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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Apr 12. 2016

팔굽혀펴기의 선(禪)

오이겐 헤리겔의 <활쏘기의 선>을 읽고...

   '몸으로 익힌 것들에 대한 기억'


   아마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하겠지만, 요즘 갑자기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우물쭈물하게 되는 일들이 많다. 최근에는 횟수도 늘어나면서 은근히 걱정도 든다. '나이가 드니까, 기억력이 떨어지는 건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지는 않다. 이건 젊은이나 노인이건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추측해 보건대 처리해야 할 정보의 양이 급증하면서 우리 두뇌에서 기억능력을 담당하는 대뇌의 전두엽 등에 너무 많은 부하가 걸린 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현상은 노화가 원인이 아니라, 정보처리 기능의 부하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용량을 초과하는 외장하드에는 더 이상 저장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두뇌가 용량이 정해진 외장하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스스로 깨닫고 있지 못할 뿐이지, 우리의 두뇌의 뉴런들은 끊임없이 자기 증식을 하며 변신과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두뇌의 능력은 결코 정체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최근 뇌과학 연구자들의 일관된 견해다.


    가만히 따져 보면,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골머리를 썩는 것들에는 단골 메뉴가 있다. 예를 들자면, 사람 이름, 장소, 숫자, 책에서 읽은 어떤 특정한 개념, 뭐 이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대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머리로 익힌 것들'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자주 까먹는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해 보면 이 말이 더욱 실감이 날 것이다.


    반면에  무엇이든 '몸으로 익힌 것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몸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된 생리적인 조건반사들을 제외하더라고 몸으로 익힌 것들은 참 오래간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전거 타기 같은 것이다. 자전거 타기는 처음에는 자꾸 넘어져도 어느 한 순간 균형을 잡고 달려 나가기만 한다면, 그걸로 평생 학습이 되는 아주 신비로운 체험이다. 그래서 자전거는 한 번 배운 뒤에는 몇 년 동안 자전거를 타지 않더라도 다시 페달을 밟고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다. 이렇게 몸으로 배운 것들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머리로 익힌 것에 비해서 훨씬 오래가고 강렬하게 남는다.


   예를 들어 사랑의 상처 역시도 여기에 해당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서 얻게 되는 아픔이나 상처는 그것이 머리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몸과 몸이 만나는 육체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손을 잡고 같이 걸어갔던 오솔길의 경험, 늦은 밤 집에서 했던 달콤한 키스, 강렬한 욕망과 쾌감을 불러일으켰던 섹스, 사랑의 상처는 육체의 상처이지 머릿속 상처가 아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사실 오늘 '몸으로 익힌 것'에 관해서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어젯밤 읽었던 오이겐 헤리겔의 <활쏘기의 선>이란 책 때문이다. 독일에서 신칸트주의 철학에 빠져 있던 작가는 우연한 기회에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에 초청받아 교수로 부임해 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1924년부터 1929년까지 5년 동안 객원교수로 철학을 강의하며 생활한다. <활쏘기의 선>이란 책은 저자가 일본 궁도의 대가인 아와 겐조를 만나 5년 동안 활쏘기를 배우는 과정에서 있었던 경험과 깨달음을 차분히 기록한 책이다. 일본에서의 경험은 독일로 돌아간 다음에도 계속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결과 그는 동양의 선에 대한 다수의 책을 쓰는 동양문화 전도사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말하는 '활쏘기'와 '선', '무아의 경지'와 '해탈' 등에 관한 선문답 같은 개념들보다는 '몸'에 익힌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유가 뭘까? 어떤 면에서 보자면, 내가 갖고 있는 애매모호한 것들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직은 '선(禪)'이라는 초월적인 개념들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책을 읽어가면서 나는 저자가 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스승과 나눈 대화에 쉽게 동화되지 못했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동어반복처럼 같은 말의 반복 같기도 하고, 그저 좋은 말의 성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차려진 밥상이라도 매일 하루 세끼를 먹는다면 아마 질려서 더 이상 입에 대기 싫어질 때가 올 것이다. 그럴 때 구수한 된장찌개에 둥둥 떠다니는 두부 한 모금을 떠서 풋고추에 된장을 푹 찍어 먹는 게 차라리 더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


    그렇게 좋은 말들의 성찬에 질려갈 즈음이었다. 갑자기 이유를 알 수 떨림, 혹은 감흥이라고 해도 좋을 어떤 것이 마음속에 한줄기 바람처럼 스쳐갔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다시 책을 펼치고 하나하나 내가 읽으면서 중요하게 메모를 했던 부분들을 되돌아봤다. 글자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도 없었다. 그것과 내가 순간 느꼈던 바람 같은 어떤 스침은 아무런 논리적 연관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하룻밤을 넘기고 나는 오늘 그 작은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그것이 바로 '몸으로 익힌 것'에 대한 진리다. 그것은 지극히 나에게 한정되는 진리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른 누구의 몸이 아니라 바로 내 '몸'을 통해 얻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몸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하나밖에 없는 '내 몸'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게 사람이다. 지식도 그렇고 경험도 그렇고 생각이나 감정도 그렇다. 모든 게 '내 몸' 하나에서 시작된다. 작은 점에 불과한 나의 '몸'이 세상으로 흘러들어가는 개천이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된다. 그렇게 바다까지 이를 수 있다면, 더 이상 내 '몸'은 나만의 몸이 아니다. 그것이 전체가 되고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웃기는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난 그걸 매일 아침잠에서 깰 때마다 하고 있는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깨달았다. 몸의 진리를 몸을 통해 깨닫는다? 어찌 보면 아주 논리적인 과정이다. 사실 팔굽혀펴기는 벌써 20년도 넘게 내가 하고 있는 행위이다. 난 매일 아침, 저녁으로 팔굽혀펴기를 한다. 어떨 때는 미친 듯이 백 여 개를 넘게 할 때도 있다. 또 어떨 때는 하나도 하기 싫을 때도 있다. 하지만 난 공기를 마시듯이 매일 아침, 저녁 팔굽혀펴기를 하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안 하면 이상하다. 몸으로 익힌 것은 그렇다. 머리로 익힌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강렬하다. 그건 화려하지는 않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든든한 가슴 널찍한 전사의 사랑이다. 때론 조금은 촌스럽지만 한번 마음 먹은 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순수한 열정이다. 그래서 난 '머리'보다는 '몸'으로 익히는 것들에 조금은 더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책에는 한 줄의 아주 자극적인 문장 하나가 있다. 어쩌면 그 문장 하나를 읽기 위해서 난 이 책을 그토록 찾아 헤맸던 건 아닐까. 그 문장이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사고하는 존재이지만, 계산하고 사고하지 않을 때 위대한 작품을 창조해 낸다. '어린아이다움'은 오랜 세월에 걸친 연습과 자기 망각의 기예를 통해서 다시 얻어진다. 이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사고하지만 그럼에도 사고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사고한다. 바다 위에서 철썩이는 파도처럼 사고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사고한다. 따스한 봄바람에 움트는 푸른 새순처럼 사고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자신이 바로 비요. 바다요. 별이며, 새순이다."


    이 문장은 정말 몇 번을 다시 봐도 명문장이다.  나도 비가 될 수 있을까? 바다가, 별이, 새순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난 바람도 좋다. 그럼 당신은? 당신은 구름이 되세요. 눈이 되고, 달이 되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이 되세요.



지은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작품
김덕영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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