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다.
'개봉 다이어리' 2020년 11월 19일.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온다.
빼앗긴 개념의 땅에도 꽃은 피는가? 글쎄...
빼앗긴 들에도 꽃은 피는가?, 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 일제 시대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설움을 노래한 시인 이상화.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주권을 빼앗겨도 자연은 꽃을 피우니 비록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길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러니 빼앗긴 나라는 반드시 되찾을 때가 온다는 무시무시한 민족의 울분을 노래한 시다.
하지만 만약 개념을 빼앗겼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모든 지배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정책은 인간의 사고와 판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개념'에 있다. 개념을 빼앗기면 생각의 꽃은 피어나지 못한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만 봐도 그렇다. 주권은 빼앗겼지만, 시인의 개념은 빼앗지 못한 것을 잘 알 수 있다. 총칼로도 빼앗지 못한 것인 시인의 마음이었고, 시인의 개념이었다. 그런 민족시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주권은 언젠가 반드시 회복된다.
대한민국이 가난에서 풍요로 발전해가는 시대를 둘 다 경험한 나 같은 세대에게는 너무나 이 나라가 고맙다. 사랑하는 사람, 가족, 친구, 동료들을 만나게 해준 소중한 곳이다. 비록 나라는 작지만 세계로 더 넓게 뻗어나갈 수 있는 자신감, 문화적 저력을 나에게 선물했다.
'빼앗긴 개념의 땅에도 꽃은 피는가?'
글쎄. 그런 땅에서 생각의 꽃은 결코 피어나지 못한다. 일상의 먹고 즐기고 사는 사이 사이에 개념이 중요한 이유다. 나는 일종의 '개념주의자'다. 인간의 두뇌가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듯, 개념은 인간의 사고로 직행하는 척수와 연결된 어느 부위쯤 있다고 믿고 있다.
2012년 돌덩이들만 나뒹구는 고대 그리스 유적지를 찾아서 여행을 시작한 건 그런 이유였다. 나 혼자 '개념의 여행'이라 이름도 붙였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나에게 고대 그리스 철학은 신비스럽고 숭고한 대상이었다.
그렇게 나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철학이라면, 적어도 나의 두 발로 고대 그리스 돌덩이들은 직접 디뎌봐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지도를 꺼내서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적지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고대의 도시들에 점을 찍었다.
지금은 터키의 땅이지만, 2500년 전 이오니아(Ionia)라고 불렸던 터키 서부 해안 지역들에는 그리스 철학의 발상지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오죽하면 지방에서 서울로 이사를 가듯이 아테네 사람들이 짐을 싸고 이오니아로 향했을 정도였을까.
그렇게 혼자서 배낭 하나 달랑 메고 고대 그리스 땅으로 여행을 시작했다. 터키에서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 에게해에 뿌려진 신화를 간직한 오래된 섬들, 그리고 마지막 아테네와 스파르타로 유명한 그리스 본토로 이어지는 한 달 간의 여정.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여행을 시작했기 때문에 여정은 아테네에서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로도 유명한 '오리엔탈 특급 열차'를 타고 돌아올 생각까지 했으니, 떠나기 전까지는 정말 꽤 로맨틱한 여행이 될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렇게 힘들게 돌아다닌 적이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힘든 여행은 남는 것도 그만큼 많았다.
모든 생각의 시작은 개념이며, 개념을 잃어버리면 운명조차 되살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 여행이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개념들 속에서 자신의 꿈과 미래를 이어가고 있는 존재들이란 사실도 깨달았다. 일종의 내가 좋아하는 희망의 단서들이다.
아무튼.
2020년 참 힘든 시절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물론 힘든 만큼 가치로운 일들도 많다. 영화를 만들면서 기적 같은 경험을 하는 짜릿함은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보다 강렬하게 생활 속에 파고든다. 생각이 많이지면서 과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한참을 고민하게 된다.
경제도 어렵고 정치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오리무중이다. 안개 낀 바다를 쪽배에 타고 항해하는 느낌도 든다. 막막하고 어디선가 암초라도 나타나 배가 풍비박산 날 것처럼 두렵기까지 하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 신념, 정치적 판단 역시도 결국 개념에서 시작되어 개념으로 끝이 나는 것인데... 정치의 영역만을 놓고 볼 때, 치열한 이념의 대결에서 승자는 결국 개념을 만들고 개념을 장악한 자들이 아닐까.
'공정', '평등', '정의', '민주', '인권', '생명', '가치', '공유', '민족', '발전', '진보', '과거', '역사', '광주', '세월호', '문화', '예술', '영화', '젊음', '신선함'...
물론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한민국 보수가 빼앗긴 개념의 리스트들이다. 어쩌면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과 신념 이전에 개념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개념의 전쟁에서 다시 승리하는 것은 아닐까.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온다', 더 이상 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시'라는 개념, '봄'이라는 개념을 빼앗겨서는 안 될 일이다. 빼앗긴 개념의 땅에서 꽃은 절대로 피어나지 않는다.
얼핏 보면 돈 안 될 것 같은 철학, 책, 문화, 예술에 남은 인생을 걸겠다는 생각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