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비평

문학적인 영화들이 좋은 이유

영화 '나의 산티아고'에 대한 감상

by 김덕영

솔직히 오늘 소개할 영화 <나의 산티아고>를 숨겨진 명작이라 표현하기엔 좀 그렇다. 원작이 되는 하페 케르켈링의 책만 하더라도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500만 부 이상 팔렸고, 11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국내의 흥행 성적과는 달리 2015년 독일 개봉 당시엔 할리우드 대작 '007 스펙터', '헝거 게임' 등과 경쟁하면서 당당히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니 숨은 명작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엔 솔직히 좀 무색한 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소개하려는 이유는 영화 <나의 산티아고>가 갖고 있는 '숨겨진(hidden)' 매력 덕분이다. 이 영화는 우리의 잃어버린 문학적 감수성을 일깨워준다. 잊힌 성찰의 가치들을 재발견하게 만들어주는 문학적인 영화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성찰의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기대 이상으로 문학적인 작품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원작에 충실한 대사나 독백들이 긴 여운을 준다. 어찌 보면 어색할 것 같은 내레이션들이 인생에 대한 묘한 여운을 준다. 여행이란 것이 어차피 그런 걸 찾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겠지만, 너무 당연한 것들이라서 소중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발견하게 한다.


누구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같은 경우는 불완전한 청소년기의 방황을 극복하고 온전한 성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자각과 각오를 다지게 만들었다. 그의 작품 덕분에 자신을 가두고 있던 알의 껍질을 깨고 나온 사람이 얼마나 많을까. 사람마다 자기를 발견하는 '성찰'의 길에 이르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가 책과 여행을 통해서 성찰의 길로 들어서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점이다.


영화 속에선 주인공이자 원작의 저자이기도 한 하페 케르켈링의 경우에도 결국엔 출발점은 한 권의 책이었다. 어디론가 무조건 떠나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찾았던 서점에서 발견한 <기쁨의 야고보 길>이란 한 권의 책.


잘 나가던 코미디언으로 살면서 돈과 명성도 얻었지만 지나친 방송과 공연 스케줄로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그제야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욕망만을 쫓던 한 남자는 그렇게 파멸의 길로 향하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의 길을 발견한다. 바로 산티아고로 향하는 길이었다.


‘떠나고야 말 거야’라는
모토 아래 적당한 여행지를 찾고 있었다.
그때 내 발에 첫 번째로 걸려든 책이
<기쁨의 야고보 길>이라는 책이었다.
길 하나를 두고 뻔뻔스럽게도
이렇게 거창하게 부르다니!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초콜릿은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위스키는 몇 가지 예외를 빼면
늘 그렇고 그렇지만,
겨우 길 따위가 기쁨을 가져다준다고?
그렇지만 나는 그 오만불손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홀랑 읽어버리고 말았다.


영화 <나의 산티아고>의 한 장면


1200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떠났다는 바로 그 고행의 길이었다. 그는 곧장 가방을 싸고 장장 35일간의 대장정에 돌입한다. 물론 가는 길은 안락함에 젖어 살던 그에게는 말 그대로 고행의 길이었다.


간이침대 하나 덜렁 주어진 순례자들의 숙소 알베르게에선 냄새나고 코 고는 사람들 때문에 잠조차 잘 수 없다. 순례 며칠 만에 발에는 물집도 잡히고 돌 뿌리에 넘어져 온몸이 흙탕물이 된다. 포기할까 생각도 하지만, 그래도 '독일 사람은 시작한 건 끝을 내고 본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계속 길을 간다. 그렇게 먹고 자는 것 어느 것 하나 편할 리 없는 고행의 길에서 조금씩 말벗이 생긴다. 물론 각자 자신만의 길을 걷는 사연이 있다. 그래서 결국 길은 혼자서 걸어야 한다. 인생이라고 다를 게 없는 법이니까.


순례자들의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그렇게 힘들게 고생해서 걸어간 간 산과 들, 지나온 강과 언덕 너머로 드디어 모든 순례자들의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보인다. 두 개의 높은 첨탑이 솟은 아름답고 장엄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길을 걸었던 순레자들이 그렇게 작은 실개천이 만나 강물이 되듯 하나로 모아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대사가 사라지고 오직 담담하게 하페 케르켈링의 내레이션만으로 진행이 된다. 그 장면을 보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되고 우리의 잊혀 가는 아름다운 진심과 마주한다. 깨끗하게 닦여진 거울로 나를 들여다보는 듯한 순수한 영혼과 만나는 시간이다.


"카미노(산티아고 순례길)는 사람의 힘을 모두 빼앗아갔다가... 다시 몇 배로 돌려준다."


"카미노를 걷을 수 없는 이들에게 확실하게 말하고 싶다. 이 길은 무한한 가능성 중 하나일 뿐이다. 이 길은 하나가 아니라 수천 개가 있다. 허나 누구든 길의 질문은 같다. '나는 누구인가?'"
주인공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이란 결국 '나를 찾는 길'이었다. 그건 길을 찾는 모든 이들의 공통점일 것이다.
"이 길을 걸으면 누구나 이르건 늦건 밑바닥까지 흔들린다. 혼자 걷지 않으면 그 길은 비밀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내 안에서 커다란 종이 울렸다. 그 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차츰 잦아들겠지만 귀를 쫑긋 세우면 오래도록 여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 길을 돌이켜보니 무엇보다 분명한 한 가지는 나는 매일 신을 만났다는 거다."



이런 문학적인 자기 성찰의 시간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산티아고는 웃고 떠들던 TV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나 열광하던 스포츠, 게임기에 빼앗겼던 '나'를 되돌려준다. 문학적인 영화가 좋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산티아고를 아직 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고행의 길이 어떤 모습일지 미리 짐작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일종의 여행 블로그를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즐겁고 유쾌하며 언젠가 나도 한 번쯤 저 산티아고의 순례길 위에 발을 올려놓을 것 같다는 야릇한 상상에 휩싸인다.


길이 됐든 책이 됐든 성찰로 향하는 길은 서로 다른 길이다. 각자에겐 각자의 선택이 있고, 그래서 고유한 저마다의 사연이 여행의 출발이 된다. 하지만 그 길에서 누굴 만나고 무엇을 하는가가 운명을 가른다. 좋은 벗,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인생의 스승 같은 사람들, 그들과의 만남이 하페 케르켈링이란 한 코미디언이 얻을 수 있었던 축복이지 않았을까.


한편 그걸 위해 미리 준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5개 국어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여행길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역시 미래는 미리 준비한 자들의 몫인가?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다큐스토리 미디어, 2013년


* 현재 8번째 신간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 2>를 집필 중에 있습니다. 이번 책은 스토리 펀딩으로 제작되어 출간될 예정입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신간 출간에 힘을 보태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후원을 해주시는 분들에게는 저자 사인이 담긴 신간을 배송해드립니다.


스토리 펀딩 링크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015

https://storyfunding.kakao.com/episode/4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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