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적인 삶을 위해 낯선 곳에 정착하자'(15)
나는 세상을 인문학의 틀로써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과학자들이 연구나 실험으로 세상을 보는 것처럼, 검사나 판사들이 법의 틀로서 사건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세상을 본다. 나에게 인문학의 틀이란 거창한 것은 아니고 그저 '인간적인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따라오는 질문은 '뭐가 인간적인 것인가?'라는 문제가 될 것이다. 문득 답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란 사실에 주춤하게 된다. 그래도 끊임없이 그 근본적인 질문을 하면서 세상을 살려고 노력 중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질문 자체가 가치롭기 때문이다.
나는 한 사회가 발전하는데 필요한 사상의 힘을 믿는 편이다. 그런 사상은 대중의 집단의식이 뭉쳐져서 만들어질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개인의 영웅적이고 위대한 생각과 행동이 집단을 이끄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여러 곳에서 비슷한 생각들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경우도 있다. 마치 홀씨가 바람에 날려 이곳저곳에 피어난 민들레꽃처럼 생각이 곳곳에 피어난다. 그런 꽃들 덕분에 느끼고 생각할 거리들도 많아진다.
그렇다면 여기서 도대체 사상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정의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사상'이란 쉽게 말해서 생각과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보다 정확히 하자면 생각과 행동의 일치다. 언행일치 역시 사상의 또 다른 표현 형태다. 생각의 실천이라고 쉽게 표현할 수도 있다. 위대한 사상가란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행동으로 옮겨서 실천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그게 뭐가 됐든 사상이란 인류를 위해 투쟁할 가치가 있는 생각들을 향해 자신을 불구덩이 속으로 던지는 각오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간디는 자신의 비폭력 저항주의를 글과 말, 그리고 행동으로 옮겼다. 숱한 유혹과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했다. 그래서 결국 유혈 충돌이 아니라 평화로운 방법으로 인도의 독립을 가져왔다. 당시 인구 3억의 인도가 영국과 결사항전을 벌였다면 아마 아시아와 유럽의 역사는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간디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인도 국민과 인도라는 국가의 독립을 위해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창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사상가의 길은 전례가 없는 길이기도 하다. 기업적인 마인드로 치자면 창조적인 길이다. 그걸 위해 간디는 목숨을 건 21번의 단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다. 18살부터 시작해서 78세까지 60년 동안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일치시킨 것이다. 비록 아직은 가난한 나라지만 인도의 가능성은 간디의 철학에서 나올 것이다. 그게 사상의 힘이다.
집단이 사상을 만든 경우도 있다. 1852년에 일어난 영국 해군 수송선 버큰헤드호에서 일어난 사건 하나가 이를 잘 설명해준다.
1852년 2월 동이 트기 전 차가운 새벽, 군인 472명과 일반 승객 162명을 태우고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지나던 버큰헤드호가 암초에 부딪혀 좌초한다. 배는 두 동강이 났고 승객들은 시시각각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배의 갑판 위에서 울부짖으며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구조할 수 있는 구조선이 도착하기엔 너무 먼 거리.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제 세 척의 구명보트 위에 올라타는 방법밖에는 없다. 한 척에 60명씩 모두 합치면 180명 정도가 탈 수 있는 구명보트 세 척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전체 인원 634명 중에서 누가 저 배에 탈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만 남은 상태.
과연 절체절명의 순간, 그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순간 뱃전 위에서 갑자기 북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갑판으로 집결한 병사들은 함창의 ‘차렷’ 구령에 정렬했다. 병사들은 함장 지시에 따라 횃불을 밝힌 뒤 차분하게 여자와 아이들을 구명보트에 태워 구조 준비를 끝냈다. 구명보트 안에는 약간의 자리가 남았다. 구명보트에 탄 승객들이 ‘여유가 있으니 뛰어내리라’고 소리쳤지만 병사들은 끝내 꼼짝하지 않았다. 보트가 휘청거려 전복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군인 472명은 구명보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거수경례를 했고 결국 버큰헤드호와 함께 전원 수장됐다.' (한겨레, 2014.04.18)
장교와 병사들로 구성된 472명의 영국 해군 병사는 그렇게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평소 자신들의 생각이었던, 국가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한다는 바로 그 신념을 행동을 실천한 것이다. 여자와 어린이가 먼저, 라는 훌륭한 전통은 바로 이 버큰헤드호에 의해 생겨났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다. 나는 살아있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은 그런 명예로운 죽음의 가치를 소중히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튼. 버큰헤드호에 얽힌 사연은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 직후 많이 인용되었던 기사다. 비극적인 죽음, 무능한 구조대, 심지어 그 책임을 지고 정치의 무대를 떠난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다. 문제는 버큰헤드호의 교훈에 담겨 있는 진짜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이 기사의 출처다.
영국 해군 472명의 명예로운 죽음을 기록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1859년 영국의 작가, 새무엘 스마일즈가 쓴 <자조론>에 기록되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바로 그 유명한 명언으로 유명한 스마일즈의 바로 그 책 <자조론>이다. 버큰헤드호 472명 해군 병사들의 놀라운 희생을 가치롭게 기록한 것은 한 권의 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국인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자신의 희생을 마다하지 않고 불길로 뛰어들 수 있는 용가는 그런 모범적 사례들이 있기 때문이다. 해상 조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여자와 아이를 먼저 구조하는 전통은 여기서 탄생했다. 그것이 사상의 가치이며 역할이다.
그렇다면 사상이 없는 민족, 사상의 가치를 무시하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사람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개개인이 믿는 삶의 가치다. 따라 배우고 싶은 사상이 없이 행동이 있을 수 없다.
사상이란 것은 이런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내 가족의 이익과 국가, 사회, 민족이라는 공동체의 이익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결국 한 나라의 사상이 그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으로는 사상을 실천하는 개인들의 삶을 주목하게 된다.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고 훈훈한 감동적인 스토리를 찾아 나선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 쉽지는 않은 문제다. 오히려 말과 행동을 달리해서 이득을 보기도 한다. 선진적인 사회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책임을 가장 무겁게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사상의 형태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상가를 존중하고 그들의 삶을 응원하는 것은 그들을 통해 각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사상이 없는 사회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보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 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일수록 말과 행동을 일치는 사람의 존재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한 사람의 말과 행동 때문에 온 나라가 어지럽다는 것은 뒤집어 놓고 보면 그만큼 사상이 중요하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여전히 단지 자기편(?)이라는 이유만으로 행위 부도덕성을 감싸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런 거 하지 말라고 논리가 있고 윤리가 있는 것이다. 한 개인으로 보자면 양심의 문제다. 그런 개인의 품격이 사회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단순화시키자면 결국 한 나라의 품격은 국민이라는 개별적인 품격의 집합이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를 따지는 것조차 쉽지 않다. 예전에는 그나마 나를 대신해서 옳고 그름을 판정해줄 존재들이라도 있었다. 판정의 기준이 혼탁해지면서 결국 모든 공은 개인에게 넘어가고 있다. 모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전체에서 개별로의 이행. 그런 점에서 근대 이래 우리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이 이렇게 중요하게 부각된 적도 드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어쩌면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이럴 때마다 더욱 중요해지는 질문은 바로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 라는 물음이다. 그 질문은 여러 번 반복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질문 자체가 가치로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