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o Homes, Never Returned

돌아갈 수 없었던 그들만의 '두 개의 고향'

by 김덕영

* 이 글은 1950년대 북한 전쟁고아들의 역사적 흔적을 찾고 있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 (Two Homes)를 제작하면서 느낀 감상과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Two Homes; Never Returned

두 개의 고향, 결코 돌아갈 수 없었던


동유럽 취재가 거의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당연히 몸도 마음도 지칠 때가 됐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시작을 하면 왜 중단이 잘 되지 않는 것인지.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강제적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생각을 정리하고 고단한 몸을 좀 쉬게 만드는데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게 시작한 글이었는데,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한 몇 가지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개인적으로 <Two Homes>, '두 개의 고향'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든다. 거의 직감적으로 머리 혹은 가슴 언저리에서 튀어나온 제목이었다.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한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제목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그냥 흐르는 물에 몸을 맡기듯이 그렇게 취재를 다녔다. 그러다 폴란드 시골을 지나다 번뜩하고 머릿속에서 떠오른 게 있었다.


아름다운 폴란드 시골 마을의 정경 속에서 떠올랐던 '두 개의 고향'이라는 제목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가끔은 그렇게 새롭고 낯설고 일상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들 속에서 멋진 생각들이 떠오를 때가 있다. 폴란드 시골 마을을 지날 때가 그랬던 것 같다. 눈이 와서 덮인 세상과는 다른 이른 아침 이슬이 매섭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아 마치 눈처럼 하얗게 변한 세상이었다. 시간이 무려 70여 년이 지났지만, 그 시절 북에서 온 아이들도 저 아름다운 눈꽃을 바라보고 있었겠지. 그 순간 마음에 뜨거운 게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저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전쟁으로 부모를 잃었던 가슴 아픈 순간들을 조금은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것이 신이 아이들을 위해 마련했던 작은 선물이 아니었을까.



인간은 누구나 고향을 가지고 있다. 태어난 곳, 살면서 정든 곳, 특히 사람 때문에 고향이 되는 수도 있다. 그렇게 누구나 고향을 갖게 된다. 살아온 인생 여정에 따라서는 여러 개의 고향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소개하려고 하는 사람들 역시 그렇다. 멀리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일주일씩이나 달려와 낯선 동유럽의 땅에 정착했던 아이들이나, 그들을 자식처럼 따듯하게 맞아주었던 파란눈의 사람들이나 매한가지다. 그들의 삶 속에는 두 개의 고향이 있다. 남들보다 하나 더 많은 고향이었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었다. 그래서 안타깝고 고향에 두고 온 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을 안고 세상을 떠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념의 대결 속에서 분단이 이뤄졌고 그들은 그렇게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늘 거대한 역사는 작은 인간을 희생한다. 역사의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격랑의 물결 속에 잠겨 숨을 거두는 사람들이 있다.


두 개의 고향을 갖고 있던 사람들도 그랬다. 자신이 원해서 건 원하지 않아서 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물결을 건너야 했다. 북한의 아이들이 유럽에 온 것도 그랬고, 그들을 받아주었던 동유럽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가난했고 먹을 것이 부족했던 평범하고 소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북한 전쟁고아 위탁시설들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심지어 그곳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신분증까지 만들어야 했다. 북에서 전쟁고아들이 왔다는 사실을 바깥세상에 알리지 않겠다는 비밀 서약까지 써야만 했다. 그렇게 그들은 북에서 온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었다.


유럽을 휩쓸었던 전쟁이 끝나고 그들에게는 돈벌이가 필요했다. 북한에서 온 전쟁고아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을 한다는 모집 광고를 보고 처음에 든 생각은 아이들에 대한 희생과 봉사가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의 고향에 두고 온 어머니, 아버지, 식구들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북한의 전쟁고아들의 선생님이 되었고 음식을 해주는 조리사가 되었다. 심지어 의사가 되어 아픈 아이들을 치료해주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유럽의 아이들도 먹을 것이 부족한데,
왜 멀리 동쪽 땅에서 온 아이들까지 우리가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지!"


그것이 동유럽 사람들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다. 돈벌이를 목적으로 시골마을에 갔지만, 그곳에서 그들은 순박한 동양의 아이들과 만났다. 게다가 전쟁으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들이었다. 가슴 깊이 슬픔과 상처를 간직한 아이들이었다.


인간이란 그런 것 같다. 슬픔을 보면 같이 슬퍼할 수 있고 괴로움에 젖은 사람에게 동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다. 슬픈 이야기를 들으면 함께 눈시울을 적실 수 있는 게 인간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애초부터 신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 선하게 만들어진 존재들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서로 정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을 만나게 해 주었던 바로 정치와 역사라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다시 치기 시작했다. 전원 송환 명령! 1959년부터 아이들은 유럽에 올 때처럼 그렇게 나란히 줄을 맞춰서 똑같은 옷을 입고 그들이 왔던 북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동유럽의 언어와 문화를 몸으로 익힌 아이들에겐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그렇게 8년이나 보낸 세월이었다. 그 세월을 겪으며 새로운 아버지, 새로운 어머니, 형제처럼 떨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런데 일시에 전원 북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렇게 만났다 그렇게 헤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것은 아이들을 키워주었던 유럽의 아버지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자식인데… 어딜 간다고 그래!’


