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상식의 범위를 뛰어넘을 땐 그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어제 있었던 놀랍고 신기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루마니아 취재가 벌써 3일째 접어든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아침부터 루마니아 문서 보관소와
올드 타운 촬영이 있었기 때문에
오후 5시가 되자 완전히 에너지가 방전되어
버렸습니다.
숙소에 도착해서 곧바로 잠이 든 것은
그런 이유였습니다.
2시간 정도 단 잠을 자고 나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숙소를
나섰습니다.
저희들이 묵고 있는 숙소는 부쿠레시티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는
말 그대로 부쿠레시티의 중심입니다.
그런 곳에 에어비앤비로 운좋게
2만 원대 방을 하나 찾을 수 있었죠.
숙소를 나서면 힐튼 호텔과 루마니아
국립미술관이 바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하고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들과 럭셔리한 명품 샵들이
1934년에 지어진 아주 낡고 허름한
공용 주택과 공존하는 도시.
그것이 루마니아의 현재 모습입니다.
숙소에서 수동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여닫고
냄새 나는 복도를 빠져 나오면
루마니아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로
연결이 됩니다.
좀 거창하게 표현한다면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순간 이동을 하는 기분이 드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쌀쌀한 초봄 날씨 덕분에
모자를 눌러 쓰고 힐튼 호텔로 이어지는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40대 중반의 루마니아 남자가
자꾸만 저희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러더니 대뜸 이렇게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베트남, 중국, 일본, 한국...
제가 이렇게 말을 꺼내면 어떻게 대답을
하실런지요?"
영어로 몇 마디를 이야기하더니
불쑥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말을 건넸다.
영어로 말을 시작했지만, 마지막 문장은
또렷한 한국어 '안녕하세요'였습니다.
어딜가나 외국인들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은 있기 마련인지라, 그냥 그렇게
외국 사람에게 말을 걸고 싶은 남자이겠거니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루마니아에서는 체코나 헝가리처럼
아시아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많이 볼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간단하게 남자의 말에 대답을 하고
시선을 신호등 쪽으로 돌릴 때였습니다.
갑자기 남자가 자기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실 저희 어머니에게 아주 친한
친구가 한 분 계셨습니다.
그분은 좀 특별한 분이셨는데요..."
남자는 불쑥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머니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어머니가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니가 옛날에
아주 친했던 친구 분이 한 분 계셨다고
말을 하셨어요. 그분은 1950년 초에
루마니아에 와서 생활했던 북한의
전쟁고아였습니다. 어머니와는
같은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남자의 말을 듣는 순간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뭐라고요! 진짜 그게 사실입니까?!"
"네. 그럼요. 제 어머니 사진을 한 장
갖고 있는데 보여드릴까요?"
남자는 지갑에서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을 꺼내서 내 앞에 내밀었다.
어릴 적 찍은 어머니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세상에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
나는 그에게 지금 우리가 루마니아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바로 1950년대
북한 전쟁고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었다.
내 말을 듣고 남자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요?
사실 오늘 모임이 있었는데, 원래는 저 건물
뒤쪽으로 해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오늘은 힐튼 호텔 앞쪽으로 왠지
걷고 싶어서 모처럼 방향을 바꿔서 걸었어요.
그리고 여기서 당신들이 서 있길래
아시아에서 온 분들 같아서 말을 붙여 본 것입니다."
그가 우리가 루마니아에 온 까닭을
알 수는 결코 없는 일이었다.
그냥 길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만난
생전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먼저 말을 걸었고,
1950년대 북한에서 온 한 고아와
자신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이 전부였다.
이런 우연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백만 분의 일, 아니 천만 분의 일이라도
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페이스북 아이디를 교환하고
앞으로 또 기회가 되면 연락을 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서둘러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남자는 그가 가려고 했던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은
모두 우연과 우연이 겹쳐서 이뤄지는 일들이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는 일도 그렇다.
평생의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
그런 일들 역시 아주 작은 우연에서
시작된 만남들이다.
어젯밤 한 루마니아 남자와의 만남도
그런 우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 상식의 범위를 뛰어넘을 땐
그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1950년 초 북한 고아와 친구가 되었던
어머니를 둔 루마니아 남자와의 만남 역시
우리에게는 진한 여운과 의미를 남겼다.
'만약 신이 진짜 있다면,
지금 우리의 길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백만 분의 일도 안 되는
우연을 통해 우리에게 힘을 주고 있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와 보니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그로부터 메시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Amazing SIGN that there is a God'
(신이 존재한다는 놀라운 신호)
나에게 특별히 종교는 없다.
하지만 분명 나 역시 신의 존재를 믿는다.
나와 같은 '이신론자'에게도 어젯밤의
그 신기한 경험은 삶을 잠시 되돌아 보게 만든다.
그리고 삶을 전진시키는 소중한 에너지가 된다.
'신의 가호가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늘 함께 하길 기원한다.'
글: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Two Homes)
감독 김덕영
북한 전쟁고아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Two Homes) 제작에 힘을 주실 분들을 찾고 있습니다.
후원 계좌: 국민은행 878301-01-253931 / 김덕영 (다큐스토리)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성원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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