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이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

'호아로 수용소'를 가다

by 김덕영

베트남의 역사는 식민지 민중의 저항의 역사다. 끈질기고 완강하게 대항하고 어떤 압제에도 굴하지 않는 풀뿌리 같은 저항 의식을 갖고 있는 민족성이다. 천 년 넘게 이어져 온 중국의 침략이나 19세기 프랑스 식민 지배를 극복한 과정을 봐도 그런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1964년부터 1976년까지 진행되었던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 저항의 역사에서 가장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압도적인 미군의 공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철저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승리를 쟁취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베트남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서 그들이 했던 방식대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하노이 시에 자리 잡고 있는 '호아로 수용소'이다.


1990년대 중반에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현재는 입구 주변의 건물 몇 동만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있다


원래 '호아로'라는 명칭은 수용소가 있던 지명에서 유래했다. 그곳에서는 예부터 도자기를 굽는 화로가 있어 질 좋은 도기들을 많이 생산했다. 프랑스 식민 시절 때에는 호아로 거리에서 목탄 난로와 석탄 난로 등이 판매되었다. 불이 붙는 용광로 같은 곳이라 하여 호아로(火爐)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이곳에 포로수용소가 건설된 것은 1886년, 당시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인들이 독립운동가들과 정치범들을 수용할 목적으로 하노이 시 중심에 건설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프랑스인들이 붙인 수용소의 이름은 '중심 가옥'이라는 뜻을 지닌 '메종 센트랄(Maison Centrale)'. 그들이 살벌한 감옥이나 수용소라는 표현 대신에 '메종 센트랄'이라는 조금은 거창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당시 프랑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하노이 사람들이 늘 생활하는 중심지에 수용소를 설치해서 베트남인들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서 프랑스 식민 정부는 프랑스에서 단두대, 즉 '기요틴(guillotine)' 두 대를 직접 공수해온다. 독립운동가들의 처형이 있는 날에는 기요틴을 수용소 입구까지 이동해서 모든 사람들이 처형 장면을 지켜보도록 했다. 이런 이유로 '호아로 수용소'는 베트남 역사책에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숨을 거둔 대표적인 장소가 되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컸던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상징물이었다.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단두대, 기요틴


수용소 내부에는 온갖 고문과 폭행이 난무했고, 구금자들은 인간다운 대접조차 받지 못했다. 식사는 불결했고 위생 상태는 최악이었다. 수용소에 공급되는 물의 양이 적어서 수십 명씩 규칙을 정해서 세수를 하거나 양치질을 해야 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아이들도 함께 구금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이들을 위한 특별한 공간이 제공되지는 않았다. 수용된 공간이 너무 적어서 때로는 사람 위에 사람이 누워서 생활해야 했던 곳도 있을 정도였다. 이럴 경우 몸이 크고 건강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맨 아래로 내려갔다.


비참한 생활이었지만, 수감자들은 외부와 연락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희망의 끈을 이어가려고 노력했다. 수용소가 하노이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탓에 수용소 창문을 통해서 담배나 간단한 음식들이 거래되기도 했다. 수감자들 중에는 가족들이나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서 돈과 함께 편지를 창밖으로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외부와 연락을 이어가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다.


프랑스 식민지배가 강화될수록 오히려 베트남인들의 저항 의식은 강해져서, 1910년대 400여 명에 불과했던 수감자들이 1954년 경에는 2천 명이 넘는 정치범들로 북적였다. 때리면 때릴수록 더욱 강해지는 베트남인들의 민족성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남이 승리하면서 프랑스의 지배는 끝이 난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서구 열강의 세력을 자력으로 몰아낸 첫 번째 사례였다. 이후에 '호아로 수용소'는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탈바꿈한다.



'호아로'가 다시 수용소로써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64년에 시작된 베트남 전쟁부터였다. 북베트남 인민군은 미군 포로들을 수용할 공간으로 '호아로 수용소'를 선택했다. 초창기 수용된 미군은 대부분이 미공군 조종사들이었다. 하노이와 북베트남의 공업지역을 파괴할 목적으로 시작된 미군의 폭격 작전(일명, 롤링 썬더 작전)은 압도적인 물량 공세로 북베트남 인민군의 전략지역들을 초토화시킨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 속에 실패로 끝난다. 북베트남 군의 대공 방공망이 생각보다 위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미군이 쏟아부은 폭탄의 양은 86만 4천 톤, 한국 전쟁 당시 65만 3천 톤을 썼던 것에 비하면 단기간의 작전에 엄청난 폭격이 감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작전은 실패로 끝난다. 확전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중국 국경 지역에 대한 폭격 금지 명령으로 인해서 실제적으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미군 조종사 포로들만 늘어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포로들이 수용되었던 '호아로 수용소'


