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에 관한 성찰!
(리뷰) 영화 '곡성'
'의심에 관한 성찰'
포스터 한 가운데 적혀 있는 글귀가
곧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영화의 주제이고
메시지일 것이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
개인적인 감상평은 뒤로 하고 일단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고 싶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유명 영화평론가,
영화 감독 등의 평을 듣지 않고 영화를 봤다면?"
쉽게 말해서 그냥 봤다면 당신은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정말 대단한 영화라고 말하고 있을까?
어쩌면 미디어와 SNS에 쉽게 노출된 우리들은
이미 이 영화가 '대작'이고 '천재적'이며
'개성'있는 영화라는 미끼를 물고 영화를 본 것은 아닐까?
게다가 우리 안에 있는 묘한 공동체 의식이
'괜히 이 영화 보고 재미 없다 말하면 무식하다는 소리라도
듣게 되는 건 아냐?'라고 스스로의 판단을 정지시킨 건
아닐까?
나도 내 패부터 먼저 까고 이야기를 하겠다.
난 이런 영화 싫다. 의미고 뭐고, 개성이고 뭐고,
붉은 핏덩이가 난무하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멀쩡한 사람 이유도 없이 죽이는 그런 영화가 싫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 열광하는 이 사회, 정확히
말하면 우리의 '눈치'가 싫다.
나이든 꼰대가 되고 싶진 않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다.
이 영화는 장르가 애매하다.
장르에 익숙한 나 같은 관객들에게는 불편하다.
하지만 꼭 장르에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영화는 여러가지가 섞여 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인가?
총을 맞고도 죽지 않는 좀비들이 나오는 기괴한 영화?
'엑소시스트' 같은 심령술 영화?
핏덩이가 난무하는 잔혹한 공포 영화?
아니면 범인을 찾기 위한 스릴러 영화?
내 생각에 '곡성'은 이 모든 요소를 혼합했다.
게다가 결말이 애매하다. 그래서 '열린 구조'를 택하고 있다.
일부 영화 평론가들이 극찬한 부분은
이 영화가 종래에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개성'과 '독창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이 영화는 '의심'에 관한 성찰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가지 의심'에 대한
일종의 감독 나름의 문제 제기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의심을
suspect와 doubt로 나눠서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은 솔직히 매우 참신했다.
나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suspect가 타자에 대한 수상한 눈초리,
혹은 의혹을 품고 있는 마음을 뜻한다면,
doubt는 이보다 훨씬 주관적인 영역에 해당된다.
그건 일종의 not believe, 즉 '불신'의 영역이다.
영화 '곡성'에 많은 평론가와 감독, 지식인들이
열광했던 이유는 바로 이 부분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근본에 대한 의문과 질문을
던지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이렇게 '의심'과 '불신'이라는
축을 중심으로 등장인물을 재배치하면
좀 이해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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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광 무당(황정민) - 외지 일본인
vs
무명이라는 이름의 토속신(천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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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종구(곽도원)
vs
가톨릭 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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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영적, 신적 세계의 대결.
나쁜 영혼을 지닌 악마 같은 존재와
이에 맞서는 선하고 조금은 나약해 보이는
마을을 지키는 신령한 존재가 명확히
구분되고 대립한다.
게다가 결말은 완전 악마의 승전가다.
이런 신령한 존재들의 윗세계가 있고
그 아래에 우리가 살아가는 의심 많고
불신 많은 인간의 세계가 있다.
지극히 인간적인 의심과
악마에 대한 의혹을 담고 있는 사제의
종교적인 갈등이 넘나드는 경계선이
곳곳에 가로로 세로로 그물처럼 팽팽하게
펼쳐져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현실 세계.
바로 의심할 수밖에 없고,
불신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들의 세상이다.
'윗세계'와 '아랫세계'는 영화 상에서
왔다갔다 하며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걸 '오! 멋진데'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아! 복잡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우리는 혼란으로 뒤엉킨 '카오스'와
끊임없이 질서를 부여하고 줄을 그으려는
이성적 질서의 세계, 즉 '로고스'의 세계를
왔다갔다 하는 존재다.
흥미로운 건 '카오스' 역시도
신의 영역에 해당하는 세계라는 점이다.
그래서 신의 질서정연한 우주적 운행 법칙이
담긴 '코스모스'나 우리 입장에선 어차피
매한가지다.
난 이 영화를 극찬하는 사람들이
물고 있는 '미끼'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긴 이런 근원적인 질문을 영상으로
표현한다 게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난 싫다. 이유도 단순하다.
우리의 근원적인 자기 성찰을
꼭 그런 잔인하고 지저분한 방법으로
꼭 봐야하는 것인가?,라는.
도대체 아름다운 것이란 무엇인가?
숭고한 것은 무엇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고 인간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연에는 왜 아름다움이 존재하는가?
자연에도 분명 추함이 있다.
하지만 자연을 접하면서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그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하지 못한 적이 있는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름다움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근원적인 의미로 따져 보자면,
아름다움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마치 로댕이 정육면체의 대리석 안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여성의 나체를
발견해내듯이 말이다.
때문에 로댕에게 아름다움의 창조란
깎아내는 작업이 아니라 덜어내는 작업이다.
숨겨진 아름다움의 본질을 찾아내는.
난 '곡성'에서 아름다운 것,
숭고한 것, 감동적인 이야기를 찾아내지 못했다.
내가 진짜 꼰대가 되었기 때문일까?,라고
또 한 번 스스로 물음을 던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세상에는 '레전드'가 되는 영화들이 있다.
그건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또는 진한 애정을 지닌 매니아들의 품 속에서
오래오래 회자되는 작품들이다.
중요한 건 '레전드'에도 카테고리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아마도 '곡성'은 레전드가 될 것이다.
보통의 명작들이 담겨지는 바구니와는
조금 다른.
어쨌거나 내가 쓴 글을 되돌아 보니,
오랜만에 글을 쓰면서 물음표(?)를 수도
없이 많이 날린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나도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좋아하는 영화는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나는 이 영화가 '싫은 것'이지,
'나쁜 것'은 아니다.
어차피 영화는
관객에게는 카타르시스와 재미를,
제작자에게는 돈을 안겨주는 것이 목적이다.
감히 하나를 덧붙인다면,
나에게 좋은 영화란 한 가지 항목이 추가된다.
'영화를 보고 행복하셨어요?'
#곡성 #리뷰 #의심 #불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