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적인 삶을 위해 낯선 곳에 정착하자(14)
나에게는 몇 가지 글쓰기의 원칙이 있다. 뭐 거창한 것은 아니다. 그저 글을 쓸 때의 마음속 다짐 같은 것이다. 우선 첫 번째는 가급적이면 남을 비판하는 내용은 피하자는 원칙이다. 굳이 말을 만들어 본다면, '비판 자제의 원칙'이라고나 할까. 세상에는 많은 글들로 넘쳐난다. 비록 종이의 물성을 지닌 책이라는 존재 형태와는 점점 작별을 고하고 있지만, 어쨌든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글이 줄어드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가만히 글들 사이를 걷다(?) 보면 유난히 비난이나 비판을 담은 글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비판의 글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든다. 때로는 선정적인 비판을 통해서 이득을 보는 글들도 있다. 생산적인 가치를 통해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는 성공에 대한 고전적인 사고방식에 비추어 보더라도 남에 대한 비판의 글을 통해 자신을 글을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것 같지 않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다.
물론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비판적 텍스트들이 지닌 가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문명사에서 거의 시발점에 위치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봐도 그렇다. 비판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격언에서 중요한 것은 '너 자신'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에 있다. 화살이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현혹시켰다는 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묵묵히 죽음의 길로 들어섰던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통해서 그렇게 그려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남을 비판하기는 쉬우나 근본에 대한 분석, 객관성의 확보라는 논리로 무장되지 않을 경우, 비판은 쉽게 비난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으로 돌아간다면, 아테네 시민들을 찾아가서 일일이 대화를 나누며 진실을 찾고자 했던 그의 땀과 눈물에 해당되는 얘기다. 적어도 그런 성찰이나 객관성의 확보 없이 타인이나 특정 사안에 대해서 비판하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두 번째 원칙은 첫 번째 원칙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데, '창조적 글쓰기'에 해당된다. 세상을 보는 나의 시선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가급적이면 세상을 밝게 보려고 한다. 낙천적이지는 못하지만,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하는 입장인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의 아름다운 인생 경험담이나 역경을 딛고 이룩한 성공 스토리 같은 것을 담은 글쓰기가 마음으로 더 와 닿는다.
세 번째는 다른 사람의 말보다 나의 시선에 주목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본 것들, 내가 경험하거나 직접 자료를 찾아서 꼼꼼하게 확인한 것들로 글을 채우겠다는 마음의 약속 같은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과 상황들을 일일이 자료를 찾아가면서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글쓰기에 있어서 만큼은 가급적 원전이나 1차 자료를 확인한 다음에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나의 시선에 주목하려고 노력할수록 객관성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점이다. 얼핏 나의 시선이라는 주관성과 객관적인 자료 사이의 불일치처럼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글쓰기의 영역에서는 그리 혼란스럽지 않다. 주관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객관성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이런 고민은 일찍이 감성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던 칸트의 비판적 방법론에서도 잘 드러난다.
어차피 세상 모든 일들은 내가 바라보고 싶은 대로 재구성되게 되어 있다. 칸트식으로 하자면,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인간이 인식한 그대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대상이란 인간이 인식한 그 어떤 것일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아는 대로 세상은 존재하게 된다.
심지어 기억까지도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중심으로 재구성될 정도로 인식에는 주관적 편향성이 강하게 존재한다. 그런 주관성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억한 것을 다시 확인해보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맨 처음 자료를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나의 경험, 나의 시선에 주목하려면 역설적으로 타인의 경험, 타인의 시선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원전이나 1차 자료들이다. 누군가 해석한 것을 다시 보기보다는 해석되기 이전의 자료를 해석하는 것이 결국엔 주관적 오류를 줄일 수 있는 한 방법이 된다.
네 번째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는 늘 내가 틀릴 수 있을 것이란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불안감이 어쩌면 글쓰기의 원칙들을 만들어놓은 것은 아닐까 싶다. 내가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남에게 가르치려 들기도 어렵다.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혹은 남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싶어서 글을 쓰는 사람들과는 출발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 나의 글쓰기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다양성'이다. 세상은 어차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며, 나는 그 다양한 개인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양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게 열린 사회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생각, 타인의 경험, 누군가의 주장에 겸허하게 귀를 기울이는 순간 그로부터 배울 것도 생겨난다.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살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세상의 그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직접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대통령에서부터 삶의 희망을 잃고 서울역 지하도에서 노숙하는 홈리스까지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는 직업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자들 역시 그런 삶을 살겠지만, 아무래도 모든 것을 사건으로 접근하는 기자들보다는 다큐멘터리 세계가 좀 보드라운(?) 부분이 있다. 인과 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적인 공감에 초점을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몇 가지 글쓰기 원칙을 갖고 한 몇 년 정도 글쓰기를 해오고 있다. 어차피 프로그램 기획서나 사업 계획서 같은 것도 시작은 글에서부터 시작된다. 창의적인 삶, 조금은 의미 있는 자신과의 솔직한 내면을 만나고 싶다면 글쓰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하루하루의 일기가 곧 자신의 내면을 강화하는 글쓰기의 방법이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어쩌면 십 대 어린 나이부터 쓰기 시작했던 일기를 쓰는 버릇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결국 나에게 글쓰기의 원칙이란 생활의 원칙이다. 말과 글이 일치하고, 또 내가 쓴 글이 결국 내 행동을 규정하는 것. 얼핏 당연한 것 같지만 세상엔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물론 나의 경우 유명 작가도 아니고, 글쓰기로 무슨 큰돈을 번 적도 없다. 솔직히 '도전적인 삶을 위해 낯선 곳에 정착하자'는 이 글의 시리즈를 내리고 싶을 정도로 삶도 팍팍하다. 사는 게 힘든데 무슨 원님 타령 같은 소리를 하고 있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록 실패할지 모르지만, 나의 글쓰기가 나의 삶을 배신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마음에 품은 글쓰기의 원칙들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유가 뭘까... 어쩌면 바로 당신?
글: 김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