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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Sep 24. 2019

프로타고라스 재판의 역설

'도전적인 삶을 위해 낯선 곳에 정착하자' (16)

며칠 전 한 일간 신문에 나온 짧은 글 한 편이 마음을 움직였다. '내게 보수냐 진보냐를 묻는 이들에게'라는 글이었다. (경향, 2019.08.18) 글 쓴 날짜를 보니 '조국 사태'의 논란이 점점 가열되어가던 지난 8월 중순이었다.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시점에서, 아니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보수인가, 아니면 진보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마음속으로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주제이기도 하다. 글의 결론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글이 갖고 있는 커다란 틀에서의 문제제기만큼은 의미 있게 다가왔다. 과연 왼쪽인가, 아니면 오른쪽인가의 문제 자체가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설명하는 틀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의 생각을 그런 방식으로 단순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의 생각은 반대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정치가 아니라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라고 나는 믿는다.


일단 내가 그 글에 공감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첫 번째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선을 긋고 그 선 위에 점을 찍듯이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나열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같은 사안이라도 다르게 해석될 수 있고,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서 언제라도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어차피 우리는 기억조차도 편의를 위해 조작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런 무의식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무의식적인 본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가능하면 세상을 단순하게 보려고 노력 중이다. 때로는 존 마에다처럼 '단순성'의 논리가 주는 명쾌함에 감탄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단순성의 논리로 풀어내려고 했던 존 마에다조차도 '위대한 예술품을 보면 끝없는 의문이 생기지만, 위대한 디자인을 보면 모든 게 분명해진다'라고 고백했다. 유형의 물질세계를 관통하는 과학의 논리와 달리 정신과 복잡 다양한 인간관계들로 구성된 사회적 논리는 다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유용성의 가치를 지니는 제품과 달리 정신의 위대한 상품들은 모두가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이 난다. 바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의 질문과 연결되는 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사에서도 이런 현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소피스트들에게 인간은 세상을 보는 주체였다. 자연철학자들이 단순성의 논리로 세상을 해석하려 했다면, 소피스트들은 인간의 세상을 복잡함 그 자체로 이해하려 했다.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 편에서는 이런 단순성의 논리와 이기적 인간 사회의 본성들이 한 편의 에피소드로 등장하고 있다.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이라는 일화가 그것이다. 


어느 날 프로타고라스는 한 청년으로부터 논법을 배우고 싶다는 부탁을 받는다. 문제는 돈이 없는 그 청년을 위해서 프로타고라스가 내 건 조건이었다. "돈이 없어도 나의 수업을 들어도 좋다. 다만 첫 재판에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내는 조건이다." 일종의 외상으로 수업료를 대신한 것이었다. 그런데 수업을 마친 그 청년은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놀기만 했다. 결국 프로타고라스는 한 가지 꾀를 냈다. 놀기만 하는 그에게서 수업료를 받기 위해서 그를 고소한 것이다. 


재판정에 불려 나온 청년에게 프로타고라스는 말했다. "재판에서 이기면 나와 했던 계약, 즉 첫 재판에서 이기면 그 돈으로 수업료를 내야 하는 것이고, 만약 재판에서 지면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벌금으로 수업료를 대신하게 되어 있다. 너는 결국 수업료를 물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은 오히려 이렇게 프로타고라스의 논리를 반박했다. "저는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재판에서 이기면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이며, 재판에서 지게 된다면 당신과의 계약에 따라 물지 않아도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재판장은 어떻게 판결을 냈을까?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아쉽게도 누가 재판에서 이겼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플라톤의 눈에 비친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은 혼탁해질 대로 혼탁해진 주관적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아테네 사회의 위험성이었다. 사회적 규범이나 행동의 양태만으로 인간을 규정짓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였다. 


프로타고라스의 재판은 누구의 입장에 서서 세상을 보는가에 따라 재판의 판결이 달라질 수 있다. 프로타고라스는 프로타고라스대로, 수업료를 안 낸 청년은 청년대로 자기 방어의 논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로 그 점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던 프로타고라스 사상의 한계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보수인가, 진보인가'라는 질문이 공허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언행일치와 관련된 문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그저 살기 위한 생활의 방편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있는 분위기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깊게 해 보면 언행일치를 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게 된다. 하물며 그런 언행일치의 가치를 보수와 진보에 대입시킨다면 그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강남좌파'라는 유행처럼 번질 때가 있었다. 한 10년 전쯤의 일이다. 그때 한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은 '진보주의자는 고급 세단을 타거나 요트를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라며 지금의 조국 같은 강남 출신의 좌파들을 옹호하고 나섰다. 그는 더 나아가서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강남좌파들이 나와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정리해보면 흥미로운 지점들이 발견된다. 그 변호사 출신의 정치인이 했던 말처럼 '부자들도 서민의 친구로서 서민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행동할 수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동일하게 정반대의 논리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좌파 이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부자들의 가치관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부자의 미덕에 관대했는가? 한국 사회 강남좌파들의 논리는 바로 이 지점부터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나는 여태껏 강남좌파들의 주장 속에서 부자들의 가치를 존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있는 사람이 서민들의 가치를 위해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려면, 동일하게 서민들 역시 부자들의 미덕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민을 이익을 대변하는 자신들 강남좌파들 역시도 갖은 자들이 갖고 있는 사회적 미덕과 장점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어땠는가? 적어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조국 사태'의 본질은 서민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사람들이 부자의 미덕을 존중하기는커녕 그들을 비난하고 고발을 서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못 갖은 자들의 울분을 해소하는 청량제가 되었다. 물론 그렇게 해서 많은 이익을 본 사람들은 바로 강남좌파들 자신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들 역시 뒤로는 엄청나게 부자들의 삶을 모방하며 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토록 증오했던 갖은 자들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한 불법적 행태들을 그들 스스로 자행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평생 반미, 친북을 사상을 삼아왔던 한 유명 정치인은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서 반미, 반일을 부르짖으며 자신은 가장 미국적이면서도 가장 부르주아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런 강남좌파, 정치인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공직자 재산신고 때는 평범한 직장인 흉내를 내던 정치인이 1년에 1억이 넘는 학비가 들어가는 미국 대학교에 자식을 유학시키고, 그의 자제는 온갖 명품들로 치장하고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조국 사태'는 바로 그 정점에 있다. 지금까지 그런 이율배반적인 삶의 논리가 대중들에게 먹혀들어갔다는 현실이 더욱 놀랍다. 


물랐던 것인가? 아니면 알아도 모른 척했던 것일까? 바로 거기에 이 사상의 위험성이 있다. 그건 3천 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있었던 위험한 생활의 논리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이지만 그런 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사회는 무너진다. 대중의 삶을 지탱하는 원칙의 기둥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과연 지금 우리에게 '진보인가, 보수인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그보다 더 가치로운 질문들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질문을 바꾸면 세상은 조금씩 달라 보이지 않을까. 그 질문에 답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물음을 제공하고 있다. '과연 어떻게 세상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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