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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Sep 04. 2021

평범한 사람들의 품격

누구나 마음속에 아름다운 신성을 간직하고 있다

누구나 살면서 짜릿한 순간들을 경험한다. 목표로 했던 것의 달성,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 고난과 역경의 반전, 때로는  욕망의 충족도 포함될 수 있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사람들과 나눈 기억들 속에서도 짜릿한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앞서 말한 것들이 지극히 혼자서 경험할 수 있는 개인적 영역이라면, 후자는 관계라는 틀 속에서만 존재한다. 


뭔가에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터리는 아무리 강력한 포텐셜을 갖고 있다 해도 작은 꼬마전구 하나 켤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가 쓰는 일상의 모든 전자 장치들이 그렇듯이 연결되지 않으면 힘은 발생하지 않고 작동도 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짜릿한 순간들에는 반드시 누군가 혹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와의 연결이 필수적이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글이란 것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을 지닌 도구다. 혼자서 보고 즐기기 위해 글을 쓸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누군가 읽어주고 조금이라도 자신이 글을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고 지혜를 얻을 수 있다면 글 쓴이로서는 그보다 더한 기쁨이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 쓰기는 참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도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글 쓰기의 매력에 빠져서 10년 전부터 틈틈이 글을 썼다. 돌이켜 보면 그 시간들은 글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었던 시간들이기도 하다. 아직은 글만 써서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전업작가의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돈이나 명예보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절반은 성공했다고 본다. 


누구나 마음속에 아름다운 것을 닮아가려는 본성이 있다는 믿음, 그것이 나의 글쓰기의 출발점이었다. 물론 정반대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뭐, 일종의 성악설적인 관점이다. 영국의 근대 철학자 토마스 홉스 같은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당연히 사악한 본성들의 충돌을 막고 이기심을 억제시켜야 인간 사회는 건강하게 돌아간다. 그래서 인간들에게는 계약 필요하고 법으로 통제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다.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감성과 이성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는 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정의 내리는 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상당 부분 인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실 '인간은 인간에 늑대'라는 표현도 따지고 보면 출발은 고대 로마에서 시작된다. 'Homo homini lupus', 호모 호미니 루푸스, 폭력적이고 잔인한 늑대의 본성과 인간 안에 내재된 비윤리적 동물적 성향이 유사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토마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법의 지배가 존재하지 않은 자연적인 야만 상태에서 인간이 늑대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본성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은 나쁜 늑대'처럼 행동한다. 물론 한 가지 다른 해석의 여지도 있다. '좋은 늑대', '야만의 본성이 퇴화된 늑대'도 있는 것은 아닐까?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를 증명하듯 그런 늑대의 본성에서 진화된 어느 개 한 마리가 치매에 빠져 집을 나간 할머니를 구출한 일화가 며칠 전 보도된 적이 있었다. 정신을 잃고 물가에 쓰러져 죽음 직전까지 갔던 노인은 이틀 동안 야외에 버려진 상태였기 때문에 저체온증으로 사망에 이르렀을 텐데 다행히도 체온을 잃어버리지 않아 목숨을 건졌다. 바로 할머니가 기르던 개가 죽을힘을 다해서 노인의 체온이 떨어지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걸 보면서 역시 개는 고양이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람을 살린 고양이라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인간은 인간에 늑대'라는 개념은 프로이트로 넘어와서 인간 안에 존재하는 타인을 지배하는 본능으로 규명되었다.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지배하려는 본능을 의미할 것이다. 그에겐 문명화된 세상에는 그런 본능이 억제되고 조절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경험을 했던 비엔나 중심의 철학자들 역시 문제의식은 동일했다. 끝을 모르고 질주하던 폭주기관차 같았던 낙관적 근대성이 전면적으로 회의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것도 출발은 인간을 늑대의 본성에서부터 해석하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그런데 그 모든 해석과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못된 심보(?)가 발휘된 나는 가능하면 그냥 늑대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선한 본성에서 세상을 보고 싶기도 하다. 거창하게 말하면 성선설의 입장일 수 있다. 분석과 해체에 능한 수많은 철학자들이 욕망과 본능을 통해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해석하려는 시도와는 정반대일 수 있다. 그냥 가능하면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입장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며칠 전 아주 우연한 기회에 내가 쓴 책 몇 권을 읽고 삶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인적으로 너무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들이었다. 우울증에 빠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소외되었다가 다시 사람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다는 분도 있었고, 놀랍지만 삶을 송두리째 바꾼 사람도 있었다. 가장 극적인 경우는 평범한 육십 년 인생을 뒤로하고 시인으로 등단, 윤동주 문학상과 같은 권위 있는 수상작을 발표한 어느 시인도 있었다는 사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하나가 감동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 글을 쓰려고 마음먹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너무 책을 쓰고 싶고, 책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내 손으로 책을 몇 권 찍었다. 책을 어떻게 만들지 경험이나 지식도 없어서 아래아 한글 프로그램으로 책을 편집했던 시절이었다. 단순하고 무식했지만 그래도 참 순수했던 시절이다. 


늘 그렇듯이 머리가 복잡하기보단 역시 단순한 게 좋다. 선택할 게 많으면 결정 장애가 온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니란 사실을 그때 직접 경험했다. 다른 선택의 순간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나 자신을 믿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결국 나를 믿었던 그 순간들에서부터 진정 가치로운 삶의 작은 발견들도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아직은 갈 길이 멀기 때문에, 다시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맨다. 먼 길을 가려면 물 한 병, 지도 하나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함께 그 먼 길 어느 지점까지 동행할 수 있는 길벗이 있다면 가는 길이 조금은 순탄하지 않을까. 어차피 마지막 다다를 우리 인생의 종착점들은 서로 다르겠지만, 조금이라도 그렇게 함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좋은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참 행운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기억들 속에는 그래서 신을 닮고자 하는 착한 본성도 존재하는 것 같다. 당분간은 계속 그렇게 믿기로 하겠다. 


글. 김덕영 

2021년 9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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