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ㅏ쓰메 소ㅅ ㅔㅋ ㅣ, <고양이로소이다> 절반 리뷰.
'나쓰메 소세키는 1900년대 일본의 일반 교양이었다.'
1905년 일본 군국주의가 뤼순 전투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본격적인 대륙 진출로 확산되고 있던 당시. 일본에서는 장난기어린 제목의 책 하나가 발표되었다. 바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잊고 있었는데, 몇 년 전 읽다가 이 책을 덮었던 이유를 찾았다. 어느 모로 보나 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르고 이기적인 심성의 주인공에게는 쉽게 동화가 안 되는 것 같다.
그래도 이번엔 어느새 절반을 훌쩍 넘겼다. 그걸 가능하게 만든 건 역시 우리 동네 고양이 '인.왕.산'이들이다. 아무래도 사람은 자기가 처한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고양이들 덕분에 다시 읽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진도가 안 나가긴 마찬가지다.
1900년대 사람들, 그것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승전국 일본인들의 판타지가 곳곳에 스며 있다. 게다가 그 시기는 우리의 식민 역사와 포개져 있다. 당연히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기 더욱 어렵다.
한 마디로 <고양이로소이다>는 일본이 근대화를 넘어 서양과 맞장 뜨던 시절에 쓰여진 책이다. 책 곳곳에 등장하는 '승전보'란 1905년에 있었던 뤼순 함락 사건을 말한다. 소세키가 뤼순에서의 승전보를 기다리면서 이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난 이 소설 읽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시선을 빌려서 등장하는 인간에 대한 탐색이다.
어쩔 수 없이 1900년대 일본은 두 가지의 양면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근대화를 통해 동양에서 가장 선진적인 기술 문명과 자본의 발전을 이룩한 국가의 시민이란 자부심, 그리고 그런 당당함 이면에 존재하는 서양 문명에 대한 열등감.
서생이라 불리는 주인공은 하루에도 몇 번씩 폼잡고 서양의 고전을 붙잡고 있다. 남들이 볼 때는 꽤나 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자기 서재에 들어가기만 하면 책상에 엎드려 졸기만 한다. 얼마나 위선적인가. 남들 앞에선 깨끗하고 고상한 척 다하지만, 격이 없는 사이에선 콧털을 뽑아서 날리기도 한다. 그 콧털이 날아가 종이 위에 꼿꼿이 선 적도 있다.
이런 1900년대식 유머가 소세키의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다. 어쨌든 난 유머가 있는 사람이 좋으니까. 모든 건 제목 그대로 '고양이의 시선'에서 바라보게 된다.
고양이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는 것다. 개로 했어도 뭐 다를 건 없어보인다. 어차피 중요한 건 '인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 시선이면 되니까.
얼마 전 내 친구가 가게에 와서 '고양이 어딨어?'하면서 개와 고양이의 습성을 비교하며 이런 말을 했다.
"예를 들어 4인 가족이 사는 집에서 개는 3명의 주인에게 복종하고 나머지 한 명은 그저 갖고 놀기 딱 좋은 상대로 생각을 하는 습성이 있어. 고양이는 정반대야. 복종하는 주인은 한 명이고 나머지 3명은 그저 갖고 노는 대상일뿐이지."
그 친구의 말이 난 맞다고 생각한다. 가끔씩이지만 우리 동네 고양이들에게서는 어떤 서늘함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사람에게 훨씬 친화력이 강한 개보다는 뭔가 날카롭게 인간사를 쏘아볼 거 같은 고양이가 훨씬 인간 세계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 소세키가 '고양이의 시선'을 빌려 온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일본인들에게는 훨씬 가깝고 친근한 동물이 고양이인 이유도 있을 테고.
아무튼 난 이 책의 절반을 돌고 있다. 좀 시간이 걸려도 끝까지 읽을 생각이다. 고양이의 습성 같은 거 배울 걸 기대하지도 않는다. 애초부터 그럴 마음도 없었다.
위선적이고 이기적이고 때로는 독선적인 인간들의 모습을 고양이의 시선을 빌려서 풍자한 부분은 이 소설이 갖고 있는 백미다. 그리고 이런 소설이 1900년대 일본의 국민소설로 평가받았다. 말 그대로 누구나 좋아하고 곁에 두고 읽었다는 뜻이다. 소세키는 한 때 일본의 '일반 교양'이라 불려졌다.
일본의 한 문학평론가는 이걸 이렇게 표현했다. “오늘날 보통 교양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소세키적 교양이고, ‘소세키의 문화’라는 의식에서 유래하는 교양이라는 관념인 것이다.”
비록 서양 고전을 끼고 책상에 엎어져서 졸기만 했지만, 주인공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책은 에픽테토스였다.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 학파였던 바로 그 에픽테토스다. 차 한 잔 마시면서 친구 자식들 결혼 문제를 논하면서도 약방의 감초처럼 떠드는 소재는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였다.
그것이 1900년대 일본의 보통사람들이 추구했던 가장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교양이었다니.
누구든지 좋으면 따라 배우게 되어 있다. 1980년대 다방에서 폼잡고 옆구리에 끼고 들어갔던 영어 원서가 이 대목에서 떠오른다. 그래도 어쨌든 그렇게 살았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게 아닐까.
난 지금까지 일본의 근대화가 상하의 개념이 분명하고 위에서 아래를 향해서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아마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옆구리에 끼고 다니건, 졸려서 베개로 삼고 자던 모든 책에는 고융한 운명이 있을 것이다.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소세키 #뤼순공방전
#1905년 #에픽테토스 #호메로스
글쓴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100세 시대, 늦은 나이에 두 번째 인생에 도전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다큐스토리, 2013)
'중년의 사랑은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49금 소설, <내가 그리로 갈게>, 김덕영 지음 현재 작가는 서촌 통의동에 있는 작업실 겸 까페, '김PD의 통의동 스토리'에서 조금은 색다른 방식으로 독자들과 만나면서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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