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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Dec 08. 2021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국이 트렌드가 되기 전 1996년 어느 해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 한국어 학과는 고사하고 한국어 강좌도 없었던 1964년, 한 한국인 유학생이 품었던 꿈이 있었다. 바로 미국에 한국을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강좌를 하나 개설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대한민국으로 상징되는 K-팝이나 영화, 컬처가 전 세계의 트렌드로 자리잡기 한참 전의 일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1996년 전혜성 박사가 쓴 <엘리트보다는 사람이 되어라>라는 책에 등장하는 초창기 한국문화 보급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숨은 공로자들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내용을 잠시 소개하면 이렇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투철했던 전혜성 박사(책의 저자)의 남편 고광림 박사는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꿈이 있었다. 그건 바로 하버드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 하는 일.


그는 이를 위해 당시 미국 최고의 동양학 권위자이자 하버드 교수였던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를 찾아 갔다. 그리고 목적했던 한국어 강좌 개설을 설득하기 위해 둘의 대화는 한 시간이 넘게 계속됐다. 예정되었던 강의 시간까지 넘겨 가면서 말이다. 


밖에서는 라이샤워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기다리는 학생들의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시 후 고광림 박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강의를 기다리던 학생들 중에는 훗날 하버드 대학에서 최초의 한국어과 교수가 된 미국인 에드워드 와그너도 끼어 있었다.


"아니 고 선생 아니십니까? 누가 라이샤워 교수님을 이토록 오래 붙들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고 선생 덕분에 우리는 세미나 시간을 한 시간이나 잡아먹었답니다."


"죄송하게 됐군요. 그렇지만 오늘 면담으로 후에 당신이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말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게 될지도 모르니 한 시간 기다린 대가로는 충분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그날 고광림 박사가 했던 말은 훗날 현실이 된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한 예산 지원 덕분에 한국을 공부하겠다는 연구원도 없었다. 연구자가 없으니 연구의 결과물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한국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현실감 없는 말로 들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고광림 박사는 당시 하버드 옌칭연구소 소장 대리를 맡고 있던 라이샤워 교수를 설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박사님.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하버드 대학에 중국과 일본학과는 있지만 한국학과는 없습니다. 이 사실이 무척 애석합니다. 한국을 알아야 중국과 일본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라이샤워 교수가 한 권의 책을 꺼냈다. 


"하기는 내가 이걸 읽다 보니 한국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한국 이름과 지리, 그리고 사찰이 많이 나오는데 한국 발음을 알아야 말이지요."


라이샤워 교수가 내놓은 책은 엔닌 Ennin의 <입당구법순례행기 (Ennin's Diary; The Record of a Pilgrimage to China in Search of the Law)라는 책이었다. 


그 책은 엔닌 혹은 지카 대사라고 불리는 일본의 한 스님이 조선을 거쳐 중국 당나라로 가면서 적은 일기였다. 라이샤워 교수는 박사논문을 책으로 내고자 그 책을 수정, 보완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한국을 한국 자체로 바라보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주변부 연구로서만 겨우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글을 읽으며 열악했던 당시 한국학 연구의 현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그렇게 간신히 라이샤워 교수의 동의를 얻어냈다. 한국학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이 아니라, 조선을 거쳐 중국 당나라로 떠났던 일본의 한 스님이 쓴 책에 등장하는 한국어 지명을 이해하기 위한 동기에서 한국어 강좌가 간신히 하버드 대학에 둥지를 틀 수 있었던 셈이다. 요즘처럼 케이팝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에 비교하면 참 씁쓸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자금과 학생들을 가르칠 강사 문제가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고광림 박사는 곧장 뉴욕에 있는 서두수 박사를 찾아간다. 당시 콜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 박사를 마치고, 문교부차관으로 내정되어 귀국을 앞둔 서두수 박사에게 강의를 맡아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고광림 박사는 이미 서울에 갈 채비를 마쳐놓고 짐까지 한국에 보낸 서 박사에게 다시 간곡한 부탁을 한다. 


