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퐁스 도데의 <별들>에서 느껴진 두 가지 감정
우리 모두 그런 추억 하나 갖고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추억을 담은 책 한 권, 혹은 영화 한 편
추억을 그냥 간직할 것인가, 아니면
꿈에서 깨어날 것인가?
알퐁스 도데의 <별들>에는
그런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한다.
알퐁스 도데의 <별들>을 읽은 건
아주 우연이었다.
도서관에서 빌리고 싶었던 책을 찾다가
그 책이 눈에 들어왔다.
기억이 맞다면, 이 책은
중학교 때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순수한 사랑이란 게 저런 거구나', 하고
어린 나이에도 가슴이 설렜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한동안 나에게 사랑의 데피니션이란
늘 알퐁스 도데의 별을 헤는 듯한
목동의 마음과 같았다.
그런데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 보면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내 나이 또래, 그러니까 비슷한 경험과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 틈에는 꽤나
많은 사람들이 소설 속
목동처럼 살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참 묘한 허탈감도 느껴진다.
나이 들어서 다시 읽다 보니
일종의 '속았다'는 느낌 같은 게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이유가 뭘까?
실제로 원작을 보면
목동은 내가 상상했던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였다.
아마도 목동이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아이 동(童)'자 때문에 갖게 된
생각인 것 같다.
"저도 스테파네트 아가씨와 같은
스무 살이고, 그녀는 제 일생에 본
가장 아름다운 분이었거든요."
(알퐁스 도데, <별들> 중에서)
19세기 프랑스 남자들의 평균 수명이
대략 50대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목동 청년의 스무 살 나이는
혈기왕성한 청년기를 넘어서
일가를 이룰 나이였다.
그런 청년 앞에, 게다가 늘 흠모하던
주인집 딸이 산속 오두막집 자신의
거처에 등장한 것이다.
떨리고 흥분되고 자신이 감정을 들킬까
조마조마하고, 뭐 그러지 않았을까?
어릴 적에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스무 살 혈기왕성한 목동 청년의
심리적 긴장감이다.
"저는 누가 세례를 받았고,
누가 결혼했다는 등, 저 아랫동네의
여러 가지 소식들을 듣고 했지만,
무엇보다 제가 궁금했던 것은
우리 농장 주인어른의 따님인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였습니다. 그녀는 여기 사방
백 리 내에서 어느 누구보다 예뻤거든요."
(알퐁스 도데, <별들> 중에서)
목동은 드디어 자신의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아가씨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
아마도 오래전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터.
자신의 신분 때문에 주인집 딸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아마 밤마다 아가씨 생각하느라
어느 정도 몸이 달았을 수도 있을 터.
아무튼 목동 청년은
갑작스럽게 등장한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보고 제일 먼저 이렇게 스스로
질문을 던진다.
'저는 그녀가 축제에는 많이 갔었는지,
밤새워 노는 일은 없었는지,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새로운 남자들이
또다시 생겼는지...'
(알퐁스 도데, <별들> 중에서)
아무리 기억을 더듬으려고 해도
내 기억 속에 이런 문장, 이런 분위기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긴 '밤새워 노는' 여자의 이미지를
중학교 교과서에 싣기에는 아무래도
좀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번역자가 좀 순화시켜서
표현을 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그렇지!
덕분에 <별들>의 원작을 읽고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게 느껴진다.
약간은 얼굴이 붉어지기도 하고...
'나도 참 순진하게 살았구나!'
'꽃무늬 리본에, 화사한 치마에
레이스까지, 그렇게 나들이옷을
잘 차려입고 온 걸 보니,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온 것 같지는 않고,
어디서 춤이라도 추고 오느라 늦은 건
아닌가 싶었어요.'
(알퐁스 도데, <별들> 중에서)
산속 목동 청년에게 음식과 생활용품을
갖다 주려고 하는 사람이 꽃무늬 리본을
머리 달고, 레이스 달린 화사한 치마를
입고 노새를 몰고 오다니요!
역시 이건 목동 청년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디 근사한 곳에서 남자들과
춤을 추다가 온 것이거나, 아니면
스테파네트 아가씨도 은근히 목동 청년에게
관심이 있거나.
여자는 귀가를 해서 화장을 지우고
샤워를 한 다음에도 다시 남자를 만나야
할 때는 화장을 새로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이 여자의 심리라면, 분명 아가씨도
어쩌면 목동 청년에게 호기심 정도는
갖고 있었으리라.
"그래. 가여운 양치기.
여기서 지내는 거야? 항상 혼자이니
심심하겠구나? 뭐 해? 무슨 생각 해?"
'당신 생각이요. 아가씨.'
그렇게 대답할까도 싶었어요.
거짓말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말 한마디도 꺼내지 못할 만큼
저는 심각하게 굳어 버렸어요.
(알퐁스 도데, <별들> 중에서)
이 대목에 이르면 역시 여자도
남자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확신이 든다.
'뭐 해? 무슨 생각 해?'
아니 좀 지나면 해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지는데, 집에 갈 생각은
안 하고 그런 걸 묻는 여자의 심리란...
그런데 스테파네트의 질문은
더욱 집요해진다.
