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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Oct 31. 2019

신해철이 살아있다면 지금 세상을 뭐라 노래할까?

도전적인 삶을 위해 낯선 곳에 정착하자 (18)

대학 3년을 마치고 군대 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시절, 1987년 그 유명한 '6월 항쟁'이 일어났다. 한국 현대사를 뒤바꾼 역사적인 사건은 그해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20일 동안에 일어났다. 그해 1월 일어났던 운동권 대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를 거부했던 4월의 '호헌선언', 그리고 6월 9일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이한열의 죽음까지 모든 것이 정말 숨 가쁘게 전개되었던 격랑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6월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을 통해 한국 사회는 드디어 자신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모든 국가 권력이 한 사람의 손에 의해서, 한순간에 좌지우지되는 폭주기관차 같은 정치체제가 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해 봄 대학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군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는 널린 게 시간이었다.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6.29 선언이 발표되던 6월 29일이 군대 훈련소 입대 날짜였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나의 입영 날짜와 6.29 선언은 그렇게 같은 날 이뤄졌다. 6월 28일 밤늦게까지 종로, 명동 일대를 누비며 시위를 하다가 친구와 소주 한 잔 기울이며 '그럼, 서울을 부탁한다'라며 호기 어린 건배사를 나눈 순간이 기억난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짧은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책을 읽었고, 가장 치열한 사상에 대한 학습과 토론이 이뤄졌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런 탓일까. 87년 1월부터 그해 6월까지 그 시기를 빼놓고 내 인생에서 청춘의 고뇌와 갈등을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스스로 몸으로 확인하고 실천하던 시절이었다. 보편타당함이 무엇인지, 현실과 이상이 어떻게 조화롭게 함께 할 수 있는 것인지 꿈꾸던 시대였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상식과 통념이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가치판단의 기준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시대였다. 덕분에 그 시기는 싸워야 할 대상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며 뭉쳐야 할 존재가 명확하게 구분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해 1987년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고, 그 시절엔 강의실보다 거리와 광장에서 세상을 더 많이 공부했다. 내가 신해철을 알게 되었던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는 신해철보다 그의 어머니를 먼저 알게 되었다.


그와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그와 나는 대학 동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가 나의 3년 후배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출석 일수를 얼마나 꼼꼼히 체크하던지, 나중에 학점의 두 배를 결석하면 자동으로 F학점이 나오는 규정이 있었다. 'Failure Absense'라고 해서 일명 FA라는 제도였다. 쉽게 말하면 아무리 시험을 잘 봐서 100점을 맞아도, 결석 횟수가 많으면 점수가 0점이 되는 조금은 무시무시한(?) 학사 제도였다. 내가 신해철의 어머니를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FA학점' 때문이었다.  


'우리 애가 가수인데요...'


87년 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철학과 조교실에 중년 여성 한 분이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들어오면서 던졌던 첫마디는 생생히 기억난다. 그게 바로 '우리 애가 가수인데요...'라는 말이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은 음대나 미대는 물론이고 연극영화과 같은 것도 없었다. 당연히 '가수'라는 단어를 학교 안에서 사용할 이유는 결코 없는 곳이었다. 그러니 은근히 자랑까지 섞인 톤으로 인사를 한 뒤 조교실에 들어와 자기 자식의 결석 이유를 설명하는 학부모의 출현이 놀라울 수밖에. 그녀의 그런 인사는 87년 봄부터 시작해서 신해철이 자퇴서를 학교에 제출할 때까지 이어졌다.


신해철이 '무한궤도'라는 그룹으로 대학가요제 대상을 탄 시점은 1988년이지만, 실제로 신해철은 대학에 입학한 1987년부터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서 대학가요제를 목표로 열심히 음악을 만들었다. 당연히 학교 강의실보다는 연주실로 향한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당연히 어렵게 대학에 붙은 아들의 FA학사 경고를 모면하기 위해 그의 어머니가 학교로 향하는 날도 잦아들었다.  


