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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Oct 07. 2019

일그러진 유리창

올바른 인식을 방해하는 요소들

'김덕영의 인문학 여행' (59)


살면서 '당연히 그럴 것이라 여겨졌던 일'들이 전혀 예상 밖의 결과로 귀결되는 경우들을 가끔씩 경험하게 된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사물이나 현상에 접근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논리의 바탕이 되는 논리의 구성요소들에 허점이 있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결과들이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경우, 숱한 의혹이 하나의 결론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걸 오히려 궤변으로 부정하는 경우들이 대표적인 경우다.


가만히 그런 사람들의 논리를 들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우선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남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한 포인트다. 그걸 무시하고 무조건 이기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라는 믿음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가장 중요한 전제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한국 사회를 지배한 문학적인 레토릭들이 그동안 많이 왼쪽으로 편향된 것은 사실이다.


게다가 최근 1,2년 동안은 권력과 문화가 한통속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경험했다. 블랙리스트로 지난 정권의 부도덕성을 질타했던 자들이 그보다 더한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대중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서울 시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한 라디오 방송이 특정한 정치적 지향점을 지닌 사람에 의해서 노골적으로 편향적인 방송을 계속하고 있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선진적인 사회에서는 결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자기 돈으로 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공익과 공공의 가치에 대한 무지의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은근히 해왔던 것을 노골적으로 해 먹기 시작한 것도 바로 최근의 일이다. 권력 투쟁의 결과물이 단지 돈과 명예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권력 장악의 도구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그렇다. 문화가 중요한 세상이 되다 보니 돈과 명예보다 그런 문화 권력에 목숨을 걸고 뛰어들게 되는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이 투쟁으로 쟁취한 문화 권력의 훈장들이 요즘처럼 반짝거리는 시기도 없는 것 같다. 마치 몰락해버린 옛 소련 공산당이 하사한 손바닥 만한 훈장을 수십 개씩 덕지덕지 가슴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몰골처럼 흉해 보인다. 어쨌든 그런 자들의 말과 생각을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성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들 말의 향기가 요즘처럼 추하고 썩은 냄새를 진동시킨 적도 없다. 지식인이라 자처했던 인물들이 내놓은 궤변을 보면서 결국 당연한 것들이 부정되고 말도 안 되는 논리가 판을 치는 답답한 현실을 확인하게 된다. 썩은 물이 고이듯 문화의 권력 상층부에서 기득권자가 되어버린 그들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좌우, 남북, 이념의 좌표로 틀을 가두고 그 안에서 같은 편끼리 묶어내는 그런 분열주의에 소름이 돋는다. 원래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바뀐다. 세상이 바뀌고 현실이 바뀌는데 어떻게 그것을 판단하는 생각이 기준이 바뀌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흐르는 강물에 배를 타고 가면서 강둑에 펼쳐지는 파노라마 같은 세상을 보며 변화하는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과 스쳐 지나간 것만 떠올리며 결국은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라고나 할까. 결국 세상의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성찰, 사고방식에 대한 메타피지컬 한 접근이 중요한 것이다. 즉,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상대주의와 상대적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것은 다른 것이다. 모든 것을 피아, 적군과 아군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우리 편끼리만 똘똘 뭉쳐서 남을 이겨보겠다는 심사는 결코 미래지향적인 글로벌 스탠드가 될 수 없다. 섞이고 교류하고 다양성을 통합하면서 세상은 발전하고 있다. 영국의 철학사 학자 거드리의 표현대로 하자면 'Unity in Differences'를 찾는 일이다.


모든 것을 둘로 나누고 그 틀 안에서 주체와 객체로 나뉜 세상 속에서는 진실이나 정의 역시 둘이 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한 사회 발전의 가장 밑바탕에 존재하는 발전의 동력을 사상이라고 놓고 본다면 사회를 매우 위험한 상황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 수 있는 요소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지향점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며, 원칙이 실종되기 때문이다. 목소리 큰 사람만이 승자가 되고, 머릿수로 진리를 추구하게 된다. 지성이 사라진 욕망만이 분출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이기적인 본성이 이타적 휴머니즘을 압도한다. 함께 지향할 수 있는 목표가 사라진다. 각자 살아남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이란 게 굉장히 보수적인 면을 지니고 있어서 한 번 인식의 체계 안에 들어온 것은 쉽게 바꾸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다. 정치의식이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식의 구조는 보수적인데, 자신은 진보적이라 믿는다. 자신은 변화를 거부하면서, 변화의 가치를 중요하다 말하는 논리의 이중성이 발생한다.


사실 여기서부터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심리의 영역이다. 감상의 문제인데, 자신은 이성이 작동한다고 믿는다. 정치의식이 대중성과 멀어지는 경우가 바로 이런 때이다. 사실성, 진위여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집착과 아집에 근거한 오류의 영역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그렇다. 집착과 아집에 근거한 심리적 믿음을 진실의 영역, 정의의 영역이라 믿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우리는 마음의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을 일그러진 유리창으로 바라보면 사물과 현상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창문에 더러운 먼지가 끼거나 때가 묻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국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의 창을 늘 깨끗이 닦고 점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인문학이란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라 믿는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수정하면서 인식의 창문을 점검하는 노력. 자신을 성찰하는 기능은 인문학이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역할일 것이다.


어쨌든 성찰을 잃어버린 인문학자, '어떻게' 살아남는 것이 진정 가치로운 일일지 고민하지 않는 지성인, 그런 사고방식이 활개를 치던 무대도 이제 머지않아 막이 내려갈 것 같다. 그들이 떠난 무대를 치우는 것도 누군가의 몫이 되겠지만, 무대 위에 썩은 냄새만 남아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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