흥미로운 것은 '호아로 수용소'를 미군 포로들은 '하노이 힐튼(Hanoi Hilton)'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는 점이다. 감옥에 수감된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말로써나마 위안을 삼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단지 말이 아니라 당시 미군 포로들에게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유와 개인적인 생활이 보장되었다. 베트남 전이 확전을 거듭해가면서 많은 미군 사상자들이 발생하던 시점부터는 전투로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하는 미군들에 비해서 포로수용소에 갇힌 생활이 훨씬 안전하고 안락(?)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한 '하노이 힐튼'이라는 별칭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서, 실제로 하노이에 자리 잡은 힐튼 호텔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별도의 명칭('힐튼 하노이 오페라')을 따로 만들어서 영업을 시작해야 했다.


'힐튼 하노이 오페라' 호텔은 '호아로 수용소'의 별칭 '하노이 힐튼' 때문에 명칭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호아로 수용소'에는 베트남 민족의 끈질긴 저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의 서대문 형무소와 비슷한 위상을 지닌 곳이다. 다만 몇 가지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우리의 서대문 형무소가 과거의 기록에 역점을 둔다면, 베트남의 '호아로 수용소'는 과거보다는 분명히 미래에 방점을 찍고 있다. 미국과 벌인 베트남 전쟁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박물관 입구에 마련된 특별 전시 공간에서는 미국과의 수교 20년이 되는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선전물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호아로 수용소'에 포로로 감금되었던 존 메케인 전 상원의원을 비롯해서 굵직한 정치인, 군인들의 베트남 방문과 수용소 직원들과의 감동적인 재회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과거 전쟁으로 얼룩진 상처보다는 미국과의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모색하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Building up the future'(미래를 건설한다)라는 제목이 붙은 섹션에서는 2000년 빌 클린터 전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발전하고 있는 양국 간의 경제 교역과 기업 투자 활성화 방안 등에 관한 베트남 정부의 적극적인 개방 의지가 뚜렷이 확인된다. 얼마 전에는 북대서양 조약기구 '나토(NATO)'의 창립 70주년을 기념해서 미국 주도의 세계 지배 질서와 서방세계의 움직임에 대해서 1시간가량을 할애한 특별 방송이 국영 TV를 통해서 방송되기도 했다. 한 마디로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 질서 속에 편입해서 보다 발전된 경제 환경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전쟁까지 벌인 나라치고는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과거를 단지 과거로 집착하지 않고,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틀과 도구로 이해하려는 베트남 사람들, 그것이 베트남이 역사를 기록하는 방식이다. 역사의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과거보다 미래를 보려고 하고, 무엇보다 무엇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되는지를 명확히 한다. 역사를 책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구현하려고 한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그들은 미래를 낙관한다. 그것이 베트남인들이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호아로 수용소에서는 과거를 과거로만 인식하지 않고 미래와 연결시키려는 베트남의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잔인한 역사의 기록들이었지만, 단지 비참하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과거사를 재조명하고 역사의 정통성을 재해석한다는 것은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보다 다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명확한 기준과 지향점이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뒤따르지 않는 과거사 조명과 정통성 논쟁은 권력을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베트남인들의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 보자면 '그런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에 불과할 뿐이다. '자존심 있게 미국과 친구'가 되는 것, 현재 베트남의 역사는 그 과정의 기록이다. 과연 우리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서대문 형무소에 일장기를 걸고, 일본 천황과 악수하는 사진을 걸어놓을 수 있을까?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 했을까? 자존심이 없어서? 못 사는 나라라서? 글쎄... 역사는 먼 곳에 있다고 느껴지지만, 늘 멀리만 있지 않은 것 같다.


글: 김덕영 (작가, 다큐멘터리 프로듀서)

현재 1950년대 북한 전쟁고아들의 유럽 생활기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Two Homes)'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그로인해 비참한 생활에 처한 아이들의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은 201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유럽 현지 취재를 끝마치고 현재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참가를 목표로 편집 중에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공식 후원 계좌: 국민은행, 878301-01-253931, 김덕영(다큐스토리)


<두 개의 고향(Two Homes)> Trai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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