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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pr 11. 2016

나의 '30일간의 세계일주'

도쿄에서 런던, 파리, 뉴욕을 거쳐 상하이로

   '세계일주'라는 낯선 체험


    2009년 KBS '문화지대'로 방송된  <도시의 미래, 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외주 제작했을 때의 일이다. 운 좋게도 미국의 한 IT기업이 스폰서를 자처하고 나선 덕분에 나는 아주 색다른 여행을 한 번 하게 됐다. 그건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들을 동시간대에 여행하는 체험이었다. 쉽게 말해서 도쿄에서부터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뉴욕, 시카고, 그리고 상하이를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 지도를 펴놓고 보면 알겠지만 그건 세계를 동시간대로 한 바퀴 돌아오는 아주 독특한 '30일간의 세계일주'였다.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그 당시 프로그램의 핵심 포인트는 디자인(design)이라는 틀을 통해 세계 주요 도시들의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런 유익한(?) 프로그램 기획 덕분에 나는 세계 주요 도시들을 동시간대에 동일한 잣대를 갖고 비교 체험해 볼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  그것도 도시와 사람을 이해하는데 가장 필수적인 생활 밀착형의 요소들, 즉 건축, 공공공간(public space), 생활환경 등에 초점을 맞춰서 말이다. '나의 30일간의 세계일주', 지금 생각해 봐도 그건 정말 판타스틱한 경험이었다. 


    난 사실 디자인하면 패션 디자인 정도를 아는 게 고작이었다.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나의 디자인이라는 개념 자체가 바뀌었다. 실제로 영국 런던의 경우에는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사물의 단위를 뛰어넘어 정신세계나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광범한 적용 범위를 지니고 있었다. 가정, 직장, 도시 곳곳의 공공공간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디자인의 가능성이 실험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환경문제가 대두되던 시점이라서 그 당시에는 도시가 어떻게 환경오염이나 기후온난화 등에 대처하는가도 중요한 관심사였다. 시카고의 경우에는 도시 전체가 지구온난화로 야기된 변화된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빌딩 옥상에 녹색 정원을 설치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시카고 상공을 비행기를 타고 날면 녹색 사각형들이 점점이 뿌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시카고가 자랑하는 '그린 루프(Green Roof)'였다. 실제로 그린루프를 통해서 시카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도시 열섬 현상이 완화되었다는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디자이너라면 패션 디자이너 정도밖에 몰랐던 나에게 세계적인 도시들의 디자인을 통해 끊임없이 변신하고 있는 현장을 둘러보는 일은 무척이나 참신하고 자극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세계를 동시간대에 일주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여행은 분명 아니다.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란 책에도 나오고 있지만,  세계를 일주하는 일은 여행가에겐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매력적인 소재다. 


   쥘 베른이 그 책을 썼을 때가 1872년이었는데, 실제로 몇 년 후 미국의 저널리스트 넬리 블라이(Nellie Bly)는 뉴욕을 출발해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이집트, 스리랑카, 홍콩, 일본을 거쳐 뉴욕으로 돌아오는 세계일주를 시도했다. 여행은 1889년 11월 14일 시작해서 그 다음해인 1890년 1월 25일까지 72일 6시간 7부 14초가 걸렸다고 한다. 프랑스를 통과할 때는 <80간의 세계일주>를 쓴 쥘 베른을 아미엥에서 만나기도 했다. 자료를 보다가 놀랐던 건 넬리 블라이란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사실이다. 넬리 블라이의 72일 기록은 또 몇 년 후 조지 프랜시스 트레인(George Francis Train)이라는 미국인 사업가에 의해서 깨졌다. 그는 67일 만에 세계일주에 성공했다.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등장하는 여정



    쥘 베른이 자극하고 도전적인 저널리스트, 탐험가들에 의해서 실제로 이뤄진 19세기 말의 '세계일주' 러쉬는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세계사적인 조류의 한 작은 기류였다. 그들의 세계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과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은 지도 상에서 절묘하게 일치했다. '80일간의 세계일주'에 등장하는 여정은 곧 영국의 식민지 경영이 배출한 도시들과 동일한 지점들로 연결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세계를 한 바퀴 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집에서 여행지를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거점 회기형'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마치 세계를 탐험하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지구 밖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듯이 관조적인 느낌에 빠진다. 나의 경우에도 비슷했다. 세계를 한 바퀴 돈다는 건 가고 싶은 목적지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것과는 다른 뭔가를 완수해냈다는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그런 여행에는 필수적인 게 바로 여행자의 도전의식이다. 새롭게 길을 개척하고 난관을 극복해나가면서 자의식도 단단하게 변한다. 


