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철학자라는 낯선 이름 앞에서...
'직업으로서의 철학자'
지난 2월 아이슬란드에서의 일이다. 나는 아이슬란드 대학교 초청으로 한 달 가까이 레이캬비크에 소재한 아이슬란드 대학교 영상 인류학과에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했다. 국립대학교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동문 대학 선배 한 분이 지인으로 있는 아이슬란드 대학과 나를 연결시켜주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경복궁 서촌에서 '김PD의 통의동 스토리'라는 와인바 겸 복합 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가게를 운영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가게를 하면 제일 힘든 게 개인적인 자유 시간을 갖는 데서 상당히 제약을 받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어쩔 수 없이 다달이 들어가는 운영비와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 답답하고 어딘가에 갇힌 듯한 삶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법이다. 결국 나는 15년 동안 벼르고 벼르던 일을 벌이고 만다. 지금 제작하고 있는 '두 개의 고향(Two Homes)',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의 닻을 올린 것이다.
동유럽, 1950년대, 북한 전쟁고아,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손에 쥔 채 나는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가게를 내놓고, 살고 있던 집을 정리했다. 마음먹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결정을 하면 그다음부터는 일종의 관성의 법칙 같은 게 작용한다. 일사천리 정도는 아닐지라도 일은 어떻게든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낯선 나라 아이슬란드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처음 레이캬비크에 도착해서 아이슬란드 대학교를 찾아가던 날이 기억난다. 그날 나는 배낭과 물병부터 챙겼다. 숙소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약 2.5킬로미터 정도, 말이 2.5킬로미터지 막상 걸어가려면 한 30분 이상을 걸어가야 한다. 버스도 있고 택시도 있지만, 대학교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살인적(?)인 아이슬란드의 물가 때문이었다. 레이캬비크에서는 버스 한 번 타는 데 한국 돈으로 4천 원이 든다. 두 사람이 이동하려면 학교 한 번 왕복하는데 1만 6천 원 정도가 드는 것이다.
버스비가 그 정도니 매일매일 들어가는 식비에다 숙박비를 더하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돈이 들어간다. 에어비앤비로 집을 구하려고 사이트에 접속했더니 40평대 아파트 한 달 렌트비가 1천만 원을 넘는 곳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정말 그날 낯선 세상과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아이슬란드에 상식을 뛰어넘는 생활비가 들어가는 이유는 나중에 다시 설명할 생각이지만, 어쨌든 자본주의의 가장 기본 법칙인 낮은 주택의 공급률과 빈 집을 찾는 엄청난 숫자의 수요가 만나서 만들어낸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다.
결국 2,3킬로미터 정도 하는 거리는 걸어 다니기로 작정했다. 뭐 이참에 운동 삼아서 걷는 것도 나쁠 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그렇게 매일 걸어 다닌 생활을 한 달 정도 하니까 뱃살이 쏙 들어가는 자연산 다이어트에 성공하기도 했다. 나이 50 정도 되면 대부분 남자들이 뱃살 때문에 걱정이 늘기만 하는 게 사실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시작한 걷기였지만, 세상은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추운 겨울, 아침, 등굣길, 그것이 낯선 곳에서 처음 새롭게 마주하는 생활의 키워드들이었다.
때는 겨울이었지만, 아이슬란드의 맞바람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침에 정성껏 머리를 만지고 옷을 차려입어도 아이슬란드의 거센 바람 한 번이면 모든 건 헛고생이 되어버린다. 구글맵을 길잡이 삼아 아이슬란드의 낯선 땅에서 첫 출근을 시작하던 날은 정말 불안하고 초조했다. '약속했던 시간을 넘기면 어쩌나', '길은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여기에 아이슬란드의 칼바람을 타고 빗줄기가 쏟아진다. 우산 같은 건 써봐야 소용도 없다. 바람이 워낙 세다 보니 비가 얼굴을 향해서 정면으로 치고 들어온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베트남에선 하늘에서 내리는 비도 종류가 다양해서 쏟아붓는 비, 옆으로 치고 들어오는 비,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비까지 있다고 하던데, 아이슬란드에서는 칼바람 비다. 사선을 그으면서 옆으로 치고 들어온다. 아무튼 그런 빗속에선 몇 분만 걸어도 옷이 다 젖기 마련이다.