'여자친구가 가끔씩은 너를 만나러
여기 올라오기는 하는 거야?'
앞서 목동 청년이 갖고 있던 궁금증,
'밤새워 노는 것'이나 스테파네트가
갖는 궁금증이나 성적인 메타포가
느껴진다.
이런 긴장감이 부담감을 작용한 것은
역시 여자 쪽.
아가씨는 그제야 서둘러 하산을
시작한다.
"그렇게 아가씨는 빈 광주리를 싣고는
떠났습니다. 언덕에 난 오솔길로
그녀가 사라지자, 노새 발굽 밑에서
튀는 자갈 돌멩이가 제 가슴에
하나씩 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알퐁스 도데, <별들> 중에서)
아! 목동 청년은 그렇게 아쉬운 감정을
흘리며 떠나는 아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튀는 자갈 돌멩이가 가슴에 떨어질
정도로 아쉽고 안타까운 순간들이었겠지.
그런데 잠시 이 소설의 최대 반전이
일어난다. 집에 간 줄 알았던 아가씨가
다시 산속 오두막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것도 강물에 빠져 온몸이 젖어
추위에 오들오들 떨면서 아가씨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스무 살 처녀가 물에 빠져
온몸이 젖은 채 다시 산속으로 돌아온다?
글쎄 보통 그런 상태라면
서둘러 빨리 집으로 가지 않을까?
속살이 은근히 드러나는 젖은 몸으로
해 떨어진 산속으로 되돌아오는
여자를 맞이하는 목동 청년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무튼 마음이 복잡해진다.
마치 내가 목동 청년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이 대목부터 본격적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재미가 있다.
'나라면...', '나였더라면...'
드디어 밤이 온다.
목동 청년은 아가씨를 위해서
커다랗게 모닥불을 피운다.
역시 프랑스 남자답다.
로맨스를 아는 게지...
밤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진다.
소설이 나온 게 1885년이었으니
아마도 그때 밤하늘에는 정말
은하수가 펼쳐졌을 것이다.
북극성은 물론이고 큰곰자리,
작은 곰자리, 오리온...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보석처럼 수놓았을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름다운 사람과 함께 하는
사랑스러운 밤이다.
그리고 피곤에 젖은 아가씨는
슬며시 머리를 청년의 어깨에
기대며 잠이 든다.
'만약 당신이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을 지새운 적이 있다면
우리가 잠을 자야 하는 것으로 아는
그 시간에, 신비로운 또 다른 세계가
고독과 고요 속에서 깨어나는 것을
아실 겁니다.'
(알퐁스 도데, <별들> 중에서)
그래. 맞다. 이 한 문장 때문에
문학은 사람의 영혼을 조금은
깨끗하게 가꾸어준다.
속세에 찌든 떼를 문학의 영혼이
씻어준다.
욕망과 진실함 사이를 가르는
거대한 강물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밤은 깊어간다.
별들을 같이 바라보며
별들의 이름을 부르며
스르르 아가씨는 청년의 어깨를
빌려 잠이 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밤이 둘을 살며시 덮는다.
'저는 그녀가 자는 것을 바라봤습니다.
제 본능의 저 깊은 곳이 조금 동요하긴
했지만, 아름다운 상상들만 나에게 준
맑은 밤 덕분에 경건하게 지켜 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별들이 거대한 양떼처럼
온순하게 그들의 운행을 조용히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따금 저는,
그 별들 중에서 가장 고귀하고 가장 빛나는
별 하나를 떠올렸습니다. 길을 잃은 채,
내 어깨에 내려앉아 잠들어 있는......'
(알퐁스 도데, <별들> 중에서)
그래! 이 마지막 문장은 기억이 난다.
글자가 아니라 느낌이 확실히 기억난다.
길을 잃은 별 하나, 사랑한다 말은
못하지만, 그녀의 손길 하나 느낄 수 없었지만
마음속으로 그렇게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간직한 목동 청년의 모습이 고스란히
기억 속에 떠올랐다.
알퐁스 도데에게 <별들>은
19세기 자유분방했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일종의 경종이었다.
당시 <별들>에 묘사한 목동 청년의
애틋한 모습은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곳곳에 진한 여운을 남겼다.
감히 '세상에 그런 사랑은 없다'라고
어느 누가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별들>을 읽고 나면
왠지 나도 그런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존재가 되어간다.
그것이 문학의 힘일 것이다.
영혼의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
말을 걸고, 몸을 부추기는 힘이 있다.
비록 나이 들어 어릴 적 느낌 그대로는
아니지만, 여전히 <별들>은 내 가슴에
빛나고 있다.
꿈에서 깨서 현실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그대로 꿈을 꾸며
아름다운 추억의 세계에 머물 것인가?
오늘만큼은 그냥 그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 속에서 잠들고 싶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루베롱(luberon)이란
곳은 프랑스 문학과 그림에서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는 프로방스 지역에 속한다.
론 강을 따라서 남프랑스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도 좋고 햇살도
아름답다.
참고로 그동안 이 작품은 <별>이라 불려졌는데,
사실은 <별들(Les étoiles)>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PD, 작가,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https://storyfunding.kakao.com/project/19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