한 번은 그런 신해철이 기습적인 '가투'(가두 투쟁)에 나갔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 신입생 때인 1학년 때의 일인 것 같다. 단순 시위 가담이 아니라 화염병을 운반했다고 하니 아마 잡혔으면 당시 집시법으로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화염병은 고사하고 유인물 몇 장만 손에 들고만 있어도 구속이 되던 시절이었다. 뮤지션의 꿈을 키워가던 대학 1년 차 신입생, 훗날 '마왕'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호령했던 신해철이 악보 대신 화염병과 유인물을 들고 가투에 나갈 정도로 그 시절엔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던 시대적 사명이 있었다. 그것이 통념이었고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했다.


'과연 신해철이 지금 살아 있다면, 세상을 뭐라고 노래할까?'


뮤지션의 꿈을 키우던 신해철은 1988년 대학가요제 수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듬해 1989년 앨범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그의 인생은 성공 가도로 진입한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학교를 떠나 대중들 속으로 들어갔다. 죽기 전까지 '마왕'이라는 호칭까지 들으며 살았으니 적어도 뮤지션으로서의 신해철은 분명 행복한 존재다. 음악과 함께 그가 학교를 떠나면서 '우리 애가 가수인데요'라며 조교실 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오시던 그의 모친도 학교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쓸 때 음악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다. 쓰고 싶은 글의 주제나 분위기에 따라서 듣고 싶은 음악도 다르다. 그래서 내 노트북 안에는 글을 쓸 때마다 사용하는 음악들만 모아놓은 폴더가 있다. 그 폴더 안에 오래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음악들이 몇 곡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였다.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난 약해질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이젠 아냐...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뿐...' 

('나에게 쓰는 편지' 중에서)


늦은 밤 스탠드 불빛 하나를 켜놓고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면서 일기를 쓸 때마다 들었던 곡이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들었던 노래였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친구의 속삭임 같은 울림이 가슴에 전해져 오는 음악이었다. 강한 비트에 마음을 실으면 우울했던 일도 말끔히 씻겨져 나가는 경쾌한 노래다.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나의 음악으로 완벽하게 풀어낸 일종의 인생 교재였다.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컴퓨터의 CD가 이유 없이 튕겨 날 때까지 그렇게 늘 듣고 들었던 곡이었다.


세상은 숨 가쁘게 변해가지만, 우리 안에 소중히 남아 있는 가치들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노랫말처럼 그는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려고 했다. 돈이나 명예, 멋진 자동차보다도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있다는 일종의 스스로를 향한 다짐, 그것이 스스로 자신에게 했던 약속이 아니었나 싶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그런 노래를 통해 힘들 때마다 위로를 받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거울 속에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있는 단 한 사람의 존재와 만나게 된다. 바로 자기 자신이다. 대한민국의 대중가요가 희망과 성찰을 동시에 선물한 적은 아마도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런 그가 2014년 10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한 무리한 시술이 가져온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담당 의사가 구속될 정도로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다. 무리한 시술도 문제였지만, 자신의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위험한 시술에 동의했던 신해철 본인의 욕망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우상의 죽음이 그렇지만 그의 죽음은 또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아직도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의 음악을 따라 배우는 후배 뮤지션들이 뒤를 잇는다. 여전히 그의 노래들은 노래방의 단골 메뉴들이다.


그가 죽기 1년 전쯤인 2013년, 그는 무척이나 피곤한 표정, 힘겨운 몸짓으로 시청 앞에서 열렸던 집회에 공연자로 참석을 했다. 2012년 대선 패배 이후 우울증에 빠져 있던 좌파의 사회, 정치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던 '노무현 대통령 추모제' 행사였다. 공연 좌석 맨 앞자리에 오늘의 문재인 대통령과 그당시만 해도 잘 나가던 정치인 한명숙 씨도 자리를 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신해철이 지금까지 했던 공연들 중에서 가장 힘들게 한 공연이 아니었나 싶다.