그렇게 젖은 옷을 입고 아이슬란드 대학에 도착했다. 난방시스템이 풀가동되는 대학교 안에서는 생각보다 젖은 옷도 금방 마른다. 나를 초청한 교수와 인사를 나누며 커피 한 잔을 했다. 아이슬란드가 복지 국가라는 건 아침에 식사를 못하고 오는 직원들을 위해서 건물에 교수 전용 카페테리아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 커피는 물론이고 간단한 빵과 케이크, 주스 같은 것들이 제공되었다.
잠시 후 교수가 나를 이끌고 자신의 지인들에게 소개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아이슬란드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는 국립 아이슬란드 대학교, 그곳에서 쟁쟁한 교수들과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약간 긴장도 되고, 시작이 반이라고 첫인상부터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악수를 하며 간단한 인사말이 오고 가자, 나를 초청한 대학교수가 본격적으로 그들에게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북한 전쟁고아들의 동유럽 생활기라는 독특한 아이템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고, 책도 몇 권 썼고, 경복궁 근처에서 와인바와 복합 문화공간도 운영했다는 이야기였다. 생각보다 자세하고 공손하게 나를 소개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고마운 생각이 스쳤다. '대충 이름 석자 정도 소개하고 끝날 수도 있었을 텐데...'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것이 아이슬란드식 존경의 표시였다. 타인에 대한 매너였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그가 썼던 맨 마지막 표현에 내 귀가 쫑긋거렸다. 아마 처음 듣는 말이라서 생소하기도 했고, 나에게는 낯설기만 한 단어 하나 때문이었다. 바로 이 단어, '필로소퍼'(philosopher)였다.
"이 분은 한국에서 온 다큐멘터리 감독입니다. 책도 몇 권 쓰셨고, 와인바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북한 전쟁고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고 있고... 아. 그리고 이 분은 필로소퍼입니다."
다른 모든 표현을 압도하는 단 한 문장, ‘이 분은 필로소퍼입니다', 'He is a philosopher'. 한두 번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마다 그는 나를 '필로소퍼'라고 소개했다. 한국말로 표현하면 역시 분위기가 더욱 낯설어진다. '이 분은 철학자입니다'. 그런데 생소하고 낯설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직업으로서의 필로소퍼', 과연 그런 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한국에서 철학자로 살아간다는 게 말이다. 직업인으로서 철학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그런데 아이슬란드에서는 그 직업으로서의 철학자가 가능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나를 소개할 때마다 그런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아이슬란드의 독서율은 세계 최고다. 1년에 수백 권의 책을 읽는 책벌레들의 나라다. 더욱 흥미로운 데이터는 전 인구의 30퍼센트가 작가라는 사실이다. 세 명 건너 한 명 꼴로 자기 책을 출간한 작가들의 나라라는 점이다. 이런 독서에 대한 애정이 나라를 지적으로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람들의 삶 속에서 합리적인 판단이 녹아들게 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작고 나약하기만 한 인간으로서의 성찰, 이기심보다 타인과 전체를 배려하려는 마음, 형식과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철저하게 실용적이며 자율을 존중하는 삶. 나는 이런 모든 것이 가능한 출발점에 아이슬란드식 지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필로소퍼'라고 일일이 사람들에게 소개 주신 아이슬란드 대학교 영상 인류학과 지그리용 하프스타인손 (Sigurjon Hafsteinsson) 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덕분에 한국에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낯설고 생소하지만 아주 기분 좋은 직장인으로서의 철학자라는 나 자신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직업인으로서의 철학자'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진정 나를 '필로소퍼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할까. 오늘도 발 밑에 무수히 떨어지는 물음표들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행복하고 기분 좋아지는 질문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하나 더... 역시 '직업인으로서의 철학자'는 남이 불러줄 때 진가가 느껴질 것 같다. '나는 철학자입니다'(?), 글쎄 그건 왠지... 놀라운 것은 한국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나는 철학자입니다'라고 소개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표현하고 다닌 적이 있었나? 글쎄...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아는 범위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철학'은 명사로서 보다는 '동사'로서 항상 의미를 지녔다. 그래서 그에게는 '철학하다'가 더 훨씬 근사한 개념이었다.
글: 김덕영 (작가, 다큐멘터리 제작자)
현재 1950년대 북한 전쟁고아들의 유럽 생활기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Two Homes)'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그로인해 비참한 생활에 처한 아이들의 역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 '두 개의 고향'은 2019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유럽 현지 취재를 끝마치고 현재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참가를 목표로 편집 중에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공식 후원 계좌: 국민은행, 878301-01-253931, 김덕영(다큐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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