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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Nov 29. 2019

산 자와 죽은 자를 위한 두 개의 촛불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충실하는 삶을 위하여

2004년 루마니아 부쿠레쉬티에서 한 여인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의 일이다. 올해로 85세가 된 그녀의 이름은 제오르제타 미르초유.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낯선 동유럽의 나라 루마니아까지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까지 날아갔던 이유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남편 때문이었다. 뜻밖에도 그녀의 남편은 조정호라는 북한 남자였다. 


19살 때 그를 만나 사랑을 하고 1961년 평양 기차역에서 마지막으로 남편과 작별을 했으니까 약 60년 가까이 남편과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를 올해 2월 다시 만났다. 15년 만의 일이다. 그녀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교회에 가서 북한에 있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일이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제단과 죽은 자를 위한 제단으로 촛불 제단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다

그녀가 믿는 종교는 루마니아 정교회라고 해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기독교나 가톨릭과는 사뭇 다르다. 1054년 기독교가 두 개로 분리되면서,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하는 비잔티움 제국에는 서유럽의 가톨릭과는 다른 동방 기독교, 곧 정교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교회는 러시아, 그리스, 루마니아 등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서유럽의 가톨릭과 선을 긋는다.  


그중에서도 루마니아 정교회는 특히 더욱 강한 신비주의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지역적으로 산악지역이 많은 탓에 예전에는 사람의 왕래조차 쉽지 않았다. 숲과 나무가 많은 지역일수록 신비주의적인 정령 신앙이 발전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루마니아 정교회의 이런 종교적 특성은 살아 있는 세속적인 세계와 죽은 뒤의 사후 세계를 엄격하게 분리시켰다. 


기독교의 사후 세계가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되고, 가톨릭에서 그 사이에 연옥을 집어넣어 인간의 영혼이 죽은 뒤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른 종교관이다. 그들에게는 죽음 너머의 세계는 이성이 판단할 수 없는 세상이다. 지극히 세속적이면서 합리적이다. 따라서 죽은 다음에 영혼이 다시 재회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을 지킨다는 종교적 차원의 삶의 원칙이라고나 할까.  


살아 있는 사람(Vii), 죽은 사람(Morti)라고 적힌 촛불 제단으로 분리가 되어 있는 제단


미르초유 같은 여성이 북한인 남편을 50년 동안 기다리고 있는 이유 역시 그녀의 종교적 내세관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그녀가 믿는 종교에 의하면 죽은 다음에 다시 천국에서 남편의 영혼과 재회하는 믿음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 그녀는 살아 있는 이 현실 세계에서 남편과의 재회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루마니아 사람들의 이런 내세에 대한 믿음은 현실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발전해갔다. 미래나 내세보다 지금 당장 눈앞의 현실에 주목하는 삶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고향>에 등장하는 루마니아 여인 제오르제타 미르초유

그런 현실주의적인 신앙 때문인지 루마니아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기도를 마치고 꼭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교회 바깥에 마련된 촛불 제단에 가서 기도를 올리는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촛불 제단이 ‘산 자(Vii)’를 위한 제단과 ‘죽은 자(Morti)’를 위한 제단으로 엄격하게 분리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신자들은 손에 손에 노란색 작은 초를 한 움큼씩 집어 들고 제단 앞으로 향한다. 그리고 종이에 적어 온 ‘산 자'와 ‘죽은 자'의 이름이 적혀 있는 리스트를 확인하며 하나씩 촛불을 밝힌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런 전통이 생겼는지는 그들도 잘 모른다. 성직자에서 신앙심 깊은 사람들까지 만나 봤지만, 그들 중에서 정확히 언제부터, 왜 이런 종교적 관습이 생겨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삶과 죽음이 수없이 교차했던 질곡의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은 비극적인 상황에 많이 노출될수록 그 고통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서 다양한 해석을 하게 된다. 그것이 살아 있는 자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실 보통의 신앙생활에서는 살아 있는 존재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루마니아 사람들처럼 죽은 자를 위해 리스트까지 적어서 죽은 자들만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현실적이다. 죽음 너머의 세계보다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을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모든 것은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죽은 사람을 위해 촛불 하나 정도는 밝힐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죽음과 내세에 대한 불가지론적인 해석은 신비주의로 이어졌다.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또 다른 차원의 상상으로 이어진 것이다.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드라큘라의 전설 같은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전설의 주인공이기도 한 드라큘라는 바로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영주로서 종교와 신비주의가 가장 절묘하게 결합된 경우 중 하나일 것이다.  


15년 전 루마니아 부쿠레쉬티의 한 작은 교회 뒷마당에서 나는 그녀가 남편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장면을 렌즈 속에 담았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매주 한 번씩 북한인 남편을 위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남편이 무사히 루마니아의 가족 품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촛불을 밝힌 자리는 ‘죽은 자'를 위한 제단이 아니다. 그녀가 남편을 위해 촛불을 밝히는 자리는 여전히 ‘산 자'를 위한 제단이었다. 미르초유처럼 북한 남편과 결혼한 사람들 중에 현재까지 6,7명 정도가 생존해 있다. 그들은 오늘도 남편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산 자'의 제단에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숭고한 사랑이 놀라울 뿐이다.  


글: 김덕영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작가) 



* 이 글은 문화예술 전문지 '아트나우(ARTNOW)' 12월 호에 게재된 글을 옮긴 것이다. 부제를 정하면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충실하는 삶'으로 정한 것은 루마니아의 촛불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었다. '촛불'은 전통적으로 이루지 못한 간절한 소원, 바람, 영적 구원 등의 요소로 서구에서는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처럼 촛불이 정치적인 의미로 해석된 것은 쉽게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그 상징은 사회구성원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 수 있는 통합적 기능과 역할을 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그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였다. 


상징은 순수해야 한다. 종교가 됐든 믿음이 됐든 개인의 소원이 됐든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상징은 타락한 상징이 된다. 하루 속히 순수한 상징들이 문화적 아이콘으로 제기능을 하면서 국민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 루마니아의 여인 제오르제타 미르초유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영화 <두 개의 고향> (Two Homes)에서 자세히 만나볼 수 있다. 영화는 지금 상영을 준비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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