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적 상상을 한 사흘 간의 교훈
*이 글은 인물과 상황에 대한 소설적 접근을 담고 있다. 허구적인 내용이나 과장이 있을 수 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글쓴이의 책임과 몫이다.
간혹 어떤 인물에 대한 접근을 하다 보면 빈 공백처럼 도무지 자료를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차를 타고 평원을 달리다가 마치 절벽 낭떠러지에 놓인 반쯤 끊어진 다리를 만나는 기분이다. 살아 있다면 직접 물어나 보겠지만, 이미 세상을 떠난 경우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한 인간의 연대기 속 블랙홀이다. 그럴 때는 대부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막다른 길에서 몸을 돌려 왔던 길 그대로 빠져나올 수밖에. 정말 미칠 듯이 그 비어있는 부분이 궁금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맨손으로 벽을 잡고 기어올라가고 싶은 심정이 들 때도 있다. 대부분 그건 한 개인의 드라마틱한 인생 전환점과 관련된 순간과 관련이 있다. 바로 그 순간이 한 인간에 대한 허구적 접근이 발동을 거는 순간이다. 난 그 순간을 경험하는 게 솔직히 은근히 재밌다.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도 든다.
'도대체 그는 왜 이 순간에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건 그의 인생 전체에서 봤을 때 전혀 논리에 맞지 않는 결정인데...', 대충 뭐 이런 느낌이 드는 경우들이다. 한 인간의 연대기에서 그런 블랙홀과 마주할 때는 늘 흥미롭고 박진감 넘친다. 내 마음대로 그를 상상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해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를 마음속 한가운데 놓지 않고서는 쉽지 않다. 그를 미워하거나 그를 좋아하거나 어떤 경우라도 마음속 중앙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순간은 곧 나의 상상력이 고도로 발휘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빈 공간 속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앞과 뒤, 위, 아래에 존재하는 사실의 파편들로 허구적 짜깁기를 시도한다. 물론 그것이 실체적 진실과 다를 수도 있다. 그건 내가 발견하지 못한 그의 인생에 관한 또 다른 자료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오류가 아니다.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선에서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묘한 줄타기다. 적어도 어쨌든 내가 한 인간을 이해하는데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얼마 전 나는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던 중에 흥미로운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미국의 석유사업가이자 억만장자였던 폴 게티였다. 유전 개발로 한창 돈을 벌 때인 1950년대, 그는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 명단 맨 앞머리를 장식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돈이 많았던 폴 게티에게는 한 가지 악명 높은 별명이 따라다녔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지독한 구두쇠'. 얼마나 지독했으면 자기 집 전화기에 동전을 넣는 장치를 붙여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전화 걸고 싶으면 쓰는 사람이 돈을 내야지', 돈에 관한 한 대충 이런 원칙을 지녔던 인물이다. 결국 세계 최고의 갑부 폴 게티의 집을 방문했던 손님들은 전화 한 통화를 하기 위해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전화기 옆에 달린 저금통 같은 구멍에다 돈을 집어넣어야 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얼마나 지독한 구두쇠라고 수군거리었겠는가.
그런 구두쇠 폴 게티가 죽은 뒤에는 석유사업가, 재벌이라는 명성 대신에 새롭게 얻은 직업들이 하나 있다. 아트 콜렉터와 자선가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누구나 죽은 자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 나쁜 것도 좋게 보려는 게 인지상정일 테니까. 폴 게티는 살아 있을 적에 그림을 좋아해서 틈만 나면 그림을 사 모았다고 한다. 순수하게 그림이 좋아서 샀는지, 아니면 돈 되는 그림을 사모으려고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덕분에 그는 아트 콜렉터가 되었다. 그리고 그가 죽자 평소 소장했던 그림들을 모아서 갤러리를 만들 정도였다. 바로 그것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폴 게티 미술관이다.