   19세기 사람들이 '세계일주'에 열광했던 건 그 안에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요소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책은 프랑스 작가의 탁월한 상상력과 필리어스 포그라는 영국인 등장인물, 그리고 그게 진짜 가능한가를 검증해보려는 미국인 저널리스트들이 겹쳐지면서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그래서 쥘 베른의 소설이 공개되었을 당시, <80일간의 세계일주>는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에 신문에 시리즈로 연재, 선박 회사들은 소설 속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가 내기에서 이기고 세계일주에 성공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작가에게 뒷돈을 건넸다는 후문도 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는 마지막 아시아에서 미국으로 귀환하는 선박 여행에 가장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 일종의 오늘날로 말하면 영화 속 간접 광고, 즉 'PPL'이었던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Philieas Fogg)는 갖고 있던 재산 4만 파운드 중에서 절반인 2만 파운드를 내기에 걸고 나머지 2만 파운드는 여행 경비로 쓴다.  1870년대 파운드의 가치를 오늘날로 환산하면 대략 40억 원이 넘는 큰 돈이다. 그런 큰 돈을 한 판 세계 일주에 썼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보통사람이라면 분명 쉽게 할 수 없는 여행이고 내기였다.  필리어스 포그란 주인공의 이름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그의 이름은 아메리카 신대륙에 이주해온 최초의 영국 이민자들인 필그림 파더스(Philgrim Fathers)에 따왔다. 순례자의 의미를 지니는 필그림에 안개 낀 도시 런던을 상징하는 포그가 겹쳐진 이름이다. 세계일주 자체가 안개로 휩싸인 도시를 여행하는 것처럼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불투명한 여행이라는 의미도 된다. 풀어서 해석해보면 '안개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여행의 순례자'라는 뜻도 될 것 같다. 모든 게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확실한 것들을 찾아내려 애썼던 선구자 여행자들의 숨겨진 욕망의 흔적들도 곳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 덕분에 세계는 좁아지고 시장은 넓어졌다. 


   오늘날에는 비행기만 잘 갈아타면 2,3일 안에 세계를 한 바퀴 일주할 수 있다. 물론 여행지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따라서 기간이 달라지겠지만, 80일씩이나 걸릴 일은 없다. 나의 경우에도 도시를 취재하면서 다닌 덕에 시간이 좀 길어진 것이지, 실제로 여행지 순례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30일이 아니라 일주일에도 가능한 게 오늘날의 '세계일주'다. 


    이런 여행을 하다 보면 예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시카고에서 상하이로 이동하는 구간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카고-상하이 구간은 비행시간만 14시간 정도로 제일 멀고 힘든 구간이었다. 보통 비행기로 여행을 할 때는 경비 때문에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 좌석은 꿈도 꾸기 어려운데, 그날은 오랜 여정에 치쳐서 정말 편하게 다리라도 쭉 뻗고 몸을 누울 수 있는 좌석이 마음 한 구석 간절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14시간의 여정을 나는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서 비행했다. 내가 구입한 건 분명 이코노미 좌석이 맞는데도 말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연은 바로 내가 '세계일주' 여행자였기에 가능한 거였다. 


    전 세계 항공사들이 가입되어 있는 국제항공연합기구의 항공권 발권 기준에는 특별한 조항들이 몇 가지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는 'World Tran-Continental Class'(?)라는 게 있는데, 그건 두 개의 대양과 세 개의 대륙을 연달아서 여행하는 승객에게는 본인이 희망하는 구간의 좌석을 업그레이드해주는 규정을 포함하고 있다. 내가 시카고에서 상하이로 이동할 때 이코노미 좌석이 아니라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여행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빈 좌석이 있을 때에만 한정된 얘기다.


   사실 오늘 여행의 이야기를 꺼낸 건 여행이 무척이나 그립기 때문이다. 통의동에 가게를 오픈 다음에는 마음 놓고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아직은 작은 가게인데다, 오랫동안 가게를 비우고 떠날 만큼 여유롭지도 않기 때문이다. 대신에 요즘엔 글을 쓰면서 세계를 여행하는 상상을 한다. 여행을 못가는 아쉬움도 달래고 여러 가지 정신적으로도 위안이 된다. 


   여행을 못가는 대신에 대신에 여행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글로 풀어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배낭을 잔뜩 짊어진 젊은 여행자가 되기도 하고, 길이 없는 길을 혼자서 투벅투벅 걸어가는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보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도 난 내가 가고 싶은 여행지를 찾아 지도를 펴놓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리고 30일 동안 이뤄진 나의 첫 번째 세계일주 여행을 되돌아봤다. 아마 그런 여행은 두 번 다시 하기 어려울 것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순간이동으로 어느 낯선 도시를 거닐고 있는 나를 상상하기도 한다. 작은 까페 테라스에 앉아 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바라본다. 햇빛에 반짝이는 자전거 휠에 눈이 부신 그런 따듯한 봄날의 아침. 적당한 소음과 적당한 혼란 속에서 오히려 나의 집중력은 높아질 것 같다. 이런 글들은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고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게 만든다. 생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뭔가를 변화시킨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다시 깨닫게 한다. 상상 속으로 나래를 펼치고 구름 위를 날아오르는 기분, 그건 내가 이 도시 안에서 꿈꿀 수 있는 한 순간의 달콤한 여행의 기쁨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을 것이고...


추신: 만약 당신이 '월드 트랜스 콘티넨탈 클래스' 티켓을 타게 되면 꼭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 하는 건 여행사나 항공사에 사전에 문의하기 바란다. 나의 경우에는 전혀 몰랐는데, 친절한 항공사 직원 하나를 만나서 가능했던 일이다. 모르고 지나치면 너무 아까운 일임에 분명하다.



지은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작품
김덕영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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