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론자 포이어바흐가 말했다.
이 한 마디 문장에는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의 건강을 나타내는 증표이고 심지어 먹는 것에 따라 한 인간의 의식과 정서까지 결정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시대(?), 그러면서도 제대로 먹을 것은 턱없이 부족하고 한편으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오늘날과 같은 모순된 현대사회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개념에 대한 이해만을 놓고 본다면,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만약 먹는 것에 의해서 존재성이 규정된다면, 매일 풀만 뜯어먹고 사는 황소나 손가락보다 작은 크릴새우만을 먹으면서도 큰 몸집과 근육 덩어리를 유지하고 있는 고래와 같은 것들을 설명하기엔 왠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의 '존재' 안에는 고유한 메커니즘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먼저 그 뭔가를 먹고 있는 '존재' 자체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인간 사회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면, 결국은 '먹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성찰도 필요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을 먹는 존재'로 인식했던 철학자가 한 사람 있었다. 사실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영어식 표현은 그의 말, 'Der Mensch ist, was er iszt'라는 독일어를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독일의 철학자 포이어바흐였다.
사실 우리에게 그는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를 통해서 세상에 더 알려졌다. 11가지 테제 안에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관념적인 유물론을 비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유명한 실천적 행동강령으로서의 유물론을 제시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여러 가지로 '해석'해왔을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이 명제의 표적이 바로 포이어바흐였다. 19세기 독일의 지성계에서 벌어졌던 신과 종교로 대변되는 관념론에 대한 비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르크스와 포이어바흐는 시대를 앞장 서서 이끌었다.
헤겔의 사상에 심취되어 한때 절대정신, 절대이성을 신학의 범위 내에서 탐색하려던 포이어바흐는 어느 날 헤겔과 선을 긋고 자신만의 독특한 유물론적 입장을 만들어나간다. 헤겔좌파의 수장에서 유물론자로 변신한 것이다. 그 변곡점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그것도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 하나에도 계급의 차이가 존재하는 19세기 비참한 절대다수 '인간'의 삶을 바라보기 시작한 다음부터다. 많은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포이어바흐 역시 경제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았다. 도자기 공장을 운영하던 귀부인과의 결혼은 그의 생활고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그의 삶에 '인간', 그것도 19세기적인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비참한 '인간'이 들어오면서 그는 자비로운 신을 거부한다. 종교가 아편처럼 인간에게 고통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게 만든다는 그의 입장은 철저하게 그 당시 비참한 인간의 모습에서 이유를 찾아져야 한다.
결국 포이어바흐의 눈에 비친 세상 속에서 인간은 결국 자신의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자신을 규정짓는다. 그 안에는 건강 따위를 생각할 겨를도 없다. 먹는 것이 아니면 먹지 못하는 것, 이 두 가지만이 존재하는 비정한 정글 속이다. 먹으면 살고, 먹지 못하면 죽는다. 결국 인간은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인간은 먹는 존재'라는 그의 말 속에 그래서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세월이 흘러 시대도 변했다. 이제 포이어바흐의 명제는 건강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논리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오늘날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라는 표현에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좋은 걸 먹어야 한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그런 주장의 기원을 찾아보면 흥미롭게도 다시 포이어바흐와 시기적으로 겹친다. 1826년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미식가인 브리야 사바랭(Jean-Anthelme Brillat-Savarin)은 <미식예찬>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Dis-moi ce que tu manges, je te dirai ce que tu es.)
사바랭의 말은 미국으로 건너와 영양학자 빅터 린드러의 손에 의해서 다시 탈바꿈된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가장 유사한 개념으로 말이다. 그는 '질병의 90%가 싸구려 음식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질 나쁜 식재료, 몸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고 몸에 탈이 나서 결국에 병이 걸린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해서 'You are what you eat'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가장 유사한 방식으로 정착되었다.
'먹는다'는 행위를 놓고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과 주의주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한쪽에서는 생존임을 말하려고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적 건강유지법을 음식에서 찾고 있다. 그 차이는 '인간'에 대한 인식이 아닐까. 내 옆에 있는 인간 그 자체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뭔가를 먹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다르게 보일 수밖에. 어쨌거나 인간은 고래나 황소가 아니다. 인간이 먹는 것이 곧 그대로 인간의 몸과 정신을 규정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나쁜 음식을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딱 절반씩 맞고 틀리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반반씩 맞고 틀리는 것 사이에 한 가지 중요한 게 자리를 잡고 있다. 바로 '누구와 함께' 먹는가, 하는 문제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고 혼자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확실하다면, 인간의 먹는 행위도 결국엔 사회적인 행위로서 파악해야 한다. 매일 혼자서 식사를 하는 사람과 즐겁게 친구들과 식사를 하는 사람을 비교해 보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결국 입으로 먹는 것을 섭취하는 것과 그것이 우리 몸에 흡수되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차원이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혼자서 폭식을 하거나 자기만 배부르게 먹는 사람과 아무리 소박한 음식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식사를 하는 사람은 같을 수가 없는 것 아닐까.
어제 누구와 무엇을 먹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에서부터 나의 건강식은 시작되는 것 같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음식이라도 역시 위안이 되는 건 좋은 사람과 같이 나눠 먹는 일이 아닐까.
글쓴이: 김덕영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저자 / 다큐멘터리 PD / 서촌의 복합창조문화 공간
'김PD의 통의동 스토리' 대표
<뒤늦게 발동걸린 인생들의 이야기>, 김덕영 지음 (다큐스토리, 2013)