폴 게티 미술관은 산타모니카 언덕 기슭 100만 평이되는 넓은 부지 위에 조성되어 있다. 총 공사비 13억 달러가 들어갔고 모두 다섯 개의 건물을 짓는데 세계 최고의 건축가와 미술가들이 초대되었다. 미술관을 비롯해서 게티 리서치, 교육연구소, 문화 학교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예술 종합 센터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만 매년 수십만 명에 이르고, 예술문화 공간에서는 수천 명의 전문가들이 해마다 배출되고 있다. 한마디로 세계 최고의 복합 아트 센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부지가 높다 보니 전경이 탁 트여서 LA를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덕분에 사람들은 미술관에 와서 뭔가 막혔던 것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전시장 안에는 르네상스부터 후기 인상파까지 돈 주고도 살 수 없을 정도의 고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540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아이리스’를 비롯해서, 하이데거가 극찬했던 세잔의 정물화 ‘사과’ , 모네의 ‘건초더미’에 이르는 인상파 화가의 걸작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다. 한복 입은 조선 남자를 모델로 그려졌다고 해서 우리에게도 유명한 루벤스의 드로잉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세계 최고의 뮤지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나에게는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자기 집 전화를 남들이 쓰려고 할 때도 돈을 받으려 했던 악명 높았던 구두쇠 폴 게티가 죽은 뒤에는 무엇 때문에 아낌없이 남은 재산을 미술관 하나에 쏟아부었던 것일까. 모든 게 폴 게티의 유언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하니 더욱 궁금증이 일어났다. 그래서 자료를 좀 더 찾아봤다. 역시 예상대로 그의 인생에는 굴곡이 참 많았던 것 같다. 다섯 번의 이혼, 4명의 아내에게서 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한 명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또 한 명의 아들은 12살 때 병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손자들 여럿이 마약에 빠져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돈을 노리고 벌어진 손자 게티 3세 유괴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이유는 몸값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으려 했던 폴 게티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지독한 구두쇠 정신이 다시 한 번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1973년 부모의 이혼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로마에 살고 있던 16살의 게티 3세는 어느 날 몸값을 요구하는 마피아들의 손에 납치된다. 납치범들이 요구한 금액은 1700만 달러. 하지만 재벌 2세였던 아버지는 돈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당시 그는 폴 게티가 설립한 게티 오일 컴퍼니의 로마 지사장으로 한 달에 100달러의 월급을 받고 일하는 '바지 사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실제로 납치된 아들을 위해서 그렇게 큰 돈을 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납치범들은 세계 최대의 갑부 아들이 돈이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면서 16살 게티 3세의 한쪽 귀를 잘라서 소포로 보냈다. 만약 몸값 320만 달러를 열흘 안에 보내지 않으면 게티 3세의 다른 몸 어딘가를 더 잘라서 보내겠다는 협박 편지도 소포 속에 함께 들어 있었다.
결국 게티 2세는 아버지 폴 게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울며 하소연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나에게는 14명의 손자가 있다. 만약 납치범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앞으로 13명의 손자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 도움을 거절했다. 이쯤 되면 구두쇠 정도가 아니라 냉혈한으로 분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손자의 한쪽 귀가 잘린 상자가 소포로 배달되고 나서야, 폴 게티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인이 마피아들과 직접 협상에 나서, 320만 달러의 몸값을 270만 달러로 50만 달러나 깎았다. 이마저도 연 4%의 이자를 지급한다는 각서를 아들인 게티 2세에게 쓰게 했다. 끝까지 지독한 구두쇠의 정신을 잃지 않았다. 정말 일관성 있는 태도 하나는 알아줘야 할 것 같다.
한쪽 귀가 잘린 채 집으로 돌아온 게티 3세는 이후 납치 후유증으로 인한 극심한 불안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마약을 손을 대고, 급기야 24세 젊은 나이에 눈을 실명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후 휠체어에서 반신불수의 몸을 의지하며 살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렇게 비극적인 가족사를 살아생전 지켜봤던 탓일까, 폴 게티는 죽기 직전에 '인생에서 돈이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 말속에는 한 재벌의 쓸쓸하고 애잔한 감상이 느껴진다.
어쩌면 폴 게티가 죽은 뒤에 만들었던 게티 센터의 화려함과 안락함 속에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려 했던 한 억만장자의 쓸쓸한 자기 성찰의 순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게티 미술관은 모든 게 무료다. 평소 자기 집에 오는 손님들이 쓰는 전화기에도 돈을 받으려 했던 폴 게티가 죽은 뒤에 만든 세계 최고의 뮤지엄에는 단 한 푼의 동전도 넣을 곳이 없도록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폴 게티 미술관을 잦는 사람들은 그 많은 최고의 시설들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높은 대지 위에 조성된 탓에 미술관을 오려면 트램웨이를 타야 하는데, 그것도 공짜라고 한다. 지독한 구두쇠가 만든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공짜 미술관. 이런 게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어쩌면 그래서 인생은 끝까지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겠고. 누구나 인생을 되돌아볼 때는 조금이라도 따듯한 시선을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것이겠고.
하지만 공짜 미술관 안에도 단 한 곳 돈을 받는 곳이 있다. 차를 몰고 올 경우에 내야 하는 주차비다. 하루 주차비는 5달러. '나 같으면 그냥 다 안 받았을 것 같은데...'. 이 글을 쓰는데 걸린 3일간의 허락된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게 억만장자 폴 게티식 유머는 아닐는지. 아니면 푼돈의 소중함을 알려주기 위한 그의 인생철학?
폴 게티는 돈에 관한 한 탁월하고 비범했다. 주식 투자에도 재능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의 투자 원칙은 이렇다. "난 남들이 매수할 때, 매도한다. 남들이 매도할 땐, 그냥 보유한다.(곧 오를 떼니까)" 아무튼 뭔가 다른 인생을 살았던 사람임에는 분명해 보인다.
파이팅! 폴 게티!
지은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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