"문교부차관을 할 사람은 한국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버드에서 한국어 강의를 할 사람은 선생님 한 분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해서 이 기회는 절대 놓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하버드에서는 한국어 강좌 개설을 알리는 통지가 도착했다. 서두수 박사는 문교부차관 자리를 마다하고 3년간 객원부교수로 강의를 맡았다. 라이샤워 교수는 일전의 열혈 한국학 학생이었던 미국인 에드워드 와그너에게 한국사 공부를 권했고, 서박사에게는 3년간 그를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어 강좌가 시작되었다. 그 강의 첫 수강생이 바로 훗날 하버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게 될 에드워드 와그너였다. 강의실 앞에서 자신의 교수님을 빨리 강의실로 보내달라고 호소했던 바로 그 학생이 한국학 교수가 된 것이다. 


고박사 부부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예일을 비롯해서 미국 여러 대학들에 한국어 강좌를 개설하기 위해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뿌린 씨앗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2021년 현재 미국 아이비리그 모든 대학에서는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전 세계로 범위를 넓히면 107개국 1,411개 대학에서 한국학 강좌가 개설된 상태다. 프린스턴 같은 명문대에서는 학기당 100명이 넘는 수강생이 수업을 듣고 있다. 


'중국과 일본을 더 잘 알기 위해서 한국을 알아야 한다'며 간신히 한국학 강좌를 설득던 1964년 일화를 떠올리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공교롭게도 전혜성 작가가 그 책을 출간하던 그해, 1996년 나는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10여 개 나라에서 온 학생들과 문학 토론 강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한창 토론이 무르익어 가던 순간, 우리를 지도하던 교사가 갑자기 과제 하나를 던졌다.


"자...여러분! 토론은 이 정도로 마치구요. 이제부터 그룹을 지어서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여러분 나라의 문학작품들을 찾아오도록 하세요. 작가와 제목을 쓰는 것, 잊지 마시구요"


교사의 말을 듣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이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과연 한국에 관한 책이 얼마나 있을까...?'


미국, 영국, 스페인, 일본... 교실을 빠져나와 서점으로 향하는 외국인 학생들 무리에서 몇 발치 떨어져 걸으며 무겁게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던 기억은 지금도 악몽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일본만 해도 '망가'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던 터라, 일본문화, 일본책이 프랑스 서점 곳곳에 진열되어 있었던 때다. 같이 공부하던 외국인 학생들 입장에서야 자기 나라 베스트셀러 작품 하나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에 불과할 뿐. 하물며 고전까지 포함하면 또 말해서 무엇할까.


교실에서 서점으로 향하는 그날의 그 길은 정말 멀게 느껴졌다. 정말 가기 싫었고, 여러 친구들 앞에서 초라해지는 나 자신과 마주하기 싫었다. 잠시 후 서점의 문이 열리고 10여 명의 학생들은 서가로 달려가 책들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아시아 코너로 가서 한국이라는 표지를 찾았다. 


그때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작은 라벨로 붙어 있던 'corea'라는 글씨...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문학 작품이라고는 조악하게 인쇄된 북한에서 출판한 프랑스어 고전 작품 몇 개, 나머지는 거의 대부분이 한국전쟁과 관련된 비참하고 처참한 사진이 실려 있는 책들이었다. 


나는 그때 문화로도 나라는 물론이고 한 개인이 참 비참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실감했다. 어쩌면 그때 그곳에서 '문화'가 강해야 나라도 커지고, 더 이상 나와 같은 처지의 한국인 학생들이 생겨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화예술에 한번 몸을 던져보자라는 각오를 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아무튼. 


그랬던 한국이다. 1950년대 하버드 대학의 '한국학 개설'은 그래서 우리가 그냥 그저 그렇게 쉽게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한류'의 바람으로 새로운 '한국학'의 시대가 열렸다고 하지만, 정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1960년대 미국 땅에서 처음 한류의 뿌리를 내리기 위해 헌신했던 바로 그들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 보면 대한민국의 역사 자체가 이런 숨은 공로자들의 덕분에 발전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엘리트가 되기보다 먼저 '인간'이 되고자 했던 순수한 사람들.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는 것 역시 우리가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이 든다. 


문득 얼마 전 막을 내린 리버티국제영화제가 떠오른다. 시민들의 1만 원, 2만 원으로 만들었던 영화제.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은 엘리트가 아니라 순수한 열정을 지닌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런 순수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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