공연 영상은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대에 선 그는 어딘지 많이 아픈 사람의 모습이고 노래를 하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나 제일 압권은 공연 마지막 순간 그가 객석의 문재인을 비롯해서 좌파 정치인들을 무대 앞으로 불러내는 순간이었다. 공연만 잘 하면 됐지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그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아. 세상에 역시 공짜는 없구나'라는 지극히 상업적인 마인드가 하나였고, 또 다른 하나는 그의 노래에 열광하는 수많은 관중들이었다. 정치적인 행사에 울려 퍼지는 대중문화는 대중의 정치의식을 하나로 집결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는 세상에 없지만 그의 노래는 2019년 지금도 여전히 광장의 한구석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대중문화란 공기와 같아서 사람들의 호흡과 같이 한다. 알게 모르게 문화를 통해 생각이 형성되고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단단한 연대의식을 강화시킨다. 정치 집단이 대중문화를 장악하지 못하면 결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다. 87년 6월 항쟁도 그랬고, 지난 2017년 촛불 정국도 그랬다. 광장에 울려 퍼지는 대중가요는 광장에 선 대중에게 확신을 준다. 오늘의 정치 투쟁은 문화의 투쟁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표현해서 한 사회의 대중문화의 수준이 한 사회의 사상과 의식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상식과 통념의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온갖 정치적 이슈들은 87년 6월 항쟁 때만큼이나 싸워야 할 대상이 명확하다. 진리나 정의를 쪽수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양이 질을 좌우할 때가 있다. 정치 현장이 바로 그렇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 권력은 결국 국민의 한 표 한 표로 결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통념을 넘어서는 진영의 연대가 상식과 통념과 맞설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탄탄한 진영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진영의 문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의로운 집단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게 누가 됐든 대중문화를 결코 소홀히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 개개인은 지혜로울 수 있어도 군중은 지성의 논리와 무관하게 움직일 수 있다. 오늘날 신해철, '마왕'의 노래는 여전히 힘을 갖고 있고 통념과 상식을 뛰어넘어 강고한 진영의 이념, 진영의 연대를 지원한다. 하지만 나는 문득 만약 지금 신해철이 살아 있다면 과연 세상을 어떻게 노래할지 묻고 싶다.


모든 지나간 시간에는 언제나 교훈이 있다. 우린 모두 지나간 시간의 피교육자다. 그 시절 젊은이들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딱딱한 강의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거리로 뛰쳐나가 마음껏 소리를 지르는 것 자체가 공부였다. 그런 야성이 있었기에 거친 세상과 맞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 모두가 부러워하는 경제 발전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1987년 6월의 어느 날, 광화문에서 갑작스럽게 거리로 튀어나온 데모대에 둘러싸여 버스 한 대가 사거리 한복판에서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버스 기사가 화가 났는지 창문을 열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한 어린 학생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도대체 뭣 때문에 차를 막아놓고 못 가게 하는 거냐? 어디 이유나 한번 말해봐라!"


창문 너머로 자신을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다짜고짜 따지고 드는 기사에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어린 학생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네?! 그. 그니까... 군부독재... 타도하잔 대요...!"


그는 '군부독재 타도하자'가 아니라 3인칭 인용문으로 분명히 말했다. '타도하잔 대요'라고 말이다. 맨날 어디선가 듣긴 했지만, 막상 그런 구호조차 제 입으로 크게 외쳐 본 적이 없었던 탓일 게다. 어쩌면 자신감 없이 선배가 하는 걸 그대로 흉내를 낸다는 것이 그만 '하자'가 아니라 '하잔 대요'로 튀어나와버린 것일 게다.


그 말을 듣고 잠시나마 버스에 갇혀 답답하던 승객들은 물론이고 버스 기사까지 모두 껄껄거리며 웃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운동권이든 일반 학생이든, 정치적 지향점이 무엇이든 다 같이 그렇게 거리에 나와야 했던 시절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첫째는 '명분'이고 둘째는 '대중성'이다. 정치 사회운동이 이 두 가지를 잃어버리면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지금 '명분'을 잃고 있는 쪽은 과연 어느 쪽일까? 대중적 양식을 상실해가고 있는 집단은 누구일까?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귓가에는 여전히 신해철의 '나에게 쓰는 편지'가 들려오고 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들을수록 만약 '마왕', 그가 살아 있다면 지금 세상을 뭐라고 노래할지 진짜 궁금해진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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