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NASA를 방문한 JFK와 어느 빗자루를 든 수위의 대화
'김PD의 인문학 여행' (50)
1962년 '아폴로 계획'의 실행을 점검하기 위해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나사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수행원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가던 케네디 일행은 마침 그때 건물 복도에서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던 수위와 만났다. 좁은 복도 때문이었는지 케네디를 수행하던 일행들의 진입이 방해를 받았다. 웅성거리는 무리를 뚫고 케네디가 수위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시요? 나 잭 케네디입니다. 지금 뭘 하고 있는가요?"
그러자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하고 있던 수위가 몸을 일으키며 케네디에게 말했다. 케네디로서는 아주 뜻밖의 대답이었다.
"아. 네. 대통령 각하! 저는 지금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I'm helping put a man on the moon.
저는 지금 인간을 달에 보내는 일을 돕고 있습니다.
이 일화는 사실 며칠 전에 하버드 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페이스북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의 연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우연히 그의 연설을 듣다가 알게 된 이야기였지만, 나는 그날 저커버거의 연설보다 그 수위가 했다는 한마디 말에 온통 관심이 쏠렸다. '인간을 달에 보내고 있는 일을 돕고 있다'고 자신있게 말했던 그 수위의 존재말이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 자신에 찬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그렇다. 인간 사회는 아무리 노력해도 지위나 명예, 돈의 가치에 따라 차등이 나눠져 있다. 누가 어느 대기업에 다니고, 누가 얼마나 많은 연봉을 받느냐가 그의 존재를 가르는 척도가 된다. 그걸 송두리째 없애버릴 수도 없는 게, 그러면 경쟁이 사라져버리는 비효율적인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사회, 그로인해서 누군가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된 대우조차 받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정말 눈물나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그건 우리가 매일매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나사(NASA)에서 일하던 빗자루 든 수위와 케네네의 일화가 우리에게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목적'의 진정한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무얼 위해서 살아가는가, 라는 삶의 근본에 놓여진 바로 그 '목적'에 관한 이야기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수위는 그저 건물 청소나 하고 허드렛일이나 하는 그런 하찮은 존재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역할을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일치시켰을 때, 그의 존재는 결코 하찮은 존재만으로 머물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하찮아 보이는 일들을 어떤 원대한 계획 속에 일치시켰다는 점이다.
사실 이 문제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도대체 1962년 미국 나사(NASA)에서 케네가 우연히 만났다는 그 수위는 어떤 존재였길래 자신의 하찮은 청소일과 인간을 달에 보내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동일시 할 수 있었을까? 청소부는 비록 자신이 하찮은 역할이라도 그 하나의 역할이 인간을 달에 보내는 데 기여하는 일이라 확신했다. 자신이 열심히 청소를 하고 건물을 관리하므로써 어느 명문대 출신의 엔지니어나 고위직 간부들이 자신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그것이 다른 청소부들과 다른 점이었다. 자신의 역할이 전체 기여한다는 믿음. 그렇다면 결국 좋은 사회란 개인에게 그런 믿음을 끊임없이 심어주는 사회가 아닐까.
나는 최근에 '개인'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는 '개인'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그리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유명한 근대적 자아의 확립이 유럽 지성의 교양이 되었을 때가 17세기였다. 그들은 '전체'를 고민하기에 앞서 '개인'의 역할과 의미를 발견하려 애썼다. 나는 '개인'의 발견이야말로 서구 사회가 앞서간 가장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라 생각한다.
그에 반해서 우리에게 강조되었던 것은 늘 '전체'였고 '공동체'였다. 어쩌면 그건 남과 북이 분단되고 산업화의 후발주자로 빠른 시간 안에 성장을 추구했던 '산업화' 시대의 유산 때문인지 모른다. 전체를 통해 공동의 운명체를 인식하고 자각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치열했던 시기도 존재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화 시대의 동력만으로 사회가 발전할 것이란 믿음은 이미 오래 전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개인'이다. 창조적인 개인들에 목말라하고, 도전적인 스타업을 꿈꾸는 청년 창업가들을 육성해야 한다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건강한 '개인'이 성장하고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있는가? 늘 전체가 강조되고, 타인의 행동이 나의 행동이 기준이 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는 건강한 '개인'이 성장할 수 있을까? 전체를 강조하는 의식은 자연스럽게 남의 눈치를 보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다. 나의 생각보다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고민하게 된다. 유행에 민감하고, 불붙듯이 한순간에 감성적으로 타오르는 습성 등이 이런 현상의 근거가 될 것이다. 이런 삶의 조건들 속에서는 결코 나사(NASA)의 빗자루를 든 수위의 모습은 기대할 수 없다.
오늘 아침 나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들이 교차한다. 저커버그의 연설에도 나오듯이 '목적은 우리 자신보다 큰 것의 일부라고 여기는 느낌'이다. 목적을 같이 하므로써 하찮은 나 자신이 더 커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출발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어야 하고, 각자 느끼는 '나' 자신의 존재보다 훨씬 더 큰 존재로 우리를 만들어준다. 그것이 목적 있는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1961년부터 시작된 나사(NASA)의 '아폴로' 계획은 그렇게 원대한 목적을 공유하며 진행되었다. 모두 18번의 달 탐사 도전이 진행되었고, 그중에서 11번째 되는 '아폴로 11호'를 통해서 인간의 원대한 목적은 실현이 되었다. 과연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던 순간, 그 빗자루를 들고 복도를 청소하던 수위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자신의 하찮은 일을 인간 달착륙이라는 원대한 이상과 목적 속에 일치시켰던 그가 그날 느꼈던 심정이 문득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의 숭고한 목적을 나도 공유한 것일지 모르겠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 작가)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와인 바(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면서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작은 음악회와 강연회, 책을 읽고 토론하는 인문학 아카데미까지 일상의 작고 소소한 행복을 찾으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