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맨 2, 멀린을 추모하며 (RIP Merlin)...
'김덕영의 인문학 여행' (79)
영화 <킹스맨 2; 골든 서클>을 보기 전에 이 영화가 뭐 대단히 엄청난 영화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잘 빠진 슈트를 차려입은 영국 남자들이 첩보원이 되어서 활약하는 영화. 재미는 있지만 뭐 명작이라고 말할 것은 별로 없는 그런 영화 정도가 아닐까. 특히 마크 스트롱(Mark Strong)이 연기하는 멀린은 더 그렇다. 도수 높은 안경 너머로 늘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던 남자. 최고의 첩보원을 키우기 위해서는 침실을 물탱크로 만들기도 하는 잔인한 남자. 킹스맨이란 조직의 실무를 총괄하는 똑똑한 실장 님 같은 역할. 킹스맨의 멀린은 그런 캐릭터였다.
그런데 그 멀린 때문에 단순히 오락 영화로 치부될 수 있는 '킹스맨'에 명장면 하나가 탄생했다. 유튜브를 비롯한 SNS에서는 멀린이 마지막 동료를 희생하며 자폭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멀린을 추모하는 댓글이 줄을 잇고 있다. 살아 있는 배우의 죽음이 아니라 캐릭터의 죽음에 애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죽어가며 큰 소리로 불렀던 'Take me home, country roads'은 갑자기 인기 급상승했다. 실제로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젊은이들 가운데는 이 노래가 무슨 노래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1971년 존 덴버라는 미국 가수가 불렀던 컨츄리 송 'Take me home, country roads', 존 덴버는 이 노래로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명예의 전당에도 올랐다. 말 그대로 20세기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한 팝송이다. 나의 경우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어로 된 가사를 외웠던 팝송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기억에 오래 남는 노래이기도 하다.
어쨌든 만약 극 중에서 배우가 노래를 부른 영화들만 놓고 순위를 매겨야 한다면, 멀린의 마지막 장면은 감히 최고 중 하나였다. 뜨거운 동료애, 자기희생, 당당함, 전편의 광고 카피처럼 '매너가 남자를 어떻게 만들어주는지' 그 진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때로는 이렇게 배우 한 명이 영화를 위대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솔직히 주인공 콜린 퍼스와 태런 에저튼에 비하면 마크 스트롱의 인지도는 국내에선 형편없다. 하긴 약간 킬러 같은 이미지와 모나고 각진 턱과 얼굴에 첫인상부터 호감이 가는 스타일은 아니다. 이런 핸디캡을 스스로 멋지게 날려버린 영화가 있었으니 존 까레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팅커 테일로 솔저 스파이>란 영화였다. 이미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크 스트롱은 극중 짐 프리도 역을 맡았다. 영국 첩보부에 숨어든 이중 스파이를 색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짐 프리도는 뜻하지 않은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서 죽음 직전까지 간다. 다행히 목숨은 살리지만 역시 작전 실패의 책임을 벗어날 수는 없는 법. 그런 소심하고 나약한 짐 프리도의 역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마크 스트롱이다.
그는 1963년 런던에서 이탈리아 아버지와 오스트리아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태어났다. 그에게서 이탈리안 혈통이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다. 강인한 이미지 때문에 첩보 액션물에 단골로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우수에 젖은 눈동자 때문인지 단지 근육질 남성상만을 연기하지는 않았다. 영화 극 중에서 노래를 한 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996년에 발표된 'Our friends in the North'라는 드라마에서 록밴드 싱어로 노래를 하기도 했다. 묵직한 저음 베이스에 딱딱 꺾이는 브리티시 악센트, 그가 노래하는 장면을 찾아봤더니 역시 예상 그대로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 어디서 그런 우수에 젖은 느낌을 연출할 수 있는 것인지...
영화 '킹스맨 2'에서 멀린 역을 맡은 마크 스트롱의 마지막 노래도 역시 그랬다. 감독은 이 장면 하나에 온 힘을 쏟은 흔적들이 곳곳에 드러난다. 처음 도입부터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게 편곡된 'Take me home, country roads'가 울려 퍼진다. 스코틀랜드 민요에나 어울릴 듯한 백파이프가 은은히 더해지면서 뭔가 장중한 분위기를 암시한다. 감독은 존 데버의 이 노래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와 비슷한 느낌을 얻었다고 말했다. 백파이프 연주를 삽입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모든 게 멀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장치였다.