돌려보낼 수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자식들이 되었다.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울고 불고 하며 하소연했지만 아이들은 왔을 때처럼 그렇게 돌아갔다. 부모도 없는 북의 땅으로, 새로 생긴 부모들은 유럽의 땅에 놓아둔 채…


아이들은 돌아가서 다시 유럽의 부모들을 만날 희망을 안고 떠났다. 보고 싶은 아버지, 어머니, 마음이 남아 있던 고향 같은 그곳. 그리움에 아이들은 각자 자신이 배운 낯선 유럽의 언어로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 편지가 화근이 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돌아가고 싶어요...’, ‘배가 고파요’,
'그때 먹으라고 주신 것들을 왜 안 먹었는지 후회가 돼요.
‘보고 싶은 어머니, 아버지…’


아이들에게 북에서의 또 다른 시작은 유럽의 생활에 비하면 턱없이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유롭게 살았던 유럽 생활에 비하면 북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이고 제한적이었다. 마치 수용소 같은 생활이었을 것이다. 매일 광산 탄광 공장 등에서 몇 시간씩 중노동을 해야 했다. 아이들의 편지에는 그런 힘든 생활이 담겼다. 지금까지 확인한 북에서 쓴 아이들의 편지 중에서 단 한 통도 '평양'에서 발신된 것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걸 보는 유럽의 부모들은 마음이 괴로웠다. 그렇게 둘 사이에 마음을 위로하는 편지가 이어졌다. 하지만 1961년 일거에 모든 서신 왕래가 중단되었다. 그 시기는 북한이 주체사상 확립기에 들어가던 시기와 묘하게도 일치한다. 북한이 모든 외부세력과의 단절을 시도하던 때였다.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과 가장 가까운 중국으로부터도 멀어지던 시절이었다.


주체를 확립한다는 목적으로 외국 세력 배척운동이 벌어졌다. 외국 사람과 결혼했던 별로 숫자도 많지 않은 사람들이 강제 이혼을 당했다.


루마니아의 미르초유, 동독의 레나테 홍, 폴란드의 오가렉 초이, 그리고 폴란드의 6명이나 되는 여성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심지어 남편과의 만남이 불가능해지자 스스로 자살을 시도한 사람들도 있었다. 과연 누가 이들의 사랑을 가로막았던 것일까? 이념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그들의 사랑, 그들의 평범한 가족을 헤어지게 만들었을까?


사랑 때문에 운명이 바뀌었던 동유럽의 여성들에게도 어쩌면 두 개의 고향이 존재한다. 미르초유에게도, 레나테 홍에게도, 고향은 두 개다. 아무리 그리워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다. 그 고향에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편이 있는 고향이다. 남아 있는 자식들이 노년이 되었을 정도로 60년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들은 남편의 고향 땅을 그리워하고 있다. 짧았지만 행복했던 신혼의 단꿈이 어려있는 고향을 그들은 돌아갈 수 있을까.


이념이 뭐 그렇게 대수라고…


만약 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향해 작은 목소리라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두 개의 고향을 가슴에 품고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도와주는 일이 아닐까. 태어난 고향, 그리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던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 마음의 고향, 그 두 개의 고향을 하나로 연결해주는 일이 아닐까.


불가능한 희망을 안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감옥에 살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까. 단테의 ‘신곡’은 그래서 ‘이 문에 들어오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심정으로 세상을 살아갔던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걸 우리가 조금은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이 다큐멘터리가 품고 있는 작은 가치이고 소망이지 않을까.


그래! 마음속에 두 개의 고향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자. 그들이 살아 있는 순간, 다시 고향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다시 유럽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수많은 북의 아이들에게도 고향으로 돌아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자.


인간이 마음의 고향, 평생 그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죽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남과 북은 이미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1983년 TV를 통해 남한이 먼저 이산가족 찾기 사업을 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한 내부에서 서로 헤어진 가족들이 있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남한과 북한에 살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재회가 있었다.


이제 이산가족의 개념은 넓어져야 한다.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 다시 가보지 못한 유럽의 고향을 두고 온 사람들까지도 이산가족의 개념은 넓어져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생애 순간까지 간절히 염원하는 일이다. 어쩌면 코리아 디아스포라의 마지막 종착점이지 되지 않을까.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고향, 만나야 할 사람들이 다시 만나 부둥켜 기뻐할 수 있는 고향의 이야기, 그렇게 두 개의 고향을 품은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고향을 이야기해주자.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고향을 만들어주자.


'두 개의 고향', 돌아갈 수 없는

Two Homes, Never return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김덕영


현재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고향(Two Homes)> 스틸 컷 중에서 (김덕영 작품)


현재 1950년대 북한 전쟁고아들의 유럽 생활기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Two Homes)'을 영화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아이들, 1950년대 동유럽과 북한의 정치 정세와 시대상을 다루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Two Homes)'은 201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유럽 현지 취재를 끝마치고 현재 국제 영화제 참가를 목표로 편집 중에 있습니다. 개인이 하기엔 참 벅찬 작업이라서 도움 주실 분들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다큐멘터리 공식 후원 계좌: 국민은행, 878301-01-253931, 김덕영(다큐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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