패를 즐길 때 성공의 단맛도 달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문득 가게 중정 마당에 앉아 창업을 꿈꾸던 스물여섯 살 청년이 떠오른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가 꿈꾸고 계획했던 일들은 지금 어디까지 이루어졌을까?


오늘 글은 디자인 창업의 꿈을 꾸고 있는 그 청년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쓰게 되었다. 그가 누구인지, 우리 가게에 또 오게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바람을 타고 나의 이야기가 그에게도 전해졌으면 한다.


'힘내시라! 가시밭을 지나면, 그대 가는 길이 꽃길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작은 음악회와 강연회,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인문학 아카데미까지 일상의 작고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 올 겨울 북한의 전쟁고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한 편을 찍기 위해서 현재 기금을 모으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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