국제적인 마약 조직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된 킹스맨 요원들. 에그시(태런 에저튼)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해리(콜린 퍼스)를 만난다. 이미 킹스맨 본부가 마약 조직의 미사일로 모두 박살난 상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동료 멀린과 함께 캄보디아 숲 속에 있는 마약 본부를 기습, 소탕한다는 간단한 줄거리다. 물론 다양한 볼거리와 액션 씬이 곳곳에 등장해서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다. 다만 영화관에서 정자세를 하면서 볼 영화는 아니란 뜻이다. 팝콘 먹으면서 봐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을 영화였다. 그런데 멀린과 에그시, 그리고 해리가 정글 속 마약 본부를 기습하려던 순간 일이 꼬인다. 곳곳에 숨겨놓은 지뢰가 문제였다. 에그시가 지뢰를 밟은 것이다. 첨단 장비의 대가 멀린은 가슴에서 지뢰의 기폭장치를 순식간에 얼려버리는 냉각기를 꺼내 에그시를 구한다. 그리고 자신이 에그시가 밟고 있던 지뢰를 대신 밟는다.
"어서 가! 놈들을 해치워야지! 여긴 내가 맡을 테니..."
자신의 죽음 암시하는 듯한 말과 함께 멀린은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감시병들을 따돌리기 위한 속임수였다. 그것도 지뢰를 발로 밟고서 말이다.
"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뭔지 아니?"
영화 속에서 유독 말이 없던 멀린은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다고 말한다. 관객들은 냉정한 멀린의 캐릭터에 안 맞는 엉뚱함에 좀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모든 건 이 하나의 순간을 위해 마련된 예고였다. 그렇게 멀린은 동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다. 그 마지막을 자신이 그토록 부르고 싶었던 노래를 큰 소리로 부르면서 말이다.
처음 감독은 이 장면을 지극히 오락적(?)인 관점에서 찍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린은 에그시나 해리에 비하면 좀 약한 존재감을 지닌 캐릭터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주인공들의 나이가 워낙 많이 차이가 나다 보니 멀린과 에그시는 동료라기보다는 아버지나 삼촌 같은 존재로 부각되었다. 늘 말썽만 부리고 투정만 하는 젊은 에그시의 뒤를 돌봐주었던 든든한 남자. 그가 마지막 또 한 번 에그시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장면이 바로 '멀린의 죽음'이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이 영화를 소파에서 기대서 팝콘 먹으면서 보던 사람들도 자세를 바로 잡고 보지 않았을까.
영화적으로 '멀린의 죽음'은 잘 짜인 구성이다. 편집도 잘 됐고 멀린 역을 맡았던 마크 스트롱의 어눌하면서 자연스러운 음색도 좋았다. 하지만 역시 음악의 힘이 최고다. 존 덴버의 '컨츄리 로드'가 이렇게 웅장하게 들려오리란 걸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죽이러 총 들고 다가오는 적들 앞에서 멀린은 꿈쩍도 안 한다. 모든 건 아들 같은 에그시를 위해서였다. 심지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라고 정글의 나뭇가지들을 베어버린다. 두 손을 벌려 죽음을 맞이하는 멀린의 모습은 그렇게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마지막 부른 '테이크 미 홈 컨츄리 로드'와 함께...
원래 시나리오 상에서는 멀린이 지뢰를 자폭한 이후에 하반신이 날아간 상태에서 다시 에그시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에그시의 결혼식에도 의족을 하고 찾아가는 설정이었다고 한다. 감독은 촬영이 끝나고 편집을 하면서 '멀린의 죽음'이 예상 밖으로 너무도 잘 나온 것을 확인하고는 모든 군더더기들을 삭제해버렸다고 한다. 참 잘한 일이다. 의족을 달고 다시 나타난 멀린이라니....
아무튼 아주 인상 깊은 한 장면이었다. 아들 같은 존재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 멀린의 모습은 곧 어떻게 하면 멋진 기성세대가 될 수 있는가를 깨닫게 했다. 1970년대 팝송 하나를 이렇게 재구성해서 세대감을 날려 버린 감독의 연출력에도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신구가 조화를 이루며 하나를 향해 나아간다. 어쩌면 그런 모습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이룬 것에 대한 부러움 같은 것으로... 꿈이란 그렇게 현실에선 용기가 없어서 이루지 못한 것들에 도달하는 기쁨을 준다. 아니 그렇게 꿈을 간직하면 언젠가는 실제로 그 현실에 도달한다. 그것이 꿈을 지닌 영화들이 갖고 있는 매력일 것이다.
나는 지금 낭독극을 한 편 제작하고 있다. 프로 한두 명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이 아마추어로 구성된 연극팀이다. 그들에게 꼭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 아마추어라고 주눅들 필요도 없다. 당당하게 자신의 꿈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사람. 그가 바로 위대한 사람이다. 때로는 배우 하나가 어떻게 위대한 작품을 만들는지를 꼭 확인해 보길 바란다. 어느 네티즌의 말처럼 '매너가 멀린을 만들었다'
글: 김덕영
낭독극 연출을 맡고 있는 김덕영은 서촌의 작은 골목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같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으신 분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김덕영의 책들
서촌 골목길 까페, 그 3년의 기록,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인생에서 성공이란 때론 좀 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49금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