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 아이덴티티'를 통해 본 근대 계몽주의의 그늘
'김덕영의 숨은 명작 찾기' (1)
새롭게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작품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혹평이나 저평가되는 작품들도 많습니다. 때로는 어처구니 없게도 제목이 어렵고 난해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또 관습이 다르기 때문에 무시 당하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어차피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 근본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담고 있는 작품은 결국 인간 이해에 대한 '진정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정성'의 잣대로 세상에 저평가되고 숨겨진 작품들에 조금 빛을 주고, 화분에 물을 주듯 물줄기를 뿌려주고 싶습니다. 앞으로 그런 작품들을 발견하는 대로 이 공간을 통해 소개할 생각입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첫 작품은 <히든 아이덴티티>입니다.
감독:
브래드 앤더슨
원작:
The System of Doctor Tarr and
Professor Fether,
에드가 앨런 포
주연:
케이트 베킨세일
짐 스터게스
밴 킹즐리
마이클 케인
제작: 2014년
국내 개봉: 2017년
국내 개봉 당시 누적 관객수 2,430명이 말해주듯이 흥행 면에서 참패를 기록한 영화였다. 배우 배두나의 남자 친구이었던 짐 스터게스나 '워터월드'의 케이트 베킨세일의 고정팬들이 국내에도 상당수 존재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말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다. '우울하다', '뻔한 결말', '불쾌하다', 평단의 비평들도 대충 이런 분위기였다.
19세기의 마지막 해인 1899년을 배경으로 영국 스톤하스트 정신병원에서 일어난 음울하고 히스테릭한 인물, 그들의 숨겨진 비밀을 추적하면서 영화는 전개된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원작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추리 소설의 대가 애드가 앨런 포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근대 기술문명에 대한 에드가 앨런 포의 염세적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모든 작품이 그렇듯이 어떤 시선으로 이 영화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해석과 감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정신병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음산하고 히스테릭한 분위기에서 벗어나서 근대 심리학의 역사나 근대 인간관이나 철학사적인 흐름 등으로 좀더 시야를 넓혀서 이 영화를 본다면 흥미로운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근대 과학, 계몽주의가 합리성의 이름으로 포장했던 야만의 광기를 고발하고 있다. 감히 이 영화를 '숨은 명작 찾기'의 대열에 올려놓으려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이성 만능주의의 여파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 곳곳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인간을 배제한 과학이 진정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세기 말, 며칠 후면 세상은 1900년대라는 새로운 시기로 진입한다. 20세기라는 새로운 세기적 전환기, 역사를 따져 보면 1900년은 프랑스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린 해이기도 하다. '벨 에포크(belle époque)'라 불리는 아름다운 세기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과학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진보적인 역사관이 지배했던 시기였다.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나 <80일간의 세계일주>와 같은 공상과학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시기였다.
영화 속에서도 이런 과학 기술, 기계 문명에 대한 낙관주의는 곳곳에서 등장한다. 어떤 면에서는 좀 지나칠 정도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옥스퍼드 의과대학 수업 시간, 정신병 환자(케이트 베킨세일)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교수의 패기 넘치고 무모한 강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심지어 학생들이 보는 앞에 정신병의 원인이 되는 인자들이 여성의 자궁을 통해 전염된다면서 여성의 음부에 손을 집어넣기도 한다. 계몽주의, 합리주의가 과학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되면서 얼마나 광기에 사로잡힐 수 경고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애초부터 단순한 과학적인 실험 몇 가지로 인간의 본질과 본성을 전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 자체가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과학은 계몽이란 미명 아래 인간을 구속했고 온갖 비인간적인 실험의 도구들이 이용되었다. 전기 고문, 물고문, 아편 복용 같은 것들이 버전히 치료의 목적으로 권장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영화를 이런 시각으로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 한둘 아니다.
이성적인은 합리적이며, 감성적인 것은 비합리적이란 주장은 이미 고대 플라톤의 철학에서부터 등장한다. 플라톤에게 지상의 모든 물질적 존재들은 천상의 이데아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본질적인 것을 찾기 위해서는 세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상을 이처럼 이분법적으로 분리시킨 플라톤의 사상 덕분에 이성적인 언제나 고결하고 육체적인 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감옥에 불과하다는 논리가 형성됐다. 감정에 휩싸이는 육체만으로는 인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는 믿음이 발생한 것이다.
