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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영 May 28. 2016

골목길의 유산

'나의 통의동 다이어리' (114)

   '길을 통해서 많은 걸 배운다.'

   사람은 살면서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아니 물어야 한다. 끈질기게. 사람이 스스로에게 '내가 누구인가'를 묻지 못할 정도로 바쁘거나 너무 행복해서 물음을 던지고 살 필요를 못 느낄 때, 보통은 그때부터가 뭐가 됐든 쇠락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건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이치는 아닌 것 같다. 사회나 국가, 심지어 지금 내가 운영하고 있는 작은 가게에도 적용되는 이치다. 그래서 말을 고쳐 말하면 이렇게 된다. 

   '가게를 운영하면서 주인은 끊임없이 '우리 가게는 뭐하는 곳인가'를 물어야 한다. 뭘 팔아야 하는지, 자신의 공간 속에 어떤 꿈과 이야기를 담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좀 거창했는가? 아니 분명한 건 '어떻게 이윤을 남길까'라는 물음과는 조금 차원을 달리하는 가게의 가치관,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기업으로 치자면 기업 철학이다. 이런 걸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게 나의 주장이다. 이윤에 관한 고민이 철학에 관한 고민을 밀어낼 때부터 가게나 기업도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사람이 그런 것처럼.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26-5번지. 내가 자리를 잡고 있는 통의동 골몰길의 주소다. 조금은 이름도 쑥스러운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이하 김통스)라는 공간을 하나 만들고 그곳에서 생활한 2년 반의 시간 동안 난 가급적이면 늘 '김.통.스'의 정체성에 관해서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무엇을 담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왜 하는가?'까지. 

   오늘 글은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런데 질문에 답을 찾기 전에 잠시 살펴볼 인물이 있다. 그녀는 덕분에 나는 통의동의 좁은 골목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사람이 살면서 길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서로 사랑하고 나누며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 사람이다. 바로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다. 난 그녀로부터 '골목길의 유산'을 물려받은 느낌이다. 


   1916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서 제인 제이콥스는 태어났다. 그러니까 올해가 그녀가 태어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렇게 표현하기가 아주 오래된 사람 같아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게, 그녀 덕분에 뉴욕 맨허튼의 작은 거리들이 살아날 수 있었고, 오늘날 우리는 그 거리를 걸으며 일상의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일개 타이피스트(속기사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가 이룬 성과 치고는 엄청나지 않은가. 도시 건축이나 디자인을 대학에서 공부한 적도 없다. 세상을 바꿔 버린 아웃사이더, 어쩌면 그녀가 세상에 태어난 건 그런 운명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건축가, 환경주의자, 디자이너, 도시행정가들이 그녀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작은 골목길들의 가치에 대한 탐색은 그래서 시간이 지나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다. 


    그녀가 뉴욕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40년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역 신문 기자로 일을 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뉴욕으로 이주해서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도 했다. 타이피스트 경력은 아마 그 이전의 일인 것 같다. 어쨌든 치밀하고 호기심 많은 성격 탓에 그녀 주위로 좋은 사람, 좋은 일자리의 기회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건축 잡지 <Architecture Forum>의 부편집장으로 발탁이 되었고, 1961년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이란 도시의 생생한 모습에서 착상한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 (The death and life of the great american cities)>이란 책을 저술하면서 전국적인 인물이 된 사람이다. 그녀는 늘 사람이 살아가는 활력 있는 도시, 창의력 있는 예술과 문화가 숨 쉬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골목길'임을 강조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통의동의 좁은 골목길에서 '김.통.스'를 오픈할 수 있는 용기도 어쩌면 그녀의 '골목길론'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대학도 나오지 못한 평범한 저널리스트가 일약 미국 문화를 뒤흔든 스타로 변신하게 된 과정에는 악역도 존재했다. 그런 악역 덕분에 주인공은 더욱 빛이 나는 법이다. 그가 바로 로버트 모지스라는 사람이다. 안토니 플린트는 이걸 <Westling with Moses>,  즉 '모지스와의 한 판'이라는 원색적이고 흥미로운 책 제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1930년대부 60년대까지 고층빌딩의 숲, 격자형으로 된 반듯한 구조, 오늘날 뉴욕을 상징하는 맨허튼의 기본 구조를 만들었고 실제로 그걸 구현해낸 사람이 바로 로버트 모지스다. 어떤 사람은 그를 가리켜 인류 역사 상 '가장 많은 물량의 건설사업을 주관했던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늘을 향해서 끝없이 뻗어가는 마천루의 도시 뉴욕, 그 번영의 시기에 엄청난 물량의 건물 신축공사가 로버트 모지스의 손에 의해서 사업 승인이 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시기는 속도와의 전쟁이었고 높이의 경쟁 시대였다. 느리면 진다고 믿었고, 위로 오를수록 성공도 가까워진다고 믿었다. 선거에 의해서 국회의원이나 공직에 당선된 적은 없지만 루스벨트 대통령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인물이다. 로버트 모지스 하면 늘 저돌적인 추진력과 잘 생긴 외모 덕분에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사람으로 기억을 한다. 여기에 덧붙여진 힘과 권위의 상징이 바로 뉴욕시 건축국장이라는 직함이었다. 한마디로 뉴욕의 틀이 만들어지던 시기에 엄청난 권력을 지녔던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그가 대학도 나오지 못한 한 여성에게 뉴욕 맨허튼의 미래를 놓고 벌인 승부에서 완패를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브롱크스와 롱아일랜드, 맨해튼과 뉴저지를 동서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려는 계획. 이것이 실현되면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그리니치 빌리지, 소호 등은 완전히 박살날 수밖에 없는 무차별적인 일종의 '속도전'이었다.

