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통의동 골목길 까페 이야기
‘까페 에세이’ (11)
요즘 우리 가게 간판 밑에는
중고책들을 판매하는 가판대가 하나 있다.
공간이 점점 비좁아지는데 비해서
책을 놓을 곳이 없어서
잘 보지 않는 옛날 책들을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책일 수 있다 싶어서
같이 운영하는 파트너가 아이디어를 냈다.
생각보다 반응도 좋다.
하루에 몇 권씩은 꼭 팔리고 있으니 말이다.
일요일 늦은 밤.
가게 문을 닫고 정리를 하려고
가판대에 비닐을 덮었다.
매일 테이블을 들여놓을 수도 없는 일이라서
그냥 비닐을 하나 사서 그 위에 덮고 있다.
별로 힘은 안 드는 일이지만
그래도 매일 덮었다 걷었다
사실 좀 귀찮기는 하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는 넓직한
비닐 덮개를 접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그날도 그렇게 비닐을 접고
마무리를 할 즈음이었다.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한 여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책을 사고 싶은데...가게 문 닫았나요?"
전에도 몇 번 와서 책을 사간 여성이었다.
"네. 제가 도와드리죠."
힘겹게 덮은 비닐을 다시 걷어낸다는 게
좀 귀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책을 사겠다고
온 손님인데 매정하게 문 닫았다고
말하기도 좀 그랬다.
한 권에 2천 원 하는 솔직히 우리 입장에서는
별로 매출에는 도움이 안 되는 물건들이다.
솔직히 새 책들을 놓을 공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내놓은 중고책들이었으니
오히려 사주는 사람이 고마운 것들이 맞다.
어쨌든 손님이 왔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잠시 할 일을 일부러 만들어서
책손님이 어서 책을 사가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손님이 현관문을 열고 다시 들어왔다.
"오늘은 살 책이 없네요..."
"아! 네. 그러세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책손님은 떠났고
나는 몸에 익힌 매뉴얼대로
다시 가게 밖으로 나가
중고책을 비닐로 덮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왠걸!
내가 처음 덮었던 원래 그대로
비닐이 덮여져 있었다.
책손님은 수고스럽게도
자신이 손수 비닐까지 덮고 떠났던 것이다.
옆에서 그 광경을 파트너도 물끄러미 지켜봤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시선이 교차했다.
"저런 게 매너지!"
"그러게..."
"저런 걸 꼭 가르쳐야 아는 건가?!"
"그 여자 분 참 교양있네..."
그래. 맞다.
생각해 보면 매너란 결국
타인에 대한 배려다.
육중한 빌딩의 유리문을 열고
나갈 때 뒤에서 사람이 오는 걸
보고 그냥 고개도 돌리지 않고
나가기보다는 잠시 동안 뒷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그 짧은 시간, 1,2초 동안의
타인을 위한 배려가 결국은
사람을 빛나게 한다.
그렇게 문을 잡아준 사람 덕분에
하루 종일 기분이 좋을 때도 있다.
어쩌면 그날 밤 책손님은
주인이 번거롭게 비닐을 다시 덮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짧은 순간이지만
자신에게 책을 살 기회를 제공한
주인을 위해서 다시 비닐을 덮어놓고
떠난 것이다.
그리고 난 그녀의 배려 덕분에,
그녀의 매너 덕분에 기분 좋게
하루를 마감했다.
일상의 작고 소소한 이야기를
찾아서 서촌, 통의동에 자리를 잡은 지도
벌써 4년이 되어 간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매너 있는 사람들과 매너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희비가 교차했다.
매너가 없는 사람은
결국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패트병에 소주를 몰래 넣고 와서
마시던 사람에서부터 무단으로 갖고 와서
마셨던 고량주 파티까지...
그런데 어쨌든 그들도 우리 멤버였다.
'김PD의 통의동 스토리'를 사랑한다
말들 했던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매너 없이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공간에 사과를 하고 떠난 사람은 없었다.
'그냥 탈퇴를 하고 안 보면 그만이지 뭐...'
아무리 SNS 세상에서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게
그런 게 아닌 법인데...
사람은 누구나 떠날 때의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하는 법이다.
이번 일은 나에게도 많은 질문을 남겼다.
과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걸까?
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사랑의 힘이라 믿는다.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사랑하려는
노력이 없이는 인간은 결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다.
지난 며칠 동안 이 공간에서
벌어진 모든 논란에 대해서
아쉬운 점이 많다.
'과연 김PD의 통의동 스토리라는
공간은 어떤 곳이었을까?'
그 정확한 답을 찾는 일은
시간이 좀 지나야만 가능할 것 같다.
어쨌든 늘 그랬듯이
서촌 통의동 골목길에서
'김PD의 통의동 스토리'가 추구했던
가치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빌려서
하잖은 중고책 하나를 사려다
그냥 발길을 돌리고 친절하게
비닐을 덮고 떠난 그 손님에게
감사하다 인사를 전하고 싶다.
'당신의 매너가 빛바랜 중고책들을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김덕영 (작가, 다큐멘터리 PD)
저는 서촌의 작은 골목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7전8기까지는 아니라도 같이 도전하고 싶으신 분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김덕영의 책들
서촌 골목길 까페, 그 3년의 기록,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인생에서 성공이란 때론 좀 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49금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 (책세상), <세상은 모두 다큐멘터리였다> (당대), <유레일 루트 디자인> (오픈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