중세를 거치면서 이런 플라톤 사상은 기독교와 결합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종교적 계시나 믿음, 그리고 그에 따라 사후에 영혼이 돌아갈 천상의 세계만이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삶의 목표가 되었다. 이런 종교적 맹신주의에 구멍을 낸 것이 근대의 경험론자들이었다. 그들은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진실에 도달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며 과학과 논리의 영역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했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삶을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술들이 속속 발명되었다. 세균의 발견, 무선 통신, 기관차, 비행기 등이 인간을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합리적인 세상이 도래했다는 믿음은 그렇게 생겨났다.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도 기초를 따지고 보면 결국은 세상을 골고루 평화롭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합리주의에 기초한다.
하지만 제국주의로부터 약탈을 당한 식민지 민족 어느 누구도 평화로운 세상을 보장받지 못했다. 근대 계몽주의가 과학기술의 총칼로 무장되면서 힘없는 사람들, 소수 민족들은 무차별적인 박해를 받았다. 그것이 계몽의 말로였다. 영화는 계몽의 어두운 민낯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미친 사람이 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미친 사람으로 규정한 이성이야말로 야만적이고 광기에 사로잡힌 비이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발한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과 악이 공존하듯이, 인간의 심리 속에서도 이성과 광기는 공존한다. 그리고 광기의 근원으로 현대 심리학은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영역에 눈을 돌리고 있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리비도와 같은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의 세계와 밀접한 연관을 이룬다. 그런 개별적인 무의식의 영역을 무시하고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계몽의 잣대를 적용한 것이 근대 합리성의 한계였다. 권력과 권위를 장악한 자들의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곧바로 정신병원에 수용될 수도 있는 도구화된 합리성이었다. 영화에서 남편의 귀를 물어뜯고 빗으로 눈을 다치게 한 행동 때문에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던 여주인공의 행동이 단죄받을 수 있었던 것도 가부장적인 위계질서 내에서 여성은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남편의 성적 학대나 폭력에 시달려 왔던 존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녀가 남편에게 가한 폭력 행위 역시 새로운 해석을 불러올 가능성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는 원인에 대한 판단 없이 무조건 행위의 결과만으로 그녀를 정신병자 분류하고 감금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과 권의의 힘이다.
놀랍게도 영화에서는 정신병 환자들이 정상인이 되고, 정상인이 정신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감옥에 수용되어 있다. 계몽과 치료라는 미명 아래 가해졌던 폭력적인 고문과 학대에 분노한 정신병 환자들이 일으킨 반란의 결과였다. 동시에 그 정신병원 속으로 홀홀 단신 뛰어든 옥스퍼드 한 의과대학생의 고독하면서도 정의로운 행동이 끊임이 사건들과 교차한다. 그를 그 지옥 같은 감옥 속으로 뛰어들게 만든 것은 결국 사랑이었고,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더욱 용감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감독은 영화를 통해 말하고 있다.
'세상이 미친 것인지, 내가 미친 것인지...'
누구도 인간의 자유와 생각을 구속할 수 없다. 근대 이성주의가 꽃을 피웠다고 자부하는 유럽의 지성사에서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는 정말 존재했던 것인가? 과학과 기술, 계몽에 대한 맹신의 암울한 그림자는 곧이어 유럽 전역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 1차 세계 대전으로 귀결된다. '아름다운 시절'을 선언했던 때로부터 불과 10여 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그 결과 인간의 지성이 가장 고상하고, 이성적 합리주의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 유럽에서 900만 명의 사망을 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었던 근원에 과학 기술과 산업화된 기계 문명이 존재했다.
미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머리에 구멍을 뚫어서 나쁜 악령을 쫓아버려야 한다고 믿었던 중세의 천공술이나 미친 사람에게 아편을 먹이고 전기 충격으로 정신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근대의 의학 기술이나 오늘날 우리의 시선을 본다면 별 다를 것도 없어 보인다. 어쩌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자랑하는 모든 첨단의 테크놀로지 역시 한계와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자유만이라도 구속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그래도 좀 나을 것 같다.
글: 김덕영
서촌의 작은 골목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같이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으신 분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김덕영의 책들
서촌 골목길 까페, 그 3년의 기록, <나에겐 통의동 스토리가 있다>,
인생에서 성공이란 때론 좀 늦게 찾아올 수도 있다,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49금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