   제인 제이콥스가 그와 한 판 승부를 벌이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에게는 작은 골목길은 도시의 생명을 담보하는 살아 있는 세포들이었다. 인간의 몸이 세포를 죽이고서 생존할 수 없듯이, 도시의 실핏줄 같은 골목길들을 죽이고서 도시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는 주장이었다. 낡고 오래된 것에서 창조가 시작된다는 그녀의 믿음. 그렇게 시민들과 만나 뉴욕의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이 옳은가를 물었다. 새 것에서만 창조가 이뤄진다는 근거 없는 모더니즘적인 입장들이 도마에 올랐다. 활기를 잃어버린 거리에서 아이들이 무얼 추억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따졌다. 


   그렇게 시민들과 만났고 뉴욕시 도시건축 계획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단지 거리에 나가 피켓을 들고 시위 몇 번 했다고 이뤄진 결과가 아니었다. 철저한 리서치를 통해 인간의 미래를 닮은 뉴욕의 미래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호기심 어린 눈으로 즐겁게 길을 걸을 수 있는 뉴욕의 길거리들과 만날 기회를 얻은 셈이다. 뉴욕의 명성이 고층빌딩만이 아니라 걷는 게 행복한 보행자 천국의 길거리들에서도 나오고 있다는 걸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오래된 골목길과 낡은 가게들 속에 숨어있는 창조의 본성을 발견한 것은 제인 제이콥스만의 유산이었다.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돌이켜 보면, 나의 골목길과 창조성에 관한 관점에도 그녀는 엄청난 영감과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솔직히 그런 믿음이 없다면, 통의동의 작은 골목길에서 손님을 기다리며 장사를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좀 웃기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때로는 이런 거창한 이론이 사람을 살릴 때가 있다. 하루 세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지만, 때로는 그렇게 배를 탕탕 두르리며 호기를 부려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패기와 배짱, 공교롭게도 난 제인 제이콥스에게서 그런 유산들을 물려받고 있는 것 같다. 


    사실 난 그녀가 로버트 모지스 하고만 한 판 승부를 벌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한 판 레슬링 승부를 벌여야 했던 상대들이 몇 명 더 있었다. 그녀가 줄기차게 싸웠던 도시 이론으로는 에버니저 하워드의 '가든 시티'(전원도시), 르 꼬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Ville Radieuse)가 있었다. 세상에 르 꼬르뷔지에와 맞짱을 뜨다니! 



    어쨌든 19세기에 마련된 에버니저 하워드의 이상적 전원도시 '가든 시티'는  오늘날 배드타운으로 전락되었고,  '의자는 건축이고, 소파는 부르주아다'라고 외치며 2차 대전 이후 급증하는 노동자들의 거주지 확보를
위해 구상되었던 르 꼬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는 슬럼화 된 공동주택 단지로 그 의미가 축소되었다. 뉴욕 맨허튼 소호의 작고 오래된 거리를 지키기 위한 모제스와의 한 판 승부 이전에 이런 대결이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새롭게 알았다. 도시를 놓고 벌이는 얘네들의 철학적 논쟁이 이렇게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게 놀랍다.  한마디로 '대충 살지 않겠다'는 기세다.  도시를 놓고 목숨 걸고 싸운 탓이다.  아니면 그녀가 옳았기 때문에 이긴 것인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제인 제이콥스가 남긴 '골목길의 유산' 덕분에 하루하루가 무척 다이내믹하긴 하다.


    복합기능, 저층빌딩 블록, 고밀도주거, 시간의 층위를 달리하는 건물들의 혼합, 그걸 가능케 만들어주는 길거리. 그녀에게는 도시 생활의 일상이 온통 길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제인 제이콥스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된다면 꼭 넣고 싶은 이야기를 하나 발견한 것 같다. 일개(?) 타이피스트가 도시 전문가들과 맞짱 떠서 철학적으로 승리한 전무후무한 사건!  그런데 우리라면 가능했을까?


글쓴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장편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김덕영 지음


<그리스의 시간을 걷다>, 김덕영 지음, 책세상 (2012년)


작가의 글을 더 읽고 싶은 분,  작가를 응원하고 책을 구입하고 싶으신 분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Tel: 070-8987-0408  / e-mail: docustory@gmail.com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서촌의 